【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 중국 정계는 예로부터 원로 정치로 유명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나 덩샤오핑(鄧小平) 등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최고 권력을 놓지 않은 사실만 봐도 이는 잘 알 수 있다. 여기에 지난 세기 말까지 중국 정계에 이른바 팔로(八老. 막후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8명의 원로)라는 단어가 존재했다면 더 이상 설명은 필요 없다.

원로 정치는 장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폐해가 더 많았다고 해도 좋았다. 어떻게든 현상을 깨뜨리는 것이 소망스럽다고 할 수 있었다. 중국이 지난 세기 말부터 당정 최고 지도부에 칠상팔하(七上八下. 67세 이하는 현직 유지, 68세 이상은 은퇴)라는 불문율을 적용, 운용해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보인다.

중국의 전랑 외교를 진두지휘하게 될 왕이 정치국원 겸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사진제공=외교부 홈페이지]
중국의 전랑 외교를 진두지휘하게 될 왕이 정치국원 겸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사진제공=외교부 홈페이지]

하지만 이 불문율도 예외가 전혀 없지는 않다. 필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케이스도 있다는 말이 된다. 지난해 10월에 열린 제20차 전국대표대회(매 5년마다 열리는 전당대회)를 통해 이뤄진 최고위급 인사에서도 그랬다고 할 수 있다.

각각 총리,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국회에 해당) 상무위원장, 중국정치인민협상회의(정협) 주석이었던 리커창(李克强. 68), 리잔수(栗戰書. 73), 왕양(汪洋. 68) 등 올해 68세 이상이 되는 최고위 지도자들의 은퇴는 결정됐으나 살아남은 행운의 주인공들은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마도 24명 정원의 중앙정치국 위원이 되면서 더 높은 자리를 보장받은 왕이(王毅. 70) 당시 외교부장이 아니었나 싶다. 실제로 그는 이후 외교부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자연스럽게 외교부의 상부 조직이라고 할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으로 취임했다.

중국의 외교안보 실무를 명실상부 총괄하는 컨트롤 타워의 수장이 됐다고 할 수 있었다. 현재는 자신의 후임인 친강(秦剛. 57) 외교부장과 함께 공격적 성향이 농후한 중국 외교의 특징인 ‘전랑(戰狼. 싸우는 늑대) 외교’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자신의 직속 상부였던 리 전 총리와는 달리 앞으로 은퇴하지 않은 채 5년 더 활약하면서 미국 등이 자국 제어를 위해 추진 중인 신냉전에 맞서 싸울 그는 베이징 출신으로 이른바 지청(知靑. 문화대혁명 당시 하방된 청년 세대를 의미)이었다.

실제로 10대 후반 나이 때부터 20대 중반 때까지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때문에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8년이 돼서야 겨우 베이징제2외국어대학 일어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졸업 후인 82년 외교부에 입부한 그는 전공에 맞게 이후 7년 동안 아주사(아주국)에서만 일했다. 이어 89년 주일 대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하면서 비로소 외교관 경력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근무할 때 공사참사관으로 승진한 그는 94년 5년 만에 아주사 부사장(부국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듬해에는 고작 32세의 나이로 사장으로 승진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없었던 기록을 세웠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98년에도 다시 기록을 세웠다. 고작 35세의 나이에 부장조리(차관보)가 된 것이다. 부장 자리에 앉는 것은 완전히 목전의 일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가 부장이 된 것은 무려 15년이나 지난 2013년이었다. 당연히 그 중간에는 부부장과 주일 대사로도 일했다. 2018년부터는 다시 거침이 없었다. 제1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무위원으로 승진하는가 싶더니 지난해에는 마침내 정치국 위원 자리를 꿰찬 것이다.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 자리는 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베이징 정계 소식통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당초 은퇴를 강력하게 원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적극적으로 은퇴를 만류하자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결국 중국 외교안보 실무를 총괄하는 컨트롤 타워가 됐다.

그는 시 주석이 은퇴를 만류하면서 중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외교관 출신답게 대단한 달변가로 알려져 있다. 매너 역시 국제신사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좋다. 여기에 영화배우 뺨치게 생긴 인물도 장점이라고 해야 한다. 출세에 상당한 도움을 준 처가가 명문가라는 사실도 약점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치명적인 단점도 없지 않다. 너무 자신이 넘치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 남의 의견을 잘 경청하지 않는 대화 스타일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을 상대할 때 자주 보이는 너무 공격적인 성향 역시 장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평생을 외교관으로 보냈음에도 외국 근무가 달랑 일본에서 경험한 두 차례 뿐이라는 것도 자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일본어는 능통해도 영어가 부끄러운 수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은 이로 보면 하나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이 단점들의 대부분은 묘하게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 국가들을 상대할 때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시 주석이 그를 ‘전랑 외교’의 총책임자로 낙점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이 아닌가 보인다.

베이징의 정치 평론가 천후이민(陳慧民) 씨가 “그는 스타일을 놓고 보면 ‘전랑 외교’에 특화된 인물이라고 해도 좋다. 은퇴하지 않은 것은 분명 이유가 있다.”면서 향후 그가 미국과의 신냉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분석하는 것은 이로 보면 크게 무리한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는 한국과도 상당히 인연이 깊다. 한국의 각계 인사들과 자주 만났을 뿐 아니라 여러 차례 방한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는 한국에 상당히 우호적인 친한파 인사로 분류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이 미국 일변도의 외교, 안보 정책을 추진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앞으로 정 반대의 이미지를 가지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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