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절승 금감산의 석가봉에 아침 안개 내린다', '밀림의 호랑이'... 세화기법의 가장 우수한 조선화

선우영 화가의 '칠보산 여름'(200-130 2005년)
선우영 화가의 '칠보산 여름'(200-130 2005년)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명주실 뭉치가 마구 풀려 쏟아져 내리는 듯한 폭포수, 광원에 의한 색대조와 색변이가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회갈색의 바위들, 천사와 요정들이 하얀 복장을 입은 채로 폭포수 물 아래로 뛰어드는 듯하다.

이 그림은 수정처럼 맑은 계곡물, 달리 말해 은쟁반 위에 푸른 옥구슬들이 굴러다니듯 일렁이는 청록빛 계곡물이 상하간 색의 조응을 이루는 바위 주변의 녹음과 수풀들과 더불어 상단에 선녀들의 하늘 통로를 열어준 햇살 가득한 하얀 창공의 여백미와 조화의 절정을 이룬 선우영 폭포화의 걸작이다.

좌우 바위의 질감 표현 능력이 경이적인 이 그림은 근경의 초첨과 정면적인 평원법의 시야로 사생하듯 정밀하게 그려졌다. 어찌보면 가장 선우영다운 특성을 표현해낸 그림으로서 특히 바위들이 숨구멍으로 숨쉬는 듯한 질감을 황홀할 정도로 맛깔스럽게 표현해낸 세밀화법의 결정판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오목조목한 입체감과 우둘투둘한 표면의 촉감이 생생히 전달되는 바위들의 자연 미감이 최고조로 느껴진다. 선우영의 폭포수 그림 중 가장 잘 알려진 명화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금강산 구룡폭포과 구월산 지원폭포를 들 수 있다.

이 그림들은 대작이 많기도 하지만 시점을 원경으로 잡아 그려서 전체적으로 큰 구도의 시원한 산수화로서 조망된다. 그리하여 폭포수 아래 계곡물을 그릴 여지가 없다. 하지만 칠보산 폭포는 그에 대비하여 그 폭포수의 청명함이 비치는 흐르는 계곡물을 담아놓은 연못이 존재하여 색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선우영 작가의 작풍 경향 중 시원스럽고 활달한 몰골법이 가미되어 원경처리된 세화기법이 조화를 이룬 산수 풍경화를 선호하는 애호가들이 있는 반면, 이렇게 초고밀도의 정통적인 세화기법이 지배적인 주류를 이룬 그림만이 가장 선우영 다운 그림이라고 평가하며 좋아하는 팬층이 더 많이 존재한다.

선우영은 화선지 위의 조선화로 캔버스 위의 유화에서 보다 더 신비로운 마띠에르 질감을 구현해내는 특출난 화가이다. 유화에서는 음영 표현과 뒤섞인 덧칠 표면의 돌출감과 붓자국의 입체감에서 마띠에르가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지만, 조선화는 순전한 평면에서 실제 붓질의 입체감 효과와 명암 표현 기법으로 마띠에르의 아우라가 창출되기 때문에 여간한 기량이 아니고서는 유화와 견줄 바가 못된다.

그런데 선우영의 화폭에서는 항상 유화의 질감을 넘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독창적인 예술혼이 살아 숨쉬며 신출귀몰한 기량이 넘쳐 흐르고 있다. 선우영의 화풍은 북방 계열의 사실주의 화풍을 가장 정통하게 표현해낸 북한의 대표화가로 꼽히고, 그의 그림은 고구려 벽화의 마띠에르가 살아 숨쉬듯 재현되어 있고 고전적인 풍미가 넘실대고 있다.

선우영은 사실주의 화풍에 누구보다 충실하면서도 북한에서 조선화 화풍을 창시하였거나 개척해나간 대부분의 월북화가와는 매우 이질적인 특징을 지닌 개성 만점의 토종 북방 화가이다. 그래서 누구와 견주어도 그의 그림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차별적인 요소가 전반적으로 도배를 한 듯 깔려 있다.

그 표현력 중에서도 바위의 울퉁불퉁한 굴곡과 조각처럼 날카롭게 깍기는 면 분할적 표현감, 촉감에서 느껴지는 꺼끌거리는 입체감과 우둘투둘한 표면의 돌출감, 그리고 오랜 풍상 속에서 풍화작용을 겪은 부드러운 바위 표면의 미끄러운 감촉이 전달되는 표현력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압권이다. 그는 이 방면에 관한 한 지금까지 존재한 이 세상의 어떤 화가도 따라올 수 없는 특화의 경지에 올라섰다.

선우영 화가의 '천하절승 금강산의 석가봉에 아침 안개 내린다'(252-95 2007년)선우영 화가의 
선우영 화가의 '천하절승 금강산의 석가봉에 아침 안개 내린다'(252-95 2007년)선우영 화가의 

고동색 계열의 짙은 암갈색과 진한 회갈색, 연한 황갈색과 모래빛깔의 연한 황토색에 이르기까지 바위와 흙에 관한 다채로운 산맥의 표피색 배합이 명암 대비 속에 파노라마처럼 이어져 있다. 단일 색 계조로 통일적인 색채를 구현한 색묘법의 구사가 매우 고상하고 우아하며 깊이감 있게 펼쳐져 있어 고급스럽고 중후한 귀족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동일 색 계열은 진초록과 연두색의 산림이 명암에 따라 요소요소에 흩어져서 산맥들이 저마다 녹색 옷으로 단장한 차림새의 부채살처럼 계속 이어진다. 옆구리를 휘감아도는 아침 안개가 고요한 정적의 산맥을 일깨우며 운치와 율동미를 상큼하게 선사해 주고 있다.

금강산 석가봉은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선우영의 대표적인 풍경화로 소개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작 중 하나이며, 거친 기암괴석의 바위들을 매우 기하학적으로 오묘하게 형상하였고 그 부드러운 색감과 굴곡진 모양새는 붓으로 산 전체를 갈아서 다듬은 느낌을 준다.

선우영의 대작 그림 중 좌우측으로 제목과 싸인 및 년도를 구별해서 표기한 그림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하기야 제목이 너무도 길어 구분해서 표기한 점도 수긍이 간다. 이 그림은 자신의 최상의 작품에 표기하는 예의 '산률' 이라는 자신의 호를 직접 서명했을 뿐만 아니라, 산률 낙관을 따로 찍어놓은 점도 이 작품에 작가가 최고의 만족감을 표시한 징표이다. 또한 선우영 이라는 자신의 서명 글씨체를 멋진 명필체로 리듬감 넘치는 예술 감각으로 사뿐하게 적어놓은 점도 또다른 특별한 관람 포인트다.

선우영 화가의 '밀림의 호랑이'(188-98 2009년)
선우영 화가의 '밀림의 호랑이'(188-98 2009년)

선우영에게 북한 조선화의 진채세화 분야 최고봉이라는 월계관을 씌워준 작품이 바로 이 밀림의 호랑이다. 가장 완성도 높은 세화(섬세한 세필의 밀도가 높은 회화)의 완결판이자 부드러운 색감으로 다양한 채색들을 구사하여 조선화의 은은하면서도 화미하고 고상한 색상의 미감을 가장 수준 높게 발현한 작품으로 칭송받고 있다.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선우영 작품을 포함하여 북한 조선화 전체의 진채세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호랑이는 구상화의 진면목을 보여준 반면, 배경의 수림은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화가답게 추상적인 도안 형태의 청보라색 나무들을 빼곡하게 촘촘히 디자인했고 근경의 군청색 나무들은 상징성 있게 드문드문 형상하여 압축미가 돋보인다. 마치 정영만의 수묵 추상화에서 나무들을 미니멀리즘식으로 간결하고도 산세에 비해 과장되게 표현한 화면이 연상된다.

좌측의 고목나무에는 잎새들이 마치 빨래처럼 가지에 늘어지게 걸쳐 있어 느긋한 노호(老虎)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고,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심산유곡의 깊은 산중을 암시하는 듯이 을씨년스럽고 괴기스러운 느낌마저 풍긴다. 마치 범접하기 어려운 산신령이 호랑이로 변신하여 산을 수호하고 모든 산중의 생명들을 점잖게 호령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황갈색의 털과 수염들이 풍성하고 덥수룩하게 온몸을 휘감고 있는 호랑이는 온세상을 푸근하게 품어 안을 태세다. 턱수염과 목줄기를 수북하게 뒤덮은 털들은 보기만해도 푹신한 감촉이 안겨온다.

호랑이 발 아래에는 갈대들이 살며시 누워 누렇게 익어가고 있고 바닥에는 별모양의 덩굴잎들이 바람에 뒹굴며 거름이 되어갈 채비를 차리고 있어 늦은 여름과 가을 초입이 교차하는 계절적 분위기를 운동감 있게 드러내주고 있다. 선우영의 호랑이는 각별히 세밀한 공력을 요하는 작품이라 산수화에 비해 유작이 지극히 적게 남겨져 있는 귀한 작품이기 때문에 위작(僞作)들이 특히 많이 나도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 관한 한 진품과 위작의 감별은 사진상으로 비교해서 보아도 세밀한 털의 질감과 밀도, 앉아 있는 자세의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포즈와 담담한 눈빛, 고아한 색감 등의 측면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식별이 가능하다.

선우영 화가 
선우영 화가 

◇선우영(1946-2009)은 누구인가?

선우영은 경공업대학에서 보석 공예를 배우다가 평양미술대학에 편입하여 1969년 동대학 산업미술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처음에는 중앙미술창작사에서 유화를 그리다가 1972년 이후 조선미술가동맹에서 정종여로부터 조선화를 배우기 시작한 다양한 미술 편력을 지녔다.

다음은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 적힌 선우영의 세화기법에 관련된 내용을 발췌하였다. "그가 창작한 <금강산 석가봉>과 <범>은 세화기법으로 그린 조선화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대표작이다.

<금강산 석가봉>은 비교적 큰 풍경화이지만 자그마한 빈구석도 없이 화면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원근관계에 맞게 구체성을 띠고 침착하게 완성하였다. 그의 모든 풍경화들에서는 중경과 원경에 놓여 있는 대상물의 묘사가 보다 구체적인 것이 특징이다.

큰 것을 위하여 부분적인 것의 생략과 같은 일반적 논리는 그의 풍경화에서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큰 것을 위하여 부분적인 것을 더 파고들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미술은 직관예술인 것만큼 사람의 눈에 들어야 하고 볼수록 새로운 진미가 느껴져야 생명력을 잃지 않게 된다.

세화 형상은 조선화 형식의 화법적 특성과 우월성을 보여주는 징표의 하나로 되기 때문에 조선화가들은 세화를 들고 나오면서 서로 누가 더 미세한 그림을 그려내는가를 경쟁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도 그러하다. 조선화 부분에서 지금까지 다른 미술 형식이 미치지 못하는 섬세한 형상을 수많이 창조하여 왔지만, 선우영의 작품에서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밀도를 가진 세화를 창조한 례는 아직 없었다. 여기에 세화가로서 선우영이 조선화 형식 발전에 기여한 남다른 공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우영의 세화기법은 사실주의 창작방법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현미경적으로 그리는 현실주의, 자연주의, 초현실주의와는 엄격히 구별된다. 그의 세화 그림들은 대상의 본질적인 측면을 깊이 파고들어 성격화함으로써 여타의 창작방법이 추구하는 형상과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진다.

그의 세화들은 정서적 감정을 가지고 정화되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더욱 강조되고 불필요하고 부차적인 것들은 생략된다. 따라서 필수불가결의 부분과 요소들은 더욱더 선명한 자태를 드러내며 아름다운 모습과 특징을 부각하고 있다."

선우영의 저서 <조선화화법에 의한 풍경 묘사 연구-2006년>에 언급된 그의 미학 이론 일부를 옮겨온다. “인민대중의 창조적 활동에 의하여 자연이 정복되고 사람이 살며 활동하는데 필요한 물질적 재부가 끊임없이 증대되어 왔다. 이 창조적인 활동과정에 사람들은 높아가는 문화정서 생활에 자연을 적용시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참다운 미적 향유를 실현시켰다. (중략)

인민대중의 자주적 요구와 창조적 로동에 의하여 개조된 자연대상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며 우리 미술가들은 자기들의 화폭에 이러한 자연을 즐겨 담게 되는 것이다.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다음으로 진화적 운동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천태만상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대상이다.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자연은 인간의 창조적 활동과 관계없이 자체의 진화적 과정을 통하여 수천수만가지의 모습들을 이룰 뿐만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에 강하게 작용하는 조화현상을 가지게 된다. (중략)

산천에 차고 넘치는 맑은 공기와 수정같이 흐르는 시내물, 절묘함과 장엄함을 나타내는 천태만상의 아름다운 자연현상은 사람들에게 충분하고 안정된 휴식을 보장하고 그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데 이바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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