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석고가 있는 정물'로 대한민국 1회 국전 특선 수상

 

최창식 화가의 '소년'(10호,1966년)
최창식 화가의 '소년'(10호,1966년)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소년 (10호,1966년)

최창식의 '소년'은 66년 작품으로 40대 후반 작가로서 절정의 기량을 드러내고 있다. 유화가로서의 붓놀림이 경지에 다다른 듯한 경쾌함이 돋보이며 선명한 구도 설정과 굵은 붓터치의 입체적 음영 표현(임파스토 기법/Impasto)을 통해 생동감 있게 인물을 묘사함으로써 작가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산하고 있는 작품이다.

마치 남한의 유명 작고 작가 최쌍중의 작품을 보는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다. 화가로서 경지에 올라서면 실력 면에서는 우열이 사라지고 개성의 차이만 남는다는 어느 노화가의 말이 생각이 난다.

북한에서 70년대초 주체사상이 확립돼 정치와 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의 지침으로 작동, 사회적 분위기를 압도하기 전에는 남북한 근대작가의 유화 분야 구상화에 있어서 화풍의 확연한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소년은 모나리자의 뒷배경과 닮은 구도의 강가를 배경으로 땅거미가 지기 직전의 갈대밭 앞에서 운동경기를 기분 좋게 마치고 온 듯 흰색 띠를 머리에 두른 채 책가방을 들고 귀가중이다.

신이 난 밝은 표정의 소년이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호기 있게 서 있는 폼은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러울 게 없어 보인다. 소년의 보라색 상의는 청보랏빛의 황혼과, 짙은 초록의 바지색은 갈대의 황색과 색감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최창식 화가의 '화실에서'(12호,1976년)
최창식 화가의 '화실에서'(12호,1976년)

 ▲화실에서(12호 1976년)

미모의 여성화가가 하이힐 구두를 신고 화실에서 양손에 세 개의 붓을 들고 있어 부지런하고 활달한 여성상을 연출하였다. 아마도 화실에서 직접 작업을 하는 중이라기 보다는 미술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일 것 같다.

세 개의 붓은 그런 교육 과정에서 주요 포인트를 잡아주는 도구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화실에서 그림 지도를 하는 단일 여성을 대상으로 화실 내부의 다양한 모습을 배경 구도로 하여 그려진 그림은 매우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하이힐은 자줏빛 보라색, 치마는 군청색, 상의는 짙은 핑크색으로 그 당시를 감안하면 거의 모델급 수준의 칼라풀한 패션의 미술교사는 뛰어난 미모와 함께 세련된 미색을 지니었다.

눈썹과 눈매, 콧등과 입가, 갸름한 두상과 턱선 등은 최창식과 많이 닮아 있다. 미술을 전공하고 어엿하게 성장하여 어느덧 미술 교육자로 변신한 딸의 초상화를 그리며 뿌듯해하고 희열을 느끼며 감회어린 아버지 최창식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비춰진다.

하지만 경직된 표정과 예리한 눈빛 등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의 최창식과 다소 차이가 나기 때문에 후배 미술 교육자이거나 동료 미술가의 딸일 수도 있다. 공간 구도도 다층적이고 입체적이다.

화실에서는 여러 캔버스가 각기 다른 구도의 형상으로 지그재그의 다기한 각도로 설치되어 있다. 학생들의 실기시간 중 휴식시간에 잠시 쉬고 있는 있는 미술교사에게 활동을 정지시키고 한동안 포즈를 취하라고 하여 빠른 시간에 그녀를 화폭에 담은 것으로도 추정된다.

위 두 그림은 10년의 격차를 지니면서 그의 둔중하고 묵직한 초창기 화법에서 예리하고 섬세한 중후반기 화법으로의 변천사를 음미해볼 수 있다.

최창식 화가의 '기계공'(10호,1978년)
최창식 화가의 '기계공'(10호,1978년)

▲기계공(10호 1978년)

북한에서는 군이 상품과 용역 생산뿐만 아니라 광산업과 어업 등의 주요한 관리 주체가 되어 있다. 때로는 노동당과 사업권을 가지고 경쟁하기도 하며 권력 싸움을 전개하기도 하는 거대한 군영산업 체제의 국가이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군인은 기계 부속품을 생산하고 있는 기계공인데 갸름한 골상과 선량한 인상이 젊은 시절 최창식을 너무 빼어 닮아 미술가들의 노동 현장 체험시의 자화상 같이 느껴진다.

​복잡다기하고 현란한 마름모형 구도에 매우 이채로운 다양한 색채 형상은 노련한 대가의 작품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최창식은 대한민국 국전 1회의 특선 작가이다. 한마디로 남한에서 승승장구 할 수 있었는데도 월북한 것은 나름의 신념과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1920년생인 작가는 북한에서 항일 민족주의 화가 길진섭을 잘 따르고 또 스승 겸 대선배와의 공동 작업을 많이 한 각별한 인연으로 보아 그의 소신과 심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최창식(1920-2003)은 누구인가?

최창식 화가
최창식 화가

최창식은 1949년 작품 '석고가 있는 정물'(50호)로 대한민국 1회 국전의 특선을 수상한 작가이다. 그는 다른 주요 근대 작가에 비해 대한민국에서는 잊혀져 있다시피 그리 널리 기억되고 있지 않지만, 월북화가로서 북한에서 오랜 기간(1920-2003) 꾸준한 작가활동을 왕성히 이어간 실력파 작가이다.

그는 충청남도 홍성 출생으로 예산에서 농업학교를 다니던 중에 미술에 취미를 가지고 그림공부를 하였다. 미술에 뜻을 두고 대구사범학교에서 단기강습을 받고 일본에 건너가 도쿄의 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 부친의 병 위급으로 중도에서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예산, 서울 등지에서 6.25전쟁 전까지 미술교원으로 있었다.

최창식은 길진섭과 깊은 연계를 가지고 여러 작품을 공동 창작하였다. 그 가운데서 길진섭과 합작한 유화 '해금강 만물상'(60년, 500호), '전쟁이 끝난 강선 땅에서'(61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전쟁이 끝난 강선 땅에서'는 길진섭의 지도 하에서 당시 쟁쟁한 미술가로 알려져 있던 장혁태, 송찬형 등과 함께 그린 것으로서 형상의 기념비성과 회화적 묘사의 구체성, 성격창조의 우수성으로 하여 북한 미술이 달성한 특출한 성과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은 그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최창식은 깨끗한 창작적 양심을 가지고 나라의 미술발전을 위한 미술전람회에 거의 빠짐없이 작품을 내놓았다. 미술작품은 창작가의 지향과 넋이며 사색과 열정의 고귀한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람회에 꾸준한 창작적 열정을 가지고 형상성 있는 작품을 내놓은 그의 노력은 미술가로서의 의무와 사명감을 언제나 잊지 않고 성실히 수행해 온 창작가적 양심의 발현이었다. 최창식의 그림들은 색채가 침착하고 고상한 측면이 있다.

또한 유화의 형태적 특성을 살려 깊이 있는 형상을 창조하려는 탐구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오랜기간에 걸쳐 미술창작사업을 하여 오면서 적지 않은 미술신인들을 키워냈고 그들의 창작사업을 성의를 다해 도와준 공로 있는 미술가이다. 그는 일찍이 공훈예술가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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