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 중국의 관리 부패는 유명하다. 아마 세계적으로 비견될 국가가 없다고 해도 좋지 않나 싶다. 매년 평균 수십여 명의 부장(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리들이 해마다 부패로 낙마하면서 최악의 경우 목숨까지 잃는 것은 때문에 결코 괜한 게 아니다.

여기에 이들이 자행하는 부패의 규모가 최소 1억 위안(元. 193억 원) 정도가 아닌 한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현실까지 감안할 경우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국 언론이 부패 관리들을 굳이 호랑이(고위급)와 파리(하위직)로 구분하는 것은 다 까닭이 있지 않나 싶다.

당연히 중국 사정 당국은 중앙기율검사위원회를 통해 이들 호랑이와 파리들을 때려잡고 있다. 맡고 있는 역할이 워낙 엄중한 만큼 책임자는 당 고위급 지도자가 맡고 있다. 지난해 10월 막을 내린 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매 5년마다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 된 리시(李希·67)가 바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리시 중국 중앙기율검사위 서기. 부패로 유명한 중국 당정의 사정 총 책임자로 역할을 잘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사진제공=환추스바오(環球時報)]
리시 중국 중앙기율검사위 서기. 부패로 유명한 중국 당정의 사정 총 책임자로 역할을 잘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사진제공=환추스바오(環球時報)]

부패 관리들에게는 그야말로 저승사자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닐 그는 1956년 간쑤(甘肅)성 량당(兩當)현에서 출생했다. 완전 깡촌 출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츨신으로 볼 때는 본인의 의지가 박약했다면 평범한 촌부로 살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의지가 상당히 강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래의 고향 친구들과는 달리 거의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을 한 것을 보면 분명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학교는 간쑤성 일대에서는 최고 명문인 시베이(西北)사범대학을 나왔다. 중국어를 전공했다. 평소 상당히 조리가 있는 그의 말이 격조도 상당한 것은 이 전공과 관계가 있지 않나 보인다.

그는 처음 관리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전도유망한 에이스는 아니었다고 해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2년 처음 배치된 곳이 고향 간쑤성 선전부 비서처 간사로 출발했다면 이렇게 단언해도 괜찮다. 이후에도 크게 변화는 없었다. 간간이 승진도 하면서 2004년에 간쑤성 비서장까지 지냈음에도 고향 벽촌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던 2006년 어느덧 50세에 이른 그의 인생에 대전환기가 찾아왔다. 인근의 산시(陝西)성으로 전근된 후 바로 옌안(延安)시 서기가 된 것이다. 이어 2011년 그는 다시 상하이(上海)시로 이동해 조직부 부장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나이 탓에 더 이상의 승진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운명적으로 엮인 인연이 있었다. 우선 그의 고향 량당이 그랬다. 시 주석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가 공산 혁명 활동을 하던 곳이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시 전 부총리의 절친이었던 리쯔치(李子奇) 전 간쑤성 서기의 비서로 근무한 경험도 보유하고 있었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가 옌안 서기로 있을 때 시 주석이 문화대혁명 당시 하방(下放) 생활을 했던 량자허(梁家河)촌을 관광지로 조성했다는 사실이었다. 2012년 가을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총서기가 되면서 대권을 잡은 시 주석이 당시 상하이 조직부 부장을 하고 있던 그를 주목한 것은 하나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2013년 졸지에 조직부 부장에서 직급이 무려 두 단계 이상이나 되는 상하이 부서기로 승진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정말 거칠 것이 없었다. 1년 후 랴오닝(遼寧)성 부서기로 이동해 성장 자리에까지 오른 다음 2017년에는 급기야 25명이 정원인 정치국에까지 입성할 수 있었다. 광동(廣東)성 서기가 된 것은 완전 덤이라고 해야 했다. 작년 상무위원회에 진입한 쾌거를 이룬 것은 당시 이미 예견됐다고 해도 좋았다.

이력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전형적인 대기만성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은인자중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참을성이 대단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인물로도 당정 고위층 내부에서는 손꼽힌다.

그의 장점은 이외에도 많다. 최고 지도자인 시 주석에 대한 충성심과도 연결된다고 해도 좋을 빠른 눈치를 우선 더 꼽을 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때는 그가 시 주석의 배려로 거머쥔 상하이 부서기 자리에 있었던 2014년이었다. 시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 부총리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한 이 해에 그의 고향 량당에서는 행사 하나가 꽤 성대하게 열렸다. 그게 시 전 부총리의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로 당시 그는 만사 제쳐놓고 고향으로 향했다. 말할 것도 없이 시 전 부총리에 대한 존경심도 아끼지 않고 드러냈다. 시 주석이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가 광둥성 서기로 있던 지난해 5월 성 당 대회 때의 일화 역시 거론해야 한다. 아예 대놓고 시 주석을 적극 띄우면서 “광동성이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은 시 주석 일존(一尊. 지극히 높은 사람을 지칭)의 권위와 산과 바다처럼 높고 넓은 보살핌과 사랑 덕분이다”라면서 아부성 발언을 한 것이다. 해외에 망명한 중국인들이 그를 간신의 전형으로 비난하는 것은 이로 볼 때 지나치다고 하기 어려울 듯하다.

과묵하고 아랫사람들을 잘 챙기는 것 역시 그를 평가할 때는 늘 따라다니는 장점으로 손색이 없다. 여기에 특유의 침착함과 상당히 청렴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는 사실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당연히 그에게는 약점도 상당히 많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소심한 성격과 별로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추진력 등을 대표적으로 꼽아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시 주석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정의 칼은 잘 휘두를 것으로 보인다. 평소 성향으로 볼 때 그렇지 않다면 이상하다고 해야 한다. 시 주석의 주요 국정 목표 중 하나가 부패 척결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경우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2035년을 전후해 미국을 뛰어넘는 G1 국가가 되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현재의 경제 성장 속도를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전통과 역사를 자랑할 만큼 만연한 부패를 척결하지 못할 경우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사정의 총 책임자인 그가 중국 내외에서 주목받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