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월향'은 고귀함과 도도함으로 보는 이의 눈길 사로잡아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강정님 화가의 국화와 미인(50호 연대미상)
강정님 화가의 국화와 미인(50호 연대미상)

▲국화와 미인(50호, 연대미상)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미인도의 화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강정님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얼굴과 옷차림새 모두에서 비교 불가라고 단언한다.

강정님의 '미인도'는 가장 한국적인 고전미를 간직한 현모양처를 표상하고 있다. 우선 남북한을 통틀어서 어느 1세대 아니 어떤 후속세대 화가에서도 이렇게 곱고 자애로우면서 요염한 기색이 없이 내면에서 풍겨나오는 강인함이 배어 있는 이미지의 미인 형상을 창출한 화가를 보지 못했다.

강정님의 미인도에는 어머니와 미인의 이데아가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친근함과 자상함, 그리고 푸근함이 스며 있고, 불멸의 기품과 온화한 미소지음, 그리고 담백하면서 고혹적인 매력이 서려 있다. 이 두 가지가 한 인격체 안에 양립하여 혼연일체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어미니 미인상의 완전체를 향한 화가의 불굴의 집념 덕분이다.

원만하고 둥그스름한 얼굴형의 갸름한 턱선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러움이 형상되어 있고, 내면의 은근과 끈기의 강인함이 옹골지게 깃들어 있어 묘한 대비를 이룬다.

완결성 높은 미인도를 향한 강정님의 노력은 계속 이어진다. 평양미술관에는 김기창의 '사계 미인도' 4점이 걸려 있는데, 강정님은 이 그림들을 모사하여 중국 심양에서 열린 북한미술전에 출품한 바 있다.

그녀는 남한의 김은호를 비롯하여 최고 화가들의 미인도를 꾸준히 탐구하고 실제 어머니 미인들을 지칠 줄 모르고 찾아다니며, 그녀들의 이미지를 혼성하고 합체하는데 화가로서의 전생애를 바쳤다. 물론 최고의 스승 정종여와 리석호로부터 조선화를 사사한 것은 이러한 최상의 완성도를 이루는데 불가결한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강정님의 미인도에는 보통 매화나 진달래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노란색 국화가 괴석과 함께 여인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고전적 아취(雅趣)가 잔잔하게 휘감아 흐르고 있다. 게다가 초록빛 옥비녀를 꼽고 있어 과연 어느 시대 여인을 형상화한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알토란 같은 여인의 표정에서 고고하게 발산하는 것은 고전미이지만, 한복의 칼라가 노란색과 푸른색의 원색에 가까운 짙은 색조를 배열한 데서는 현대적인 세련미가 물씬 풍겨온다. 파란색 비단치마의 바탕에는 은은한 흰색계조의 화초를 미려하게 수놓아 여인의 고귀한 자태가 각별히 강조되고 있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의 국화는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에 비유되고 있고 이때 ‘누님’은 방황과 욕망의 젊은 날을 보내고 인생을 관조하는 중년의 원숙한 여인이다.

이 그림에서 어머니상은 옷차림새의 원색 톤의 색상에서 보다 젊은 이미지를 발현하고 있기에 작가가 이 부분을 의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모르게 국화가 누님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어머니와 누님의 이미지가 중첩되는 환영이 아른거린다.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는 미적으로 가장 완전하고 이상적인 미인도의 화가는 지금까지의 역사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강정님을 넘어설 수 없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전형적인 미인도에다가 모성의 절대성과 고결함을 고스란히 담아 내어 우리 모두의 한결같은 마음의 안식처와 고향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미인의 컨셉에 완전한 미인으로서의 어머니의 영혼을 불어넣어 다른 어떤 미인도 보다도 늘 우리와 가깝고 친숙해 보이지만, 내적인 면에서 그 컨셉은 우리 저편에 넘어서서 이데아로 자리하고 있다.

강정님 화가의 계월향(71-41 연대미상)
강정님 화가의 계월향(71-41 연대미상)

▲계월향(71-41 연대미상)

강정님은 가장 고귀한 어머니 미인상을 그리는 화가이다. 그런데 동일한 화가가 분홍 매화 꽃잎의 색감이 양볼에 흥건히 물들은 미인도를 예사롭지 않게 그렸다. 어디선가 본듯한 그 이름은 의로운 기녀 계월향이다. 땅에 닿을 듯 길게 늘어져 미인을 구렁이처럼 에워싸는 듯한 매화가지의 맵시 만큼이나 하반신이 과장되게 늘씬하고 치마가 지면을 휘감고 있는 고귀함과 도도함은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그림에서는 계월향을 매화 꽃잎과 같은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절세의 미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이 그림속 여인은 평양의 사당에 내걸린 계월향의 전통 미인도와는 비할 바 없이 빼어난 고혹적인 미인의 자태를 돋보이고 있다. 정신을 잃게 할 정도의 향기가 진동하고 있는 매화와 여인의 도취적 자태의 합류는 치명적인 유혹으로 얽힌 옛 이야기를 이 그림 속에서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부채로 살짝 가린 얼굴 자태와 치맛자락을 사뿐히 걷어올린 동적인 기품은 우아함의 백미이다. 매화나무 가지와 계월향 치마의 진한 고동 색감과 매화 꽃잎과 얼굴의 선연한 분홍빛의 혼연일체는 매화를 계월향의 분신으로 의인화시키고 있다. 한 가지 더 눈여겨보아야 할 감상 포인트는 계월향의 전체적인 비례이다. 팔등신(키가 얼굴 길이의 여덟 배가 되는 몸)을 능가하는 구등신 정도의 서구적인 비율은 특별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한 과장된 흔적이 엿보인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3대 대첩의 공신은 한산도 대첩의 이순신, 행주성 대첩의 권율, 진주성 대첩의 김시민 장군이고 3대 백성을 꼽으라고 하면 의병장 곽재우, 승병장 사명대사와 함께 기생 계월향을 빼놓을 수 없다.

육지에서 패전을 거듭하던 조명 연합군은 계월향의 계책과 희생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임진왜란의 승기를 잡는 대반전을 이루어낸다. 수만의 군사가 목숨을 버리고 피를 흘려 쟁취해야 할 일을 한 여인이 감당해냈다. 우리나라 전사에서 가장 적은 희생으로 유례없는 승전의 쾌거를 이루어낸 것이다.

계월향은 연인을 일편단심 뜨겁게 사랑한 사랑의 화신이자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전사한 애국지사이다. 그녀에게는 이렇듯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열녀의 덕목과 백성으로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의 미덕을 지니고 있어 북한에서 더더욱 추앙을 받는다.

그녀는 평양성을 빼앗은 일본장군 고니쉬의 심복 장수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탈출 과정에서 연인 김응서 장군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거둠으로써 열렬한 사랑을 불태우고 자신의 사명을 다한다. 그녀는 일제시대로 치면 요인 암살 후 비밀 유지를 위해 자결을 택하는 비밀결사 대원이나 다름없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의 일본군부를 보좌하며 통역과 길잡이를 담당했던 일본 승려가 계월향 때문에 평양성에서 패퇴하며 다음과 같이 남긴 경구가 있다. ‘기생마저도 목숨바쳐 애국열사가 되는 조선땅을 다시는 범하지 말라.’ 이 말은 당태종이 고구려에서 구사일생 탈출해 도망간 후에 자손들에게 남긴 유훈과 비슷하다. ‘내 이후로는 다시는 어떤 당나라 황제도 고구려 땅을 침범하지 말라.’

강정님 화가 
강정님 화가 

◇강정님(1926-작고?)은 누구인가?

북한의 1-2세대 여성 화가 중에 5대 조선화 화가를 꼽으라고 하면 림자연(1912년생), 강정님(1926생), 변옥림(자)(1931년생), 김승희(1939년생), 김자유(1946년생)를 들 수 있다. 이중 림자연은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언급하기를 그녀의 실력이 정종여, 리석호와 동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할 정도였고, 어머니 미인도의 강정님, 홍종원 화가의 아내이자 미인도의 변옥림, 재일교포 출신이자 봉산탈춤의 화가 김승희와 역사화를 즐겨 그린 김자유가 5대 여류 조선화가들이다.

강정님은 전통의 어머니상의 아름다움을 화폭으로 재현 혹은 구현하기 위해 오랜 기간 수많은 여인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멀리서 그 이미지를 발견하면 결례를 무릅쓰고 가까이 다가가서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마음 속에서 그 이미지와 형상을 잊지 않기 위하여 고심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이화여대 문과를 졸업하고 6.25 직후 생계를 위하여 인형 만드는 법을 혼자 터득한 이후, 인형 공예가의 길로 들어서 먼저 그 방면의 일가를 이룬다. 그후 정종여, 리석호에게서 그림을 배워 미인도 전문의 조선화 화가로 정진하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강정님(리석호 제자)의 여인도는 김은호(리석호 스승)의 미인도를 연상시키면서도 그보다 더 차원 높은 정신세계를 지닌 여인을 화폭에 구현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김은호는 강정님을 직접 가르친 적이 없는 스승의 스승뻘 되는 근대 화가이다. 그는 20대 때부터 궁정화원이 되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들인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그렸던 당시의 천재 화가로 꼽혔다. 김은호의 섬세하면서도 고아한 미인의 기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김은호 미인도의 색채감은 은은하면서도 선명하고 화사하다. 그러나 오늘날 김은호의 미인도와 견주어 강정님의 미인도에 대해 블라인드 평가를 내린다면, 여인의 풍부한 표정에 어리어 있는 은근하고 담백하게 미소짓는 의미심장한 품격은 김은호의 미인도 보다는 높은 차원의 숭고한 인격이 배어 있는 듯하다.

강정님은 말한다. “나는 나의 미인도 주인공인 '어머니'를 사랑한다. 그런데 그 모습이 나타나기까지는 몹시 애를 먹었다. 부드럽고 단정한 그의 형상이 눈에만 삼삼하고 손에 익지 않아 얼마나 애탔던가? 세상에 어머니가 하두 많지만 내가 찾는 그런 어머니는 쉽지 않았다.

이 어머니의 부드러운 눈매에서 저 어머니의 상큼한 코날에서 또 다른 어머니의 포근한 몸짓에서 한 두사람의 모델로서는 만족하지 않았다. 다정한 미소에 이끌리여 붓을 들면 어느덧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라지는 서운한 꿈자리만 남긴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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