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중국 이끌 인재 교육, 양성 조직의 수장, 시 주석과의 돈독한 관계도 돋보여...

【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관료와 당원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출세의 보증수표라고 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본인의 부단한 노력도 없으면 출세의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고관이 되기 위한 필수적 교육 코스 역시 거쳐야 한다. 국가행정학원이라고 해야 할 중앙당교에서 수학하는 것이 아마 가장 대표적인 필수 코스가 아닌가 싶다. 이 학교를 수료해야 최소한 부부장(차관), 최고 총서기 겸 국가주석, 총리 등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단언해도 좋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볼 때 이 중앙당교의 수장인 교장은 한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을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미래의 국가급 지도자들을 교육, 양성하는 기관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얘기는 바로 달라진다.

대단한 직위라고 할 수 있다. 교장 자리에 보통 24명이 정원인 당 정치국 위원 레벨의 고위급이 앉는 현실을 상기할 경우 정말 그렇지 않나 보인다. 현재 중앙당교의 교장이 천시(陳希·70) 전 정치국 위원이 맡고 있는 것은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나이 70세에 한직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가 여전히 중국 내외의 주목을 모으는 것은 결코 괜한 게 아니다.

1953년 푸젠(福建)성 푸톈(莆田)시에서 출생한 그는 이른바 즈칭(知靑. 문화대혁명 당시 농촌이나 공장 등으로 보내져 일했던 지식청년)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열일곱 살이던 70년부터 고향 근처인 푸저우(福州)대학 기계공장에서 5년 동안 노동자로 일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러나 하방을 당한 탓에 문화대혁명이 끝날 무렵인 75년 인생 최대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지청들에게 주는 특혜라고 해도 좋을 대학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중국 최고 명문인 칭화(淸華)대학 진학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전공이 화학공정이었던 그는 이곳에서 나중 막역한 친구가 되는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겸 국가주석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복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고 해도 좋았다.

70세의 나이에도 미래 중국을 이끌 인재들을 교육, 양성하는 기관의 수장으로 살아남은 천시 중앙당교 교장. 친구의 덕도 많이 본 것으로 보인다.[사진제공=중국 중앙당교홈페이지]
70세의 나이에도 미래 중국을 이끌 인재들을 교육, 양성하는 기관의 수장으로 살아남은 천시 중앙당교 교장. 친구의 덕도 많이 본 것으로 보인다.[사진제공=중국 중앙당교홈페이지]

그는 칭화대 출신답게 인생 첫 출발도 괜찮았다. 79년 졸업과 동시에 자신이 노동자로 일했던 푸저우대학 화공과 강사로 임용됐던 것이다. 이어 곧 자신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모교의 부름을 받고 석사 과정에 입학, 가볍게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82년 대학원 졸업 후에는 더욱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일거에 모교의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부서기로 임명됐다면 이렇게 단언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서기 자리가 눈앞에 어른거리지 않았다면 이상하다고 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90년에 모교 공청단 서기 겸 강사가 됐다. 이 기간 베이징어언학원에서 영어 단기 과정도 이수했다. 92년까지 2년 동안 미국 스탠포드대학 방문학자의 스펙을 쌓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그에게 칭화대학은 아주 좁은 물이라고 해도 좋았다. 실제로 그는 당 부서기와 노동조합 주석을 거친 다음 2000년 상무 부서기 자리에 올랐다. 49세이던 2002년에는 마침내 부부장급인 칭화대학 당 서기 자리를 움켜쥘 수 도 있었다. 2008년에 교육부 부부장으로 영전한 후 2년 만에 랴오닝(遼寧)성 부서기로 옮긴 것은 하나 이상할 것이 없었다.

2012년은 그에게 칭화대학 입학 기회가 주어졌던 75년만큼이나 대단한 행운의 해라고 할 수 있었다. 동기동창인 시 주석이 이해 가을에 열린 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매 5년마다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총서기로 올라섰으니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주변의 예상대로 그는 이듬해 친구 시 주석의 덕을 톡톡히 봤다. 최고 지도자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고 당 중앙조직부 상무 부부장에 임명됐으니까 말이다. 중국을 잘 모르는 혹자들은 그게 무슨 대단한 자리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앙조직부가 공산당을 포함한 정부 전체의 조직과 간부 관리를 전담하는 당의 핵심부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직위도 부장급에 해당한다.

이후 그는 거칠 것이 없었다. 2017년에는 정치국 위원 겸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조직부 부장, 중앙당교 교장 자리까지 차지하게 됐다. 시쳇말로 트리풀 크라운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중국 당국이 당정의 고위급 지도자들에게 적용하는 칠상팔하(67세 이하는 현직, 68세 이상은 은퇴함) 인사 원칙에 따르면 은퇴해야 했다. 하지만 리커창(李克强. 68) 전 총리, 왕양(汪洋. 68) 전 정협(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등과는 달리 살아남았다. 최소한 향후 4년 6개월 정도는 더 현직에 있을 가능성도 높다.

이처럼 그가 미래 중국을 이끌 인재들을 교육, 양성하는 대단한 조직의 수장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된 데에는 이유가 많다. 역시 시 주석과의 돈독한 관계를 먼저 꼽아야 한다.

칭화대학을 졸업한 베이징의 50대 사업가 한원(韓文) 씨가 “시 주석은 일반인들보다 동창 관계를 더욱 중시하는 것 같다. 동창 모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는 걸로 알고 있다. 나도 몇 번 동창회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지도자가 절친한 동창을 외면하겠는가?”라면서 그가 70세에도 현직에 계속 머무를 수 있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 이로 보면 정곡을 찌른 것이 아닌가 보인다.

교육 현장에서 그가 보여준 능력 및 오랜 경륜, 경험 역시 거론해야 할 것 같다. 여기에 교육자다운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품, 적을 만들지 않는 유연함 역시 그가 살아남은 이유로 부족함이 없다.

당연히 그에게도 약점은 있다. 학자들이 흔히 가질 수밖에 없는 예스맨 기질이나 맺고 끊는 것이 부족한 성격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주변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약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더 많은 때문이 아닌가 보인다. 그가 조만간 미국과 대적할 미래의 G1 중국을 이끌 당정 엘리트들을 모두 제자로 두는 복 부자로 있으면서 무난한 말년을 보낼 것이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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