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들의 범접, 원천 차단하는 단호한 결의 드러내...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리률선 화가의 '여명의 호랑이'(200호 2004년)
리률선 화가의 '여명의 호랑이'(200호 2004년)

▲여명의 호랑이(200호 2004년)

이 그림은 단일 호랑이 그림으로는 가히 끝판왕의 최고작이라 불릴만하다. 북한 그림의 강렬한 매력에 빠져들고 자석처럼 끌어당기게 해준 그림이다. 호랑이는 예로부터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와 재앙을 막아주는 신령스러운 존재로 자리매김되어 그림의 존재만으로도 액막이 역할을 해준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남한의 최고 호랑이 화가인 노당 서정묵의 호랑이 그림을 보면 측면상은 그런대로 비견될만 하지만, 정면상은 왠지 어설프고 부족한 면이 느껴진다. 조선 말기시대 최고 호랑이 화가였던 우석 황종하(1887-1954)의 호랑이 작품에서도 호랑이의 사실적 묘사와 주변 환경과의 조화 등은 일품이지만, 맹호의 압도적 제왕의 기상을 표현함에 있어 미흡한 느낌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리률선의 여명의 호랑이는 동일 제목으로도 여러 그림이 그려졌고 리률선의 다른 많은 우수한 그림이 있지만, 이 작품만큼 완벽한 그림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호랑이의 용맹스런 기상과 산 전체를 들썩거리게 하는 웅장한 포효의 함성은 맹수의 사나움과 공포를 느끼게 하기 보다는 신성스러움을 갖춘 산의 수호자로서 침입자들의 범접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단호한 결의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먼동이 밝아오면서 새벽녘에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노란 혀를 내밀며 호랑이와 사랑에 빠진 태양이 호랑이와 바위산 사이에 걸쳐 있어 호랑이의 노랑색 호피 색깔과 잘 어울리고 있고 그림 전체의 분위를 상큼하게 순화시켜 주고 있다. 리률선 호랑이의 눈동자는 무지개 빛깔이 영롱하게 맺혀 있다. 호랑이 눈빛에는 위엄이 서려 있지만, 포악한 인상이 아닌 친근하고 신기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다.

리률선의 황금빛 노란 호피 색깔은 너무나 곱고 자연스러워 실제 호랑이 털색을 그대로 갖다 붙인 느낌이다. 호피의 주름과 근육질의 굴곡진 표현은 살아 있는 호랑이의 움직임을 포착한 듯 생동한 느낌을 안겨준다. 리률선 호랑이 그림의 대부분은 호랑이와 주변 배경의 경계를 하얀색 여백선이 가르고 있다.

콧등에 슬며시 찍혀 있는 검은 점과 함께 리률선 호랑이의 주요 특징으로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리률선의 서명 필기체도 따라 하기 쉽지 않다. 정서체와 흘림체가 혼용된 힘이 살아있으면서도 경쾌한 명필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리률선 그림에 대한 진품과 모사품의 진위 여부는 어렵지 않게 가려낼 수 있다.

북한의 일부 화가는 화가인 자식이 자신의 잘 팔리는 그림을 모사하는 것을 눈감아 주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인기가 있는 부친의 그림을 오랜기간 새겨보고 습작해본 솜씨로 거의 비슷하게 그려 공급하고 있는 경우이다. 생활고 해결을 위해서다. 리률선의 경우도 그의 화가 딸과 사위가 아버지와 장인의 호랑이 그림을 모작하여 중국 화랑가에 다수가 돌아다니며 유통되고 있다. 그 딸과 사위는 호랑이 작품은 잘 그리긴 했지만, 호랑이의 기품과 풍격 및 색깔과 서명 등을 살펴보면 여러 단계로 모작 여부을 식별할 수 있다.

리률선은 다리 장애를 겪은 분인 데다가 2008년 이후에는 그림을 그리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수년 전 작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2015년까지 모사 작품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때까지는 생존해 계신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이후 리률선 그림은 본인이 그렸다해도 뭔지 부족해 보이고 진품을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모작에 대한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호랑이 화가 그림을 아무리 많이 보았고 수없이 모사해보았더라도 내면의 깊이와 내공의 경지에는 다가갈 수가 없다. 이는 중국 최고의 호랑이 화가와 리률선 화가의 비교에서도 리률선의 탁월한 비교우위를 직감(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흉내에 그칠 뿐인 습작의 아류를 양산해 내는 것을 그만두기 바란다. 그 자제분과 가족분들은 하루 빨리 자기 이름으로 독자화풍의 경지를 개척하는게 아버지의 명성을 더 이상 먹칠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지도 신새벽처럼 재탄생하는 도리가 될 것이다.

리률선 화가의 '벡두산 호랑이 한쌍' (187-100 2003년)
리률선 화가의 '벡두산 호랑이 한쌍' (187-100 2003년)
리률선 화가의 '백두산 호랑이 한쌍' 을 모작한 작품(2014년)
리률선 화가의 '백두산 호랑이 한쌍' 을 모작한 작품(2014년)

▲백두산 호랑이 한쌍 (187-100 2003년) 

북한 호랑이 그림의 대표주자인 리률선의 호랑이 그림은 2000년을 기점으로 대략 그 이후 8년간의 전성기 시절 호랑이 그림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그 시기 리률선 호랑이들은 호랑이의 황금갈색 털빛과 산신령 같은 위엄과 기상, 의인화된 표정이 가장 인상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1990년대도 꾸준히 호랑이를 그렸지만, 그 호랑이들은 어두운 갈색털을 하고, 형상의 섬세함과 예리함이 결여된 다소 부족한 듯한 봉건시대의 복고적 느낌의 호랑이들이 대부분이다.

호랑이에 관한 한 리률선의 전성기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008년을 기점으로 리률선의 건강 악화 이후 2000년대 들어 등장한 리률선의 야생 호랑이의 참모습이 나오지 않고 색깔과 표정, 싸인 등이 서툰 형태로 변질된 리률선의 동물원 호랑이들이 살금살금 사생아처럼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화가인 딸과 사위에 의한 모사 그림이 2008년에는 리률선이 다소 가필(마무리 손질)한 형태로 비교적 본작과 유사한 형태로 나온다. 그러다가​ 2009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가족들에 의한 다수의 모사 작품들이 확연히 질이 저하된 형태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2008년까지 리률선이 제한적으로 활동을 하던 시기의 작품들과 그 이후 시기 작품들의 차별화가 눈에 띄게 전개된다. 여기서 그들 외에 제3자가 형편 없는 솜씨로 모사한 정체 불명의 리률선 호랑이 모작들은 논외로 한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시장과 한국에서 인정받는 리률선의 호랑이 작품들은 꽤나 수요가 많았고, 특히 중국에서 높은 평가와 함께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딸과 사위가 자신들의 이름으로 출품하게 되면 아무리 리률선의 호랑이와 비슷해도 시장에서 팔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다 2010년대 중후반부터는 그의 딸과 사위에 의한 모작들이 꽤 잘 그렸다 싶을 정도로 질적 수준이 상승하게 되었다. 모작의 숙련도가 쌓여 노련미가 상당한 경지에 이른 느낌이 들 정도다. 이 즈음에는 그림 수준 뿐만 아니라 싸인의 필체와 필력도 거의 식별이 힘들 정도로 근접해 있다.

북한 작가의 작품들은 중국에서 위작이 생산되지 못하고 북한 현지에서 모사되어 나오기 마련이다. 중국 작가들의 품이 꽤나 들어가야 하는데 작품을 완성하는데 들이는 노임 단가도 맞지 않고, 조선화 작품가에 비례하여 상응한 조선화 실력을 갖춘 중국 작가들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 작가들이 덧칠이 가능한 유화는 감쪽같이 모사하는 실력파들이 즐비한데 비해, 조선화 모사는 어설프면 눈에 확연히 띄기 때문에 엄두를 내기 어려워한다는 측면도 있다.

<위의 첫 번째 그림을 토태로 한 리률선 호랑이 진품의 특징들을 열거해본다. 온화한 시선과 화가 특유의 무지개색의 영롱한 눈빛, 기품 있고 풍부한 표정, 고상하고 자신감 있는 화미한 색채감, 큰 두상의 비례감으로 웅장한 체구 형상, 의인화된 듯한 의연한 기상과 위풍당당한 풍모를 보이는 호랑이 형체, 호랑이 테두리 주변에 하얀 여백선이 보인다. 그리고 털색깔이 고상한 황금갈색빛으로 자연스럽게 착색되어 있고, 목 주변의 털들이 수북하여 호랑이의 개성을 원숙히 살려내고 있다.>

<위의 두 번째 그림에 기반한 리률선 호랑이 가품의 특징들을 나열해본다. 째진 눈매로 사나운 인상과 노란 눈빛의 평범한 색채감, 무뚝뚝하고 단조로운 표정, 작은 머리의 형상으로 왜소하고 불균형한 체형감, 동물원에서 본 호랑이의 형상을 잘 그려내기에 급급한 듯한 자태에 머물러 있어 위엄을 풍기거나 영용한 인상이 약함. 그리고 털빛이 적갈색으로 표현되어 화가의 호랑이 본래 털색과 숨길 수 없는 차이가 엄존하고, 위의 두드러진 진품의 특징들이 전반적으로 부재한다.>

◇리률선(1933-작고?)은 누구인가?

리률선 화가 
리률선 화가 

1933년생인 리률선은 2세대 화가로서 경탄스럽게도 1세대 화가들인 김용준, 리석호, 정종여 등과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는 평양미술대학 교수로서 맹렬한 교육활동을 펼쳤다. 그 뿐만 아니라 1960년대~1980년대에 국가미술전람회 수상경력에서도 그들을 능가할 만큼 많은 수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도 이런 점을 높이 사서 다음과 같이 그에 대해 극찬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조선화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의 대부분을 키워낸 교육자일 뿐만 아니라 미술사에 오르는 미술작품들을 성과적으로 창작한 이름있는 미술가의 한사람이다.’

리률선은 평양미대를 졸업하면서 바로 교원으로 투입되어 스승인 김용준, 정종여, 리석호 등과 합작하여 대작에 몰두하였고 정창모를 비롯한 수많은 근현대 조선화 대가들을 배출해낸 교육사업과 국가 재건 시기에 국가미술전람회 2등상(1961년)을 차지한 <간석지 개간> 작품 등 수많은 주제화 창작사업에 전력하였다.

리률선의 1990년대까지의 호랑이 작품들은 아직 충분한 호랑의의 위용을 갖추지 못하고 어딘지 모르게 설어 보인다. 무르익지 아니하고 절정의 궤도에 못이른 리률선의 호랑이는 비로소 2000년부터 완성도를 갖추어 2007년도까지 자신만의 전성기 호랑이 형상을 창출한다.

이 시기 전의 리률선 호랑이는 전성기의 황금 갈색 호랑이와 색감부터 다르고 진짜 호랑이 보다 더 잘생기고 영용하며 사람과 같은 그윽하고 풍부한 표정의 모습을 표현하기에는 아직 역부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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