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무엇인지 알고 붓을 움직이는 화가"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김만형 화가의 '관람표를 쥔 총각'(48.5-33 1964년)
김만형 화가의 '관람표를 쥔 총각'(48.5-33 1964년)

▲관람표를 쥔 총각(48.5-33 1964년)

그림의 제목과 내용이 희화적이어서 볼수록 재미있다. 두 명의 여성이 총각을 주시하는 가운데 청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쥔 티켓은 2장 뿐인데 자기와 여인 2명을 합하면 3장의 티켓이 필요해서 선택의 기로에 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두 여인에게 티켓 2장을 모두 주어 호탕하게 선심을 쓰고 자기는 다른 볼 일을 보러 떠나면 오빠로서 남자답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고 두 여인에게 점수를 딸 수 있다.

한편 두 여인 중 한 명에게 티켓을 주고 자신과 짝을 지어 관람을 한다면 그 여인과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지만, 다른 여인에게는 원성을 받아서 다음에 볼 낯이 없어지고 만다. 두 여인한테 다 호감을 느끼고 있는 청년으로서는 한 명의 파트너를 콕 찍어야(?)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렇지만 두 여인은 서로간에 찰싹 달라붙어 친밀감을 드러내면서 오빠에게 선심성 양보를 은근히 요구하는 미소를 지으며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노란 밀짚모자를 쓰고 노란색 원피스 복장을 한 귀부인은 관람회장으로 먼저 입장하고 있고, 그 옆의 진분홍빛 단색 차림의 여인과 연분홍 상의와 푸른색 치마를 입은 젊은 두 여인들은 수줍은 듯 총각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여인들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살리기 위한 색배열과 조합이 참 감미롭다는 느낌이 든다.

왼 손에 백두산이라는 책을 움켜 쥔 총각은 화면 중심에 서서 상체의 앞면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등 뒤의 색면이 수직으로 분할 처리되고 있어 입체감이 강조되고 출입구가 외부로 개방되어 있다는 암시를 풍긴다. 청년은 챙이 있는 빵모자(베레모)를 쓰고 있는 있는데, 김만형의 북한 주요 작품들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 모자에 집착한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 등재된 1958년 대표작 ‘어로공들’과 조선미술박물관 도록에 실린 ‘주물공’에서도 한결같이 남자들은 이 모자를 쓰고 등장한다.

김만형은 남한에서 자칭 ‘마띠에르의 화가’로서 자신의 또렷한 예술관을 지향하고 평론가 못지 않은 글솜씨도 자랑한다. 또한 근원 김용준으로부터는 “그림이 무엇인지 알고 붓을 움직이는 화가”라는 찬사를 받았고, 월북한 이후 풍경화에서는 색채 구사의 솜씨와 자연에 대한 서사적이고 장중한 스케일의 표현력을 인정받아 ‘녹색의 달인’이라는 평판을 얻으며 조선미술박물관 대표 도록에 그의 인물화와 정물화가 2점이 실리는 등 유화가로서 최고 수준의 명성을 누려왔다.

김만형 화가의 '자화상'(35.5-28.5 1873년)
김만형 화가의 '자화상'(35.5-28.5 1873년)

▲ 자화상(35.5-28.5 1973년)

저돌적이고 뚝심어린 그의 기상이 확연히 표출된 그의 중년기 모습이다. 58세로 접어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좀더 이른 시기 자신의 중년시절 모습을 회상하고,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고 자신을 성찰하면서 초심의 의지를 다지기 위한 자화상으로 보인다. 팔 소매를 걷어붙이고 책상에 한쪽 손을 올려놓고 곧 무언가 자신의 주의주장을 쏟아놓을 듯한 모습이다.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과 활달한 외향성을 노출하는 모습이다.

옹골차고 다부진 김만형은 남한에서 북한으로 간 월북화가이지만, 북한에서 텃세를 부리는 그 누구와 맞장을 떠도 전혀 꿀리거나 굴하지 않을 기개를 지닌 인사이다. 그런 부딪힘의 이면 도로에서 고무공 같은 유연한 탄력성을 발휘하여 금방 먼저 손을 내밀어 앙금을 풀어버리고 화해하며 자신의 앞길을 향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뚜벅뚜벅 매진해 나아갈 위인이다.

짙은 초록칠을 한 배경색을 머리 부분에 올려놓고 어깨 아래의 배경색은 고동색 나무 책상과 합체를 이룬 듯 견고하고 엔틱크한 동질색을 배치하여 숲속의 자연 경관 속에 파묻힌 느낌과 함께 고색창연한 도시경관이 접목된 듯한 묘한 느낌을 선사하고 있다. 한편 전면의 책상을 비스듬히 위치시켜 마치 사람이 움직이는 듯한 동적인 형세를 취하는 구도를 만들어나가며 초록빛 그림자를 드리워 상하단의 유기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김만형과 관련된 6.25 당시 일화를 소개한다. 1950년 부산지역으로 피난을 떠난 서울 지역 화가들이 그들을 맞이한 서성찬, 임호, 우신출 등의 부산 지역 화가들과 심히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 이유는 서울지역 화가들에 대한 미군정과 당국의 배려가 극진했던데 대한 차별에서 오는 열등감과 김환기 등 서울 화가들의 거만에 대한 반발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때문이다.

전쟁의 와중에 서울지역의 추상주의를 표방하는 화가들에게는 전시회 개최를 위한 공공장소도 마련해 주고, 화구들을 아낌 없이 제공해 주었는데 비해, 그들을 대접한 구상주의 부산지역 화가들은 이러한 호사를 누리지 못한 박탈감 때문이었다. 그때 서성찬과 김환기는 술잔을 집어던지며 혈기 어린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당시에도 서울지역에서 활동한 김만형은 부산지역 화가들이 초대작가로 선정하여 부산지역 화가들과 함께 전시회에 참여한 유일한 화가였다. 김만형은 부지런한 활동가였고 넉살이 좋았으며, 좌우익계를 막론하고 널리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국 미술학교 시절부터 구상적 토대 위에서도 터치가 속도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굵고 두터우며, 구도가 도발적이며 강렬한 색채 표현력을 즐겨 구사했는데 이러한 성향은 월북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김만형 화가 
김만형 화가 

 

◇김만형(1916-1984)은 누구인가?

김만형은 개성(開城) 출생으로서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하였고, 조선미술전람회와 도쿄의 주요 전람회에서 입선을 거듭하여 양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광복 직후 좌익계열 미술동맹의 핵심간부로 활동하다가, 정부 수립 시기에 미술동맹이 와해되자 우익으로 전향하여 <길진섭(吉鎭燮)에게 경고함>이라는 규탄문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제1회 국전 추천작가로 참가, 《연봉(連峯)》을 출품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 공산군 점령하 서울에 등장한 조선미술가동맹에 다시 가담하였다가 월북하였다. 그는 북한에서 조선미술가동맹 평안북도 지부장과 1958년 조선미술가동맹 유화분과 지도원을 역임한 실력자로 활약하였다.

국내 최고 원로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의 미수(88세)기념 문집에 언급된 김만형에 대한 평가는 대략 다음과 같다. 그가 실력과 평판도는 뛰어났으나 일제시대에는 일제에 충성하는 민족의식의 부재자로, 해방 전후와 6.25전쟁 시기에는 좌우익을 넘나드는 기회주의적인 처신의 다소 부정적인 행태의 미술가로 묘사된 바 있다. 그 전부를 아래와 같이 전한다.

“개성 태생으로 일본의 데이코쿠미술학교에 유학한 양화가였던 김만형은 1937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비교적 신선한 표현작업의 인물, 풍경 작품으로 입선을 거듭하고 1944년의 그 마지막 전람회에서는 풍경화가 특선하는 등, ’선전파’에 속해 있었다. 1940년에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바 있고, 1942년에는 도쿄의 독립미술협회전람회에 입선하는 등, 작품 역량을 부각시켰다.

그런가 하면 1943년에는 조선미술전 추천작가였던 김인승 등과 몇몇 유화가가 중심이 되어 일제에 충성하려고 한 양화단체인 ‘단광회’에도 가담하여 그 첫 회원작품전에서 장려상을 타는 등의 민족의식의 부재를 엿보게 한다.

그러던 그가 광복 직후에는 좌경으로 변신하여 조선조형예술동맹과 조선미술동맹의 핵심 간부로 활약하게 된 것은 당시 정치정세의 격동에 유인된 처신이었을 것 같다. 그 좌경에서 열성을 나타내 조선미술동맹에서는 서기국장을 맡기도 했으나 1948년의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미술동맹이 와해되자 정종여, 정현웅, 배운성, 이쾌대, 최재덕 등과 같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좌익에서 전향했었고, 1949년 제1회 국전 때에는 추천작가로 참가했다.

그랬건만 그도 6.25전쟁 직후 서울이 북한 공산군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정현웅 등과 과거의 미술동맹 재조직에 다시 앞장서다가 전세 역전의 9·28서울수복이 닥쳤을 때 북으로 넘어갔다. 북한에서는 조선미술가동맹 평안북도지부장 등을 지냈고, 1984년에 사망한 사실이 북한 자료로 확인된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둬야 할 점은 미술계에서 가장 민족주의적인 의식과 활동에 투철하였던 길진섭 조차도 그의 활동 초기에는 미술계의 공신력 있는 등용문이었던 일제 주최의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을 하여 이름을 알린 바 있다.

위의 경력만으로 일제시대 민족의식적 각성이 부족하다고 하면 거의 대부분의 미술가들이 그 부류에 속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고충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북한의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는 김만형의 집념어린 미술가으로서의 인생 역정, 민족주의적인 각성과 사회주의적인 의식을 보이는 미술인으로서의 긍정적인 색다른 평가들이 주류를 이룬다.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