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미술 유학파 국내 1호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배운성 화가의 판화 '아동공원'(36-26 1967년)
배운성 화가의 판화 '아동공원'(36-26 1967년)

▲ 배운성 화가의 판화 '아동공원'(36-29 1967년)

이 작품은 어린이들이 우리말로 치면 놀이공원에서 선생님 및 여타 보호자의 보호 속에 친구들과 즐겁게 뛰노는 장면을 아기자기하며 정겹게 그려내었다.

마치 경쾌한 붓끝으로 그려낸 소묘처럼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고 깔끔하면서도 어린이들의 다양한 활동 모습과 풍부한 표정들을 섬세하고 예리하게 살려내었다.

저 멀리의 거대한 회전그네와 근경에서 북적이는 회전목마와 자전거 타는 아이들 모습들은 북한의 60년대 후반의 경제적 위상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배운성은 여타 월북화가들에 비해 사상성이 비교적 옅은 편이었는데, 그의 부인이 사회주의 운동에 앞장선 맹렬여성이어서 그의 월북행에 주요한 단초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 작품 뒷면에는 조선미술보급사 소인이 찍혀 있다. 이는 북한에서 외국에 작품을 출품하거나 전시회에 나갈 때 그들의 법규상 조선미술보급사의 허락을 받고 나가도록 되어 있기에 국가에서 인증한 작품임을 표시한 징표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명화에도 적용된다. 서구 회화사에서 회화 부문에서의 정교한 위작은 사실 본작과 진위 분별의 가늠이 쉽지 않은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하지만 특히 무채색 판화는 그 정교함과 밀도성에서 위작들이 어설프게 흉내내기 어려운 측면들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북한의 함창연과 같은 판화 대가의 위작들이 다량으로 버젓이 출시되어 중국 등지에서 종종 저렴한 몸값으로 애호가들에게 대리 만족감의 어필을 해오고 있다.

본작의 양질의 얇은 종이 상태나 매끈하면서 여린 질감 등 미세한 부분은 그들이 미처 살피지 못한 측면이기에 위작의 경우 투박하게 두꺼운 재질의 종이 질에서 조야한 디테일로 대충 형상만 유사하게 베끼는 정도에 그치고 만다.

판화는 마구 찍어낼 수 있다는 관념에서 일부 형상도 두루뭉수리 뭉게진 형태가 다반사이기에 자세하게 위작을 들여다보면 이내 실망스러운 점이 감지되어 본작으로부터 유리된 느낌을 피할 수 없게끔 감별이 되기 마련이다.

배운성 화가의 판화 '어옹' (22.5-13.6 1957년)
배운성 화가의 판화 '어옹' (22.5-13.6 1957년)

▲ 배운성 화가의 판화 '어옹'(22.5-13.6 1957년)

이처럼 그의 초기 작품 중 그가 일약 세계적인 미술가로 진출하는데 그의 목판화 <자화상>과 <초상> 소품들은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배운성의 할아버지 어부를 형상화한 초상 성격의 <어옹> 작품은 배운성의 중기 초상 작품으로서 58세로 접어들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겨진 그의 자화상 성격의 판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조선미술작품보급사 소인이 찍혀서 5장 정도가 인쇄되었고 일부가 유통되었다고 전하는 유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노인의 넓은 이마와 짙은 눈썹, 깊이 들어간 눈과 두터운 입술 등은 배운성의 심중하고 그윽한 인상과 너무도 흡사하다.

직업이 어부가 아니라 강태공 같은 위엄과 도인같은 풍모가 그득한 기품이다. 그의 유명작 <나들이>(1955년)에서도 등장하는 버드나무 가지가 한들거리며 그가 집으로 가는 길에 인사하는 듯한 낯익은 배경 구도도 유사하게 전개된다.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저 멀리서 노인의 발자취만을 아련하게 남긴 채 희미한 장면으로 여운미가 그득한 조선화 기법으로 처리되어 있고, 강물의 출렁거리는 물살도 간결하게 표현되어 함축적인 멋이 무엇인가를 정곡으로 짚어주는 듯하다.

네 마리의 큰 물고기를 잡고서 낚시대에 묶어 어깨에 걸쳐 메고 집으로 향하는 노인의 발걸음은 경쾌해 보이고, 노인의 은은한 표정에는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배어 있다.

다른 한손에 들고 있는 바구니에도 또다른 작은 물고기들이 들었는지 묵직하고 풍성해 보여 오늘 저녁 반찬을 마련할 할머니의 반가운 마중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배운성 화가의 판화 '건설장'(45-20 1961년)
배운성 화가의 판화 '건설장'(45-20 1961년)

▲ 배운성 화가의 판화 '건설장'(45-20 1961년)

이 작품의 제일 뒷 배경은 넒다란 직사각형의 4~5층 높이의 대규모 건물들이 병풍처럼 휘감겨 있다.

그러한 현대식 건물들을 연이어 짓기 위한 천리마 운동을 벌이는 듯 수많은 인부들의 삽질들이 분주하고 현장 근로감독자들도 같이 삽을 들고 협심하여 군용 트럭들에서 흙을 퍼나르며 혼연일체가 되어 북한의 60년대초 부국 강성기를 열어젖히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육중한 트럭 위에 메달려 있는 기중기의 모습도 보이고 좌우측에서 포진한 목조건축물들이 반듯한 콘크리트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는 세심한 구도적 배치도 돋보인다.

한편 오른쪽 뒷편 한켠에서 아담한 버스가 여행하듯 운행되어 군용 트럭의 큰 규모를 부각시키며 노동의 매몰적 구조로부터 여유와 낭만을 선사하고 긴장감을 누그려뜨려 주고 있다.

이 작품의 다큐멘터리 같은 화면의 생동감은 다이나믹한 영상미를 선사하고, 만화와 같이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구성미와 앙상블을 이루며 본작의 예술성을 드높이고 있다.

배운성의 훤칠하게 벗겨진 넓은 이마와 짙은 눈썹과 인자한 눈, 왕코 등을 볼 때면 마치 그 옛날의 사명대사와 같은 고승들을 보는 느낌이 든다. 그의 오묘한 인상은 도인과 학자 및 예술가가 크로스오버(퓨젼)된 면모 그 자체이다.

배운성 화가 
배운성 화가 

◇배운성(1900-1918)은 누구인가?

우리나라에서 유럽의 미술 유학파 1호 미술가는 배운성이다. 1920년대초에 독일로 유학간 배운성은 주머니 속의 송곳인지라 그의 재주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유럽에서 인상깊고 진한 발자취를 남기며 모국으로 금의환향하였다.

1929년 미국에서 유럽으로 미술 연구를 떠난 동갑내기 화가 임용련 보다 10년 정도 앞섰다. 유럽에서는 유화와 판화 작품들을 섭렵하였으나 귀향해서는 주로 선묘 감각이 돋보이는 판화 분야의 발전에 진력하였다.

후생가외인지라 그의 직계 제자인 함창연은 폴란드 대학 유학시절 판화작품으로 유럽무대에서 피카소와 공동 수상하는 세계적인 쾌거를 떨친다.

배운성은 다설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1908년에 인현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비를 대지 못해 중퇴하고, 경성중학교 급사로 있으면서 야학에서 공부하였다.

1915년부터 백가성을 가진 부유한 집에서 일하면서 서울사립중등학교를 다녔고 그 집안 아들이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될 때 그의 뒷바라지를 위해 따라 간 계기로 인해 그는 미술가로서 운명적인 길을 가게 된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그의 아들이 병 때문에 조기 귀국하였는데 비해 배운성은 여비가 없어 혼자 독일에 남게 되었는데, 그는 오갈 데 없는 신세에서 그가 꿈꾸던 미술공부를 지속하여 1923년에 레빈풍크미술학교에서, 1925년에는 국립미술종합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바야흐로 국제적인 미술가로 입문하는 대장정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대학기간 매해 열리는 학생미술전람회에 작품을 냈는데 1927년에는 출품한 작품이 입상되었다. 그는 이때 받은 상금을 가지고 프랑스를 여행하였는데, 파리에서 열린 전람회에 <자화상>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또한 1934년에 체코 프라하에서 4년에 한번씩 열리는 국제목판화전람회에 목판화 <초상화>를 출품하였는데 심사자들의 만장일치로 입상하였다. 그의 주요 목판화 <초상>(20-15cm) 작품은 1927년에도 창작되었다고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은 기록하고 있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의 배운성에 대한 주요 평가이다.

‘우리나라 현대 판화예술에서 배운성의 창작활동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우리 현대 판화예술 발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해방 후 판화창작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의 공로가 자못 크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 인민들 속에서 깊은 사랑과 평가를 받고 있으며 국외 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배운성은 월북 전에 홍익대 미대 초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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