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 배우 현빈과 손예진이 열연해 선풍적 인기를 끈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는 결혼 준비에 부산한 북한 고위층 집안의 풍경이 그려진다.

핵심 간부의 부인은 결혼식을 앞둔 딸에게 입힐 웨딩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의상실을 찾았지만 마땅한 게 없어 불만이다. 그러자 주인이 은밀한 눈빛과 함께 책상 아래서 뭔가를 꺼내 보여준다. ‘남조선’에서 긴급 공수된 최신 트렌드의 드레스 화보다.

3년 전 종영된 드라마지만 북한에선 여전히 사랑의 불시착 인기가 시들지 않고 있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한류 콘텐츠를 뜻하는 ‘아랫동네 드라마’ 가운데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외부 문물에 민감한 북한의 MZ세대(20~30대) 사이에서 한류 드라마와 영화⋅가요는 말투는 물론 생활양식까지 바꿀 정도로 번져나가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연일 회의석상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관영매체들은 “물먹은 담벼락처럼 체제가 허물어질 수 있다”며 외부사조에 대한 경계를 호소할 정도다.

최근 들어서는 젊은층 사이에 남한식으로 결혼식을 치르고 이벤트를 벌이는 게 인기를 끌자 북한 공안당국이 단속에 나섰다는 대북매체의 보도가 잇따른다. 본격적인 결혼 시즌에 코로나까지 풀릴 기미를 보이자 미뤘던 결혼식을 치르는 데 ‘남조선풍’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란 얘기다.

함경남도의 한 공장에서는 사상교양 시간인 해설담화를 통해 검소한 결혼식을 강조하면서 “잔치상을 요란하게 차리거나 신랑이 신부를 데려갈 때 승용차 여러 대를 동원해 위세를 뽐내는 등의 현상을 타파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고 한다.

여기에는 경제난으로 어려운 시기에 먹거리와 연유(휘발유)를 낭비하는 풍조를 막겠다는 뜻도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면사포를 쓰거나 외국상표가 새겨진 옷을 입는 건 서양풍으로 금지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한다.

해설담화에서는 “결혼사진을 우리식으로 고상하게 찍으라”는 지시도 내려졌는데 이는 웨딩촬영 등에서 공공연하게 남한식 이벤트가 행해지는 걸 겨냥한 것이라고 한다.

즉 “신랑이 신부를 허리 위로 안아 들어 올리고, 신랑⋅신부가 포도주가 든 술잔을 부딪치는 등 우리식이 아닌 행동을 하며 사진을 찍지 말라”는 내용 등은 남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결혼식 뒷풀이 장면 등을 북한 청년층이 따라하는 것이란 막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북한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란 걸 만들어 남한 드라마⋅영화 등을 보거나 유포하는 행위는 물론 말투나 패션⋅헤어스타일을 따라하는 걸 엄단하고 있다. 5년 이상 교화형(징역형)에 최고 무기에서 사형까지 이르는 가혹한 처벌이 이뤄진다.

이 때문에 남한 말투가 얼결에 튀어나와 처벌받을까 염려돼 북한식 말투를 연습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게 탈북인사들의 전언이다.

대북 소식통은 “사람들이 '오빠' '자기야' '사랑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은 한국 영화를 귀에 익고 입에 오를 정도로 봤다는 증거”라며 “하지만 당에서 평양말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하자 최근 주민들이 '기래서(그래서)'나 '알간(알겠니)' 등 평양말을 연습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동무나 여보 보다 오빠·자기나 남친·여친 같은 남한식 말투에 익숙해진 북한 젊은이들은 당국의 지나친 간섭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볼멘소리를 쏟아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