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어린이'와 '뜨개질 하는 여인'...사실적 표현 자연스럽게 묘사
평양시 군중대회 등장하는 김일성 첫 초상화 그려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정관철 화가의 '김정수 선생 초상화 (70.5-51 1968년)
정관철 화가의 '김정수 선생 초상화 (70.5-51 1968년)

▲김정수 선생 초상화 (70.5-51 1968년)

이 그림속 주인공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자신감과 도도함은 모델의 입지이기도 하지만 화가의 위상도 느끼게 해준다. 서슬이 시퍼런 68년 북한에서 이와 같이 거만, 불손하게까지 보이기도 하는 저런 포즈의 초상화(20호)를 남겼다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의 상징성을 당당하게 노출한 거나 다름없다.

이 초상화에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사실적인 표현이 자연스럽게 대단히 잘 묘사가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얼굴의 이목구비는 말할 것도 없으며 얼굴근육, 하악골 주름등의 묘사력이나 표정, 그리고 당시로서는 귀한 양복의 주름이나 실루엣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이 표현해나간 실로 참 잘 그려진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의 1세대 예술가 중 북녘 땅에서 승승장구와 탄탄대로를 변함없이 이어간 이가 있다면 단연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정관철과 모델로 등장한 조각가 김정수(1917년생)가 대표주자일 것이다.

이들은 사회주의 이념이 철처히 내면화, 신념적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므로 당 방침을 선도적으로 따르고 다른 예술가들을 이끌어 지도할 수 있었다. 물론 예술가가 당과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자신의 예술세계와 전혀 충돌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에겐 훌륭한 생존방식이면서도 그들이 추구한 예술작업의 과정에 대해서는 예술가를 우대하는 사회주의 방식의 무한한 축복의 손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림 속 모델인 김정수는 46년에 친구 조각가 조규봉, 리쾌대, 리석호와 함께 해방탑 건립을 위해 북행길에 올라가서 47년 평양미술대학 첫 교원으로 배치되었으며 한평생 교육에 헌신했던 존경받는 다정다감한 교육자로서 우수한 제자들을 배출하며 많은 명저를 남겼다.

인천 지역 출신인 조규봉은 그 지역 문화예술계에서의 신망과 위상이 지금도 여전히 대단하고 많은 지역민들로부터 자부심의 상징으로 회자되듯이 북한에서의 활약도 김정수와 쌍벽을 이루는 거장 조각가로서 추앙 받아왔다.

정관철 화가의 '유치원 어린이' (35.5-24.5 1981년)
정관철 화가의 '유치원 어린이' (35.5-24.5 1981년)

▲ 유치원 어린이(35.5-24.5 1981년)

81년의 유치원 어린이 송철남은 이제 어느덧 40대의 중년남이 되어 있을 텐데, 그의 성인이 된 생김새가 궁금하다. 아마도 정관철 자신을 매우 빼닮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왜냐하면 옆 모습의 전체적인 두상과 튀어나온 튀통수와 이마, 그리고 동그란 눈매가 왠지 그의 어릴적 모습을 그린 것같은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 그림은 북한의 미술평론가 홍의정 소장해 간직해왔던 어린 아이의 실명이 기재된 작품으로 정관철이 작고하기 2년 전에 그린 말년 초상화이다. 그가 그린 어린이의 초상화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대개 영웅이나 지도자, 주제화 속에 등장하는 근로자나 병사의 그림이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북한 미술계를 풍미한 최고지위의 종신 실력자가 어린아이의 인상 착의에 꽃힌 감흥으로 그린 것일까? 아니면 지인 친구에게 선물로 안겨준 그림일까? 그는 초상화 바탕색으로 연한 살색을 즐겨 썼다. 사람의 초상이 그 바탕색에 포근하게 잠기듯 밀착되면서도 인간의 형상이 아련하게 확장성을 갖는 조선화의 여백과 같은 여운의 묘미를 주고 있다.

이 어린이의 모습은 한복을 입은 전형적인 우리의 어린시절 모습이다. 목 부분에는 실밥까지도 그대로 노출하여 이 옷이 그야말로 부모님이 새로 사주신 꼬까옷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으며 한복의 옷감이 바람결에 떨리는 듯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어 옥외에서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정관철 화가의 '바느질하는 여인'(15호 1973년)
정관철 화가의 '뜨개질 하는 여인'(15호 1973년)

▲뜨개질하는 여인(15호 1973년)

북한 회화의 여인 모델들은 아름다운 미색을 지닌 인물이 주가 아닐 때가 많다. 더군다나 여인의 외형적 아름다움의 절정인 여성 누드화는 체조나 수영선수 혹은 선녀(仙女)의 데생이나 크로키 실습, 혹은 상처 입은 살결의 외관 일부분에서나마 반라의 형태로 존재할 뿐, 대외 전시용으로는 거의 보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대개 일상의 삶 속에서 자기 일과 생활에 충실하는 소박하고 수수한 여인들을 대상으로 할 때가 많다. 화려한 미인형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게 되면 인물의 됨됨이, 즉 내면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화가가 인물 외적인 모습에 집착하게 되면 감상자의 관심이 주로 여인의 겉모습에 치우치게 되기 마련이다.

이 그림에서 여인의 손동작은 코바늘에 몰입되어 있고 여인의 시선도 여기로 쏠리고 있다. 따라서 감상자의 이목도 화면 중앙 쪽의 같은 곳을 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의 주인공은 수예 혹은 뜨개질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맞은 편의 화판에는 노란 해바라기 꽃과 녹색의 잎새들이 그려진 채로 비스듬히 뉘어져 있다. 여인은 체격이 다부져 보이면서 심성이 진중하고 우직해 보여 시쳇말로 큰집의 맏며느리처럼 보인다.

짙은 고동색의 작업복은 화가의 섬세한 붓터치로 주름의 다양한 변색조와 명암을 많이 살려 옷감이 질겨 보이고 착용하기에 편안한 복장처럼 느껴진다. 한편 모델의 여성미를 살려 주기 위한 포인트 색조 장치로 작업복 내에 밝은 분홍색 속블라우스가 살며시 노출되어 있어 화사한 미감을 은은히 발산해 주고 있다.

인물을 향한 순방향의 광선이 여인에게 집중되면서 발그레한 볼살의 입체감이 도드라져 보이고 밝은 회백색의 벽에는 마치 후광처럼 그녀의 그림자가 환하게 빛나고 있다.

정관철 화가 
정관철 화가 

◇정관철(1916-1983)은 누구인가?

정관철은 1945년 10월 김일성의 개선을 환영하는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하는 김일성의 첫 초상화를 그린 인물이다. 그는 48년 김일성이 자랑하는 항일투쟁인 보천보전투를 다룬 <보천보의 횃불>을 그린데 이어 49년에는 연이어 <보천보풍경> 3부작을 그려 전람회 2등에 당선된다.

그 여세를 이어가 김일성의 절대적인 신임과 총애 속에 그는 49년 34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북한미술계의 최고 위치인 북조선미술가동맹 위원장으로 선출된 이후로 83년 숨을 거둘 때까지 종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야 만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종로고등보통학교 3학년때 입선한 경력으로 부모들이 그의 화가의 길을 지지해 주었고 36년 <룡악산 풍경>이 전람회에 입선하여 이 작품값으로 받은 돈을 가지고 일본으로 그림유학을 떠나 자신의 피를 팔아가며(매혈) 월사금을 마련하여 완강한 의지와 인내력으로 천신만고 끝에 5년간의 과정을 마친다.

그는 유학시절 전시회를 한번도 열지 못한 불우했던 설움을 훗날 자신의 출세로 톡톡히 보상받는다. 미술가로 그처럼 사회적으로 최고의 지위를 살아생전 오랫동안 누린 이도 전세계적으로 드물 것이다. 그는 사후 애국열사릉에 안장되는 영예를 누린다.

하지만 결단코 그가 허명으로 그런 지위를 유지한 것은 결코 아니였고 동갑내기 친구 러시아 레삔 미술대학 교수인 변월룡과의 교제에서 보면 자신의 실력향상을 위해서 스스로 들이는 노력이나 배움의 자세는 가히 인정할만 하였다고 전한다. 그가 죽기 직전 병상의 벽에 캔버스를 붙여놓고 숨을 거두는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린 일화도 유명하다.

하지만 변월룡이 북한미술계에 끼친 업적과 공이 일부 누락되거나 가려진 것은 그로 인해 기인한 면이 없지 않았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다. 그리고 더더욱 아쉬운 점은 가장 절친이었던 문학수(이중섭의 동향, 일본유학 선배화가이며 북한 후배 화가들이 가장 위대한 미술가였다고 칭송)가 나중에 미술계 중앙무대에서 밀려나는 시점에서 권력의 실세였던 그가 어찌 친구의 추락을 방치했느냐 하는 것이다.

정관철은 북한에서 미술부문의 첫 공훈예술가,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으며 미술 행정가로서와 화가로서 최고 권력과 권위를 종신토록 누려온 인물이다. 자신의 그 이름 ‘관철’에서도 당의 방침을 관철시키고야 말 것 같은 집념의 사나이다. 변원룡에게 55년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그의 노력가로서의 면모를 잘 엿볼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위대한 조상들의 초상화 을지문덕 장군, 이순신 장군 등 초상을 그리느라 낑낑대고 있습니다. 뭐 참 초상화가 어려운 것은 더 말할 것 없는데 전혀 보지 못한 위인들의 초상화를 그리자니 참 막연하기도 하고 어렵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는 이인데 그래도 모두 보고는 아니라고 하니 참 기막힙니다. 자기도 못 본 사람인데 그래도 그 사람이 아니라니까 뭐라고 할 말도 없지요. 그래서 또 각기 이랬으리라 저랬으리라고 비평들을 하는 것 듣고 나서 또 그리곤 또 그리곤 합니다.

벌써 을지문덕 장군만 네 번 고쳤는데 아직 완전히는 안되었으나 얼굴만은 그만하면 용맹한 을지문덕 장군의 모습이 좀 보이는 것 같다고들 말하니 참 다행입니다. 지금 우리 미술가들이 모두 달라붙어서 옛날 위인들의 초상을 학자들과 같이 힘을 합해서 제작하고 있지요. 아주 큰 사업입니다. 중요한 사업이지요. 아직 오래 걸려서야 좋은 초상화들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는 집념이 강했고 벗들과의 우정도 돈독했으며 호방한 성격도 지녔던 사나이다. 그가 러시아 한인 화가 변월룡에게 쓴 또다른 편지의 한 대목을 전한다. “변 선생이 한 말씀 중에 ‘좋은 작품을 쓰고야 생활도 빛나고, 좋은 동무도 많아지고, 적도 많아지고....’ 라고 한 구절이 참 우리를 감격에 잠기게 했습니다. 우리들은 오래 두고두고 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꼭 그렇습니다. 좋은 작품을 쓰고야 산 보람도 있지요.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1955년 새해에 들어와서 우리들에게 준 선물 중에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가슴 깊이 새겨두고 일하고 또 일하겠습니다.”

위와 같은 편지에서 그의 벗들에 대한 다정한 마음이 담겨 있는 인간적인 풍모가 물씬 풍기는 대목도 보인다. “문학수 동무는 그 새 일주일 가량 저의 집에서 자고 갔는데 부인을 사랑하노라고 야단입니다. 이번 나와서 그림 값을 좀 받아 가지고 부인의 스푸링 코트(봄 외투) 멋진 것을 하나 사 가지고 갔으니, 아마 부인이 문학수 동무가 이런 알뜰한 사람인 줄이야 처음 알겠지요. 문학수 동무와 부인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상익 동무도 이젠 멋진 신사가 됐습니다. 오바도 소련제 고급 새오바, 모자도 소련제 털모, 새 구두에 새 마후라, 모두가 새로 되었으니, 처음 동맹에 올 때 모두들 그가 누구인가? 하고 한참 보고야 한상익인 줄 알았답니다. 모두 위신 차리느라고 야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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