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장생'...소나무의 입체감과 홍매화와 붉은 해의 형상 및 보색 대비 효과 일품
'구룡폭포'... 추상화와 구상화, 수묵화와 채색화가 합체된 듯한 혼성 산수화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김상직 화가의 '청봉의 수리개'(50호 2009년)
김상직 화가의 '청봉의 수리개'(50호 2009년)

▲'청봉의 수리개'(50호 2009년)

김상직의 이 그림에서는 유난히 끓어오르는 힘과 넘치는 기운이 엄습한다. 선과 면과 각이 굵직하고 널찍하며 부러질 듯 거침이 없다. 마치 수륙양용의 장갑차가 수중과 육지를 거침없이 내달리며 저돌적인 돌파력을 과시하는 모습이다. 그가 작고하던 해, 그가 그토록 즐겨 그렸던 소나무와 수리개 그림에서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며 투혼이 번득이는 결정판을 보는 듯하다.

가까이 다가가면 찔릴 듯한 가시철망 같은 소나무 잎새들, 투박한 소나무 껍질과 육중한 팔뚝같은 소나무 가지들, 눈을 부라리며 날개깃을 곧추세운 수리개의 예리한 자세들의 몸짓에서 강인한 기상이 느껴지고, 그의 화가 인생의 마지막 화룡점정을 이 한편으로 웅변해주고 있는 느낌이다.

그의 직계 스승 리석호의 박물관 소장 <소나무>에서도 느낄 수 없는 진정한 리석호의 몰골필법의 완결판을 이 그림을 통해서 리석호의 진정한 후계자인 제자 김상직이 죽음 직전에 완성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김상직은 신사같은 매너와 선비같이 정숙하고 단아한 풍모를 지녔지만, 그의 수묵화에서만큼은 그의 내면에 꿈틀거리며 용솟음치는 에너지와 기백을 뿜어낸다.

유명 작가들의 그림 창작의 경우, 밀려드는 수요에 의한 다작을 위해 대개 화가와 조수가 콜라보하는 <반반 그림>이 유통되는 것이 다반사이다. 즉 북한의 인민화가들도 제자나 조력자들이 초벌 밑그림을 그린 토대 위에서 인상깊은 포인트 장면들에 공을 들여 완성하여 시장에 내놓는 그림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림들의 경우 서명의 진위나 그림 퀄러티 등에서도 특별히 흠잡을 데가 없다.

하지만 위 그림들은 어딘지 평이해 보여서 감상하는데 내면의 울림이 덜하고 해당 작가의 고심어린 작심의 흔적이 매우 약해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반면에 어떤 그림들은 그런 타협과 협력의 징후가 전혀 엿보이지 않는 화가 본인만의 순결하고 완성도 높은 고유한 붓질의 숨결과 맥박이 생동하는 그림들이 있다. 바로 이 그림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김상직 화가의 '만복장생'(218-94 2006년)
김상직 화가의 '만복장생'(218-94 2006년)

▲'만복장생'(218-94 2006년)

화가에게 불후의 명작 이란 과연 어떤 작품일까? 일필휘지로 손쉽게 그려진 단순한 작품일까? 아니면 섬세하게 그려진 복잡한 구도의 작품일까? 역사적으로 보면 서양화의 미켈란젤로의 벽화에서도 엄청난 정성과 품이 들어간 것을 한눈에 직감할 수 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상당히 정교한 작품으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킴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명화 중 김홍도의 풍속도, 윤두서의 초상화류, 장승업의 몰골화 등에서 살펴보았을 때 모든 작품들이 한결같이 상당히 세밀하면서도 깔끔하고 시원스러운 선과 몰골기법의 굵직한 붓질이 겸비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이우환 류의 그림처럼 점 몇 개와 선 몇 개를 그리고 명화라고 역사적으로 인정된 사례는 없다. 현대 서양화의 로스코 작가나 우리 화단에서 열풍이 부는 단색화 류의 그림들에는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을 지언정 그걸 가치있는 명화라고 공감을 모으기에는 미약하고 부족해 보인다.

김상직의 대표작인 만복장생 그림들 중 이 작품은 소나무 잎새가 유독 촘촘히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면 푸른 가시 철조망이 솜털처럼 모아져 있지만, 멀리서 크게 보면 소나무 잎새가 뭉게구름처럼 풍성해 보인다. 김상직의 대형 소나무화들 중에는 몰골화가답게 밑바탕에 짙푸른색을 입히고 소나무 잎을 듬성듬성 속성으로 그리는 방식으로 많은 작품들을 창작했고, 멀리서 그 작품을 감상해보면 소나무 잎들이 무성한 것처럼 보이는 회화적인 효과를 누린다.

어떤 작가도 자신의 작품 중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작품을 보다 애지중지하며 그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내놓게 된다. 비슷한 작품일지라도 붓질이 더 많이 가고 더 웅장하고 더 자신감 있고 힘있게 그린 그림을 더 우수한 작품이라고 홍보하게 마련이다.

이 작품도 작가가 인증사진을 따로 찍으면서 그런 만족감과 자화자찬을 많이 한 작품으로 전해진다. 우람한 소나무의 거친 나뭇결과 구석구석 박힌 예리한 잔가지들은 입체감을 잘 드러냈고, 쭈빗쭈빗 날카로운 푸른 소나무 잎들과 균형 잡힌 홍매화와 붉은 해의 형상 및 보색 대비 효과도 가히 일품이다.

김상직 화가의 '구룡폭포'(60호 2000년)
김상직 화가의 '구룡폭포'(60호 2000년)

▲'구룡폭포'(60호 2000년)

김상직의 구룡폭포는 추상화와 구상화 혹은 수묵화와 채색화가 원경과 근경 중간지점의 창공에서 마치 서로 다른 우주 비행체들이 도킹하여 합체된 듯한 혼성 산수화이다. 근경의 풍경은 채묵 산수화로서 소나무의 짙푸름과 가을 단풍의 울긋불긋함이 서로의 진채색을 뽐내며 뒤엉켜 있다. 화면 중심의 짙은 농묵의 갈색 바위 위의 암자는 비상하기 위해 둥지에서 휴식을 취하는 독수리가 차분하게 산 아래를 조감하고 있는 듯하다.

원경의 추상적 기운이 도사린 구룡폭포는 그 끝의 다함을 알 수 없는 기다란 용이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낙하하는 것 같은 장쾌하고 힘찬 기백의 폭포 줄기를 시원스레 쏟아내고 있다. 구룡폭포와 그 주변의 산악들은 붓질을 최소화한 감필(減筆) 몰골기법으로 추상적 화풍이 작렬하고 있다. 이런 필법은 북한화가 중 리석호, 정영만, 김상직에게서 유독 강하고 진하게 느껴지는 힘과 기상이다.

◇김상직(1934-2009)은 누구인가?

김상직은 그 화풍이나 기품, 색감 면에서 스승 리석호를 가장 충실하게 창의적으로 계승한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북한에서 리석호와 정종여를 제외한 2세대 화가들 가운데서 정창모, 선우영과 함께 북한의 3대 조선화가로 불리운다.

김상직 화가는 조선화 몰골기법의 최고의 대가로 꼽힌다. 정창모는 선묘 기법의 그림이 종종 보이기도 하는데 비해 김상직의 화조화, 풍경화에서는 몰골 기법의 그림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는 미술후배 육성사업에 공헌이 지대하였고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들에서 개인전을 열어 대인기를 끌었다.

리석호는 그의 수제자로 정창모와 김상직을 꼽았다. 정창모가 지장(智將) 스타일이라면 김상직은 덕장(德將) 타입이다. 정창모가 전통적 소재와 컬러풀한 색채 구사 면에서 리석호의 장점을 충실히 계승한 제자라면, 김상직은 추상적 사유 측면과 몰골기법에서 그 정통적 후계성이 농후하다. 도통한 무사와 같은 순수한 기질과 담백한 영혼의 붓놀림으로 거칠게 활보하는 몰골기법의 창안적인 측면에서는 김상직이 더욱 철두철미한 적통성과 전승성을 지닌다.

리석호 사후 시커먼 먹묵 혹은 단색 농담만이 지배하는 몰골기법의 전수와 추종, 중흥과 계승 발전에 의구심을 품고 실체성에 대한 논의가 분분해지고 공방을 거듭하며 갈피를 못잡고 좌초할 뻔할 때도 있었다.

그때 김상직의 필법은 그 망설임과 거부감을 멈추게 하여 중심을 잡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로 하여금 다시금 몰골법이 생생한 화폭으로 되살아나고 주류의 물길로 유영할 수 있도록 하는데 주요한 원군 중에서도 으뜸 역할자가 된 것이다. 몰골기법에 관한 한 리석호의 현신을 보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김상직은 북한 최고 원로화가들의 친목 및 연구모임이자 창작단으로도 활약한 송화미술원의 설립(1996년 3월) 시부터 원장직을 맡아서 그가 임종할 때까지 원장직을 수행하였다. 2007년경 많은 원로 작가들이 작고하면서 해산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지금도 평양에 위치한 그곳의 명맥은 현재의 원로 화가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단체명인 ‘송화’는 “사철 푸른 소나무와 같은 억센 의지로 불멸의 꽃을 피우는 전사로 영원히 살려는 노화가들의 소박한 충효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발족 당시 1세대 조선화가 림홍은, 황영준은 명예고문이었고, 회원으로는 유화가 김린권, 림렬, 리맥림, 김장한, 장재식, 함창연, 최원수, 최제남, 유흥섭, 김형철 등이 있었고 조선화가로는 강정님, 박제일, 리률선, 리근화, 김상직, 송시엽, 박진수, 문화춘 등이 있었다. 유화가 10명, 조선화가는 명예고문까지 포함해서 10명 정도로 회원 구성 비율을 대략 안배한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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