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우리의 어린시절 떠올리는 친숙한 추억의 한 장면

▲고향을 떠나는 일가족(5호 연대미상)
▲고향을 떠나는 일가족(5호 연대미상)

▲고향을 떠나는 일가족(5호 연대미상)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우리는 전쟁을 겪지 않은 전후세대로서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결단코 상상하기조차 싫고, 전쟁이라는 단어가 지구상에서 역사 속의 페이지로 박제화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만약 그 모든 이들의 바람을 외면하고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고향을 버리고 떠날 발걸음을 떼기 전에, 우리 민족의 공멸을 초래할 뿐만아니라, 이 땅에 생명이 살아가기 힘든 암흑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림홍은의 작품 ‘고향을 떠나는 일가족’에서는 차마 떠나고 싶지 않은 고향이지만, 전쟁통에 생사여탈의 갈림길을 헤쳐 가기 위한 피난의 가시밭 행렬이 전개되고 있다. 화가는 이 진퇴양난의 피난길 장면을 절제하면서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등 뒤에서는 포화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총성이 울리고 앞은 강물이 가로막고 있다.

다만 온가족이 흩어지지 않고 함께 길을 나섰다는데 큰 안도와 위안을 삼고 있는 듯하다. 가족 모두는 이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리며 강물의 수위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다. 대각선 구도의 사선으로 흐르고 있는 강물은 긴박한 긴장감이 함께 떠밀려 오지만, 그다지 멀지 않은 건너편에 뭍이 보이기 때문에 목숨을 걸어볼만한 강물이다.

이 그림에서도 딸아이의 붉은 치마와 초록 저고리 옷 색상, 그리고 아기 업은 엄마의 체크 무늬 포대기의 바둑판 색상은 림홍은의 봉선화 그림에서와 같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엄마는 갈색 담요를 1차 포대기로 하고 바둑 무늬 포대기로 아이를 2중으로 야무지게 꽉 조여 둘러메고 있으면서도 한손으로는 머리에 피난짐을 받쳐 이고 어린 아들과 딸을 쳐다보고 있어 처연한 느낌을 자아낸다.

아버지는 지게에 피난 보따리와 함께 돗자리와 밥상을 함께 둘러 감아 메고 깊은 시름에 잠긴 채 강물을 응시하고 있다. 두 남매는 시퍼런 강물이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지만 필사적인 심정으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곧 건널 채비를 차리고 있다.

림홍은 화가의 '봉선화'(40-39 연대미상0
림홍은 화가의 '봉선화'(40-39 연대미상)

▲봉선화(40-39 연대미상)

이 그림은 우리의 어린시절 한폭의 추억의 장면이다. 봉선화 물들이기는 우리나라의 꼬마 여성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자연화장법 의식이다. 봉선화가 만발한 꽃밭에서 언니가 여동생에게 이를 전수해주고 있다.

언니가 동생의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이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이미 왼쪽 손의 손톱에는 푸른 잎이 감겨 있고 오른쪽 손마저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다. 언니와 여동생의 시선은 작업 중인 손으로 집중되고 있는데 포대기에 엎여진 남동생은 고개를 돌린 채 단잠을 자고 있다.

이 그림은 오방색으로 대부분을 채색함으로써 간결하면서도 친근하고 색감이 꽉 들어찬 느낌을 주고 있다. 오(방)색은 적, 청, 황, 백, 흑, 백색을 이름한다. 우리말에서 오색이라 함은 단지 다섯 색깔이 아니라 모든 색을 뜻한다. 오방색 중에서 황색(황제의 색)이 중간에 위치하듯이 이 그림의 중간에는 노란색 저고리를 입은 언니가 구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적색과 청색의 치마색의 대비, 하얀색과 검정색 고무신의 대비, 검정색 머리색과 하얀 여백의 하늘의 대비, 빨간 색 상의의 업힌 꼬마와 붉은색 봉선화와 나팔꽃, 흰색과 검은색 바둑판 무늬의 퍼대기가 모두 오방색채로 덮혀 있다. 나머지 색깔 부분은 땅과 울타리의 황토색과 초록색 잎사귀와 여동생의 초록색 저고리로서 자연 색감의 채색이다.

불교의 사찰과 궁궐 등에 사용하는 단청은 모두 이러한 한국적인 오방색을 사용하였고 색동저고리 역시 오방색이 사용된 예로서 건강과 화평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연유로 의복의 색에 규제를 받은 조선시대 서민들은 평시에 백색의 옷을 입다가도 잔치가 있을 때 색동옷을 입고 시각적인 즐거움을 누렸다. 색동에 사용된 주된 색은 적, 청, 황, 백의 네 가지 색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초록과 같은 간색을 섞어 사용하였다.

림홍은 화가 
림홍은 화가 

◇림홍은(1914-1999년)은 누구인가?

림홍은은 아동영화분야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영화미술가의 대가로서 활동하였고, 의상미술과 창작에 필요한 15권의 가치있는 의상참고서를 집필한 식견 높은 인민예술가이다. 6.25 전쟁 전후 시기에는 조선화 분야에서 림홍은과 유화 분야에서는 정관철이 각각 선전화가를 대표할 정도로 단연 두각을 드러내었던 전력의 명화가였다.

그는 황해도 출생으로 일본동경대학 예술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해방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을 하였다. 37년에는 서울에서 아동잡지 ‘아이생활’의 표지삽화를 그리고 편집사업을 하다가 그후 1944년까지 서울에서 제약회사 미술원으로 산업미술을 도안했으며 해방후에는 평양교육성 아동문학사에서 창작생활을 하였다.

1953년-56년에는 국립미술제작소 제작소장을 지냈고 1956년부터는 예술영화 촬영소에서 제작소장을 역임하였다. 57년에는 정현웅과 2인전을 개최하고 94년에는 생애를 결산하는 개인전시회를 국가 차원에서 성대하게 치뤄주었다.

이때 전람회를 참관한 한 작가는 감상록에서 ‘림홍은 선생은 창작실적으로도 최고의 관록 있는 미술가이고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국보적인 미술가입니다. (중략) 한때 영화를 만든답시고 우쭐렁대던 외국인사들이 그의 높은 견식에 두손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6.25전쟁 이전부터 북한의 전후 평화적 건설시기 뿐만아니라 송화미술원 명예고문으로 활약하다 86세인 1999년에 작고하기까지 다방면에서 미술가로서 뛰어난 사회적 성취와 업적을 쌓아 올렸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그가 추구한 분야가 매우 다양하여 조선화가로서 예술성 차원의 사후 명성만을 놓고 본다면 정종여, 리석호, 최도렬에 비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듯하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림홍은의 금후 창작을 주도한 미술 형식은 선전화였다. 유화와 조선화 분야에도 관여하였고 장식도안 등 일련의 출판 및 선전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인민대중을 당정책 관철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기 위한 정치선전화 창작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돌렸다.

당시 유화, 조선화를 전공한 대다수 미술가들은 <심오한 조형적 형상 창조>라는 생각 밑에 정수적 미술 형식과는 거리가 있는 선전화 창작에 낯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림홍은은 새사회 건설에 복무하는 대중적 성격을 띤 선동적 미술 형식의 전투적 사명과 임무를 깊이 인식하고 이름을 낼 수 있는 전람회 작품이 아니라 선전화 창작에 발벗고 나섰다.”

또한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는 림홍은의 50년대 초반 전후의 활약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면서 그의 남다른 적극적인 현실 참여적인 노력에 대해 마르지 않는 칭찬을 쏟아낸다. “그는 조선화의 형식으로 주제화를 창조했다는 것과 함께 인민들의 미감에 맞는 채색화로 그렸다.(중략) 그때까지만 하여도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행위의 후과로 하여 조선화가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고, 몇 명 안되는 조선화가들은 우왕좌왕하면서 현실 반영의 폭을 넓히지 못한 채 도식적 주제에 매여 달리거나 수묵화 테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오랫동안 농촌에 살면서 이 시기 일어나는 세기적인 사변들을 목격하게 된 림홍은은 대담하게 민족미술 형식에 민주주의적 내용을 담았으며 조선화 형식의 고유한 기법들을 살리면서 시대감이 나게 다채로운 색을 널리 활용하였다. 그리하여 적극적인 주제에 상응한 형식에서의 혁신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대담하고 진취적인 창작 태도였다.”

림홍은 화가의 작품집
림홍은 화가의 작품집

위 림홍은 작품집(1997년 발간) 서문에서도 다음과 같이 화가에 대한 높은 평가를 쏟아내고 있다. “그는 조선적인 것을 바탕으로 우리 미술을 발전시킬데 대한 당의 문예로선을 높이 받들고 3부작으로 창작한 조선화 <기뻐하는 인민들>, <살지는 농촌>, <움직이는 공장>을 1947년에 열린 국가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많은 사람들을 경탄시키었다. (중략)

그는 전후 복구 건설시기에 아동화 작품들과 아동그림책의 삽화, 아동영화미술 창작으로 우리 인민들과 청소년들의 교양에 적극 이바지 하였다. (중략) 그는 혁명영화 <민족의 태양>, <친위전사>, <압록강을 넘나들며> 등과 예술영화 <달매와 범다리>, <춘향전>, <임진왜란>, <돌아오지 않는 밀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영화미술 창작에서 자기의 개성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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