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20주기 추모행사 방북 요청 거부
관광대가 4억 6200만 달러에 집착…부친상 빈소 찾았던 인사에 문전박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9년 10월 금강산을 찾아 “너절한 남조선 건물을 들어내라”며 남측 시설의 폐기를 지시했다. 뒤편으로 현대아산의 자산인 해상호텔인 해금강호텔이 보인다. [사진=조선중앙통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9년 10월 금강산을 찾아 “너절한 남조선 건물을 들어내라”며 남측 시설의 폐기를 지시했다. 뒤편으로 현대아산의 자산인 해상호텔인 해금강호텔이 보인다. [사진=조선중앙통신]

【뉴스퀘스트=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금강산 망부가(亡夫歌)’를 부를 수 없게 됐다.

지난 4일 남편인 고(故) 정몽헌 회장의 20주기를 맞아 고인이 생전 심혈을 기울인 사업현장인 금강산에서 추모제를 지내려 했지만 북한 측이 이를 거부하고 나선 때문이다.

현정은 회장은 북측과 관련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먼저 통일부에 북한 사업 파트너인 아태평화위 관계자들과의 접촉 승인을 신청했다.

관련 사실이 보도되자 북한은 “남조선의 그 어떤 인사의 입국도 허용할 수 없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남북관계 차단 의지를 드러내려는 듯 대남기구가 아닌 북한 외무성이 나섰다.

현대 측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이런 북한의 반응은 뜻밖이다.

특히 현정은 회장에 대해 금강산행까지 막고 나선 건 이례적이다.

현 회장이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때 평양을 직접 찾아 상주인 아들 김정은에게 조문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는 점에서다. 당시 상황에서 현 회장은 큰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방북했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반감과 대남 대립각을 세워온 분위기를 감안한다 해도 현 회장에게 김정은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자칫 아버지 김정일과 현 회장과의 관계는 물론 양측이 공들였던 금강산 관광 사업을 부인하는 모양새가 된다는 점에서다.

김정일 위원장은 생전에 현정은 회장과 만나 사업상의 애로를 타개해주는 건 물론이고, 딸인 정지이 현대무벡스 전무까지 각별히 챙길 정도였다.

이런 김정은의 냉담한 태도와 관련해 대북 정보 관계자와 남북경협 사업 인사들 사이에서는 금강산 관광 대가 문제가 불씨가 됐을 것이란 관측이 비중 있게 제기되고 있다.

한 관계자는 “김정은이 금강산 관광 재개를 통해 천문학적 액수의 관광대가를 챙길 계획을 세웠지만 무산되자 남측 정부는 물론 현대 측에도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내며 몽니를 부리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은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와 이후 같은 해 3차례 개최된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금강산 관광의 재개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당시 미국과 유엔의 대북제재로 인해 ‘대규모 현금(bulk cash)’이 건네지는 금강산 관광의 재개나 개성공단 재가동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김정은이 집착을 보인 것이다.

실제 문재인 정부는 금강산 관광의 재개를 적극 모색했고 이는 김연철 당시 통일부 장관 등의 국회 답변 등을 통해 확인된다.

정부 당국자는 “관광을 대북제재의 예외 항목으로 만들어 돌파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정부는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국민 지지여론 형성을 위한 물밑 작업까지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소식통은 “일각에서는 김여정이 오빠인 김정은 특사로 청와대를 방문하고 퐁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행사 등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는 관측까지 있다”고 말했다.

이런 기대 때문에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에게 15만 평양시민이 모인 자리에서 대중연설을 하는 기회까지 만들어주고 백두산 방문과 평양 시내 카퍼레이드 같은 환대를 했다는 얘기다.

1998년 11월 시작한 금강산 관광 사업은 북한에 모두 9억 4200만 달러의 관광 대가를 지불하도록 합의하고 있다.

사업성과 등과 관계없이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럼섬(Lump Sum) 방식의 계약이다.

하지만 관광 사업이 부진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고, 2008년 7월 관광객 박 모씨가 북한 경비병의 총격에 사망하는 사건으로 완전 중단됐다.

이때까지 북측에 지급된 사업대가는 모두 4억 8000만 달러다.

북한 입장에서는 어쨌든 남은 4억 6200만 달러는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사업 중단이 북한 측의 총격 때문이란 점에서 논란이 있었다.

물론 북한은 피격당한 관광객이 통제구역을 넘어왔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며 책임을 남측에 전가해 왔다.

4억 6200만 달러는 우리 돈 5880억 원에 이르는 거액이다. 김대중 정부 당시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불법 송금한 것으로 특검이 밝힌 돈(4억 5000만 달러)과 맞먹는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일거에 외화난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대북제재로 돈줄이 말라버린 김정은의 통치자금 사정으로 볼 때 ‘빈집에 소 들어가는 격’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미국의 강력한 대북제재 장벽에 막힌 문재인 정부는 관광 재개라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미국의 눈치를 보지 말라”며 압박하던 북한은 결국 뜻을 이루기 어렵게 되자 ‘삶은 소대가리’ 운운하며 불만을 터트렸다.

결국 2019년 10월 금강산을 찾은 김정은은 “너절한 남조선 건물을 들어내라”며 관광사업의 파국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김정은이 현정은 회장의 금강산행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한때 ‘햇볕정책의 옥동자’로 불리던 금강산 관광의 파국은 남북관계의 현주소를 반영한다.

문재인 정부시절부터 꼬인 정세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물론 그 책임의 대부분은 핵과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 긴장을 조성하고 대북제재를 자초한 김정은에 있다.

아버지의 유업을 말아먹은 것은 물론이고, 어려움 속에서도 부친상에 빈소를 찾았던 문상객을 박대하는 자충수를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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