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山臺)는 사라져버린 우리나라의 전통 입체 무대

【뉴스퀘스트=김승국 전통문화칼럼니스트 】

'봉사도' 중 산대희(부분) 
'봉사도' 중 산대희(부분) 

조선조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축제 행사로 산대희(山臺戱)라는 대표적인 축제 행사가 있었다. 산대(山臺)는 거대한 산의 형상을 한 우리나라의 전통 무대를 말한다. 산대는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에서는 아직도 그들의 축제인 마쓰리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우리의 전통 무대인 산대는 안타깝게도 사라져버렸다. 서울·경기지역의 탈놀이인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퇴계원산대놀이 등 산대놀이도 지금은 산대 없이 탈놀이만 남아 전승되고 있다. 

일본의 축제 중에서 '마쯔리 산대'
일본의 축제 중에서 '마쯔리 산대'

  산대희는 산대를 좌우에 각각 설치하고 그 위, 아래에서 광대와 기녀들이 가무백희(歌舞百戱)를 하는 축제였다. 아마도 서구식 무대에 익숙한 일반인들은 산대라는 자랑스러운 우리 고유의 무대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산대(山臺)란 불교의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져 선산(仙山)의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산봉우리·나무·꽃·신선이나 기계장치에 의하여 작동시킬 수 있는 인형 잡상 등 조형물이 설치된 우리 고유의 무대를 말한다. 서구가 평면적인 무대를 가졌다면,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 입체적인 무대를 가졌다. 나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국보인 백제금동대향로의 상단부는 우리 전통 무대인 산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 판단된다.

  이러한 산대희의 전통은 “동해바다에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와 같은 삼신산(三神山)이 있고 이 산들을 큰 거북이가 떠받치고 있는데, 국가가 태평하면 그 거북이가 춤을 춘다.”라는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산대희는 그러한 거북이가 춤을 추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동해바다의 삼신산 설화는 중국의 설화이고 산대희도 중국에서 시작된 되었기에 중국 문화권의 동아시아에서는 국가에 큰 경사가 있거나 외국 사신이 올 때는 당시가 태평성대임을 구가하거나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산대희 류(流)의 공연을 하였다.

고려말 문신 ‘이색’의 한시에서 산대희의 모습 그릴 수 있어

  비록 산대희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우리나라로 들어와 크게 성행하였고 이미 신라 진흥왕 때 국가적 행사인 팔관회에서 이러한 산대희가 이루어졌다는 문헌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라의 산대희는 고려조로 거쳐 조선조까지 이어져 내려갔으며 조선 후기 때는 같은 동아시아권에서도 우리나라의 산대희가 최고였다.

영조 1년(1725) 중국사신 아극돈(阿克敦)이 조선에 다녀가면서 각종 행사 등을 담아 그린 화첩 ‘봉사도(奉使圖])’에 담긴 산대희
영조 1년(1725) 중국사신 아극돈(阿克敦)이 조선에 다녀가면서 각종 행사 등을 담아 그린 화첩 ‘봉사도(奉使圖])’에 담긴 산대희

  고려말 문신인 이색의 한시(漢詩) <산대잡극(山臺雜劇)>을 읽어보면 산대희의 모습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산대를 맺은 것이 봉래산 같으니 / 山臺結綴似蓬萊

과일을 바치는 선인이 바다에서 왔네 / 獻果仙人海上來

놀이꾼의 풍악 소리 천지를 진동하고 / 雜客鼓鉦轟地動

처용의 소맷자락은 바람을 따라 휘돈다 / 處容衫袖逐風迴

장대에 의지한 사내는 평지를 가듯 움직이고 / 長竿倚漢如平地

폭죽은 번개처럼 하늘을 찌르네 / 瀑火衝天似疾雷

태평스러운 참 기상을 그려 내고자 하나 / 欲寫太平眞氣像

늙은 신하의 글재주 없음이 부끄럽도다 / 老臣簪筆愧非才

산대희를 현대적으로 복원하여 K-콘텐츠로 활용해야 

  산대희는 원래 좌우로 나눠 서로 경쟁하는 것이기에 후대로 갈수록 더욱 성대해졌다. 그래서 조선시대 세종 때는 산대의 높이가 20m 정도였으며 조선 중기의 산대는 25m 정도였다. 또한 좌우 산대는 좌우 2개의 산 모양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좌우 양쪽에 각기 춘하추동 등 계절에 따른 4개의 산봉우리를 각기 만드는 것이기에 그 높이도 높이려니와 그 전체적인 규모도 엄청났다. 

  동해바다에 있다는 삼신산을 모방한 산대에는 그러한 삼신산에 있다는 궁궐, 사찰, 인물, 동물, 화초들을 실제처럼 만들어 장식해 두었다. 이러한 산대희는 조선 후기 인조 때 다소 약화하여 국내의 경사와 관계되는 대규모 산대는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고 중국 사신이 오는 등 국제행사에서만 산대희가 열렸다. 

중국 요령성 조선족이 복원한 산대희(추정)
중국 요령성 조선족이 복원한 산대희(추정)

  이러한 우리의 전통 산대희를 복원하여 재현해 보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축제의 시대에 우리 산대희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대적으로 새롭게 재창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무형유산은 K-culture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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