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살아 움직이는 차원 넘어 춤추고 노래하듯 마치 동물의 활력과 약동성 보여
'봄'...색채 추상 표현으로 자칫 평범한 풍경화 분위기를 신선한 면모로 반전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최제남 화가의 '고원의 나팔소리'(30호 2009년)
최제남 화가의 '고원의 나팔소리'(30호 2009년)

▲고원의 나팔소리(30호 2009년)

스위스 알프스 목장을 연상시키는 그림 제목과 배경 및 인물들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강원도에서도 엄청난 면적의 염소 목장을 운영 중에 있기에 꼭 외국의 풍경을 염두에 두지 않은 토종 그림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 대관령에는 양떼 목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비해, 북한의 강원도에 있는 방목 소와 염소 농장은 그 규모가 훨씬 더 크다. 우리의 여의도 면적의 24배 가량의 땅을 개간한 대규모 목장이다.

북한의 이 목장에 대한 광고 자막 일부이다. "이 산기슭에 질좋은 먹이 풀판이 펼쳐지고 집짐승들이 구름처럼 흘러넘칠 그날을 그려보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기분이 샘솟고...". 아무튼 이 그림의 배경 주변에는 금강산과 원산 마식령 스키장까지 있음에 비추어, 북한은 패키지로 강원도 일대 외국인 관광특구 개발에 전력을 기울여 확장해 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염소는 양과 비슷하여 구별하기가 어려우나, 염소의 수컷에는 턱수염이 있고, 양의 곱슬머리처럼 돌돌 말아 올라간 복슬거리는 털 모양에 비해 염소의 용모는 호리호리하고 털 모양은 단정하다. 이에 반해 염소의 뿔은 소용돌이 모양 또는 나사선 모양으로 비틀려 있다.

염소는 험준한 산에서 서식할 수 있기에 북한의 토양에서 양보다 기르기 더 적합하고 먹이는 나뭇잎·새싹·풀잎 등 식물질이고, 사육하는 경우에도 거친 먹이에 잘 견디기 때문에 북한식 기후 환경과 생태에 더 적응하기가 용이하다.

초원을 장악한 흰 염소떼와 하늘을 뒤덮은 양떼 뭉게구름의 색상은 상호 조응을 이루면서 그 형상도 닮은 꼴이다. 어린 양을 안고 있는 소녀의 표정에는 온화한 행복감이 어리여 있고 나팔을 불어대는 목동의 얼굴에는 염소들의 가장으로서 힘찬 기상이 서려 있다.

화가는 저멀리 전신주를 의도적으로 희미하게 드러내면서 인간과 가축들, 산야에 대한 고전적 아름다움 외에 근대화의 상징물을 통해 조화로운 발전에 대한 염원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최제남 화가의 '들국화'(20호 2012년)
최제남 화가의 '들국화'(20호 2012년)

▲들국화(20호 2012년)

이 그림은 야생 들국화를 그린 그림인데 일반 꽃정물화와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들국화들이 살아 움직이는 차원을 넘어서 춤추고 노래하는 듯한 마치 동물의 활력과 약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언젠가 중국 화랑에서 나도는 이 작품과 유사한 그림을 보았는데 어딘가 붓질이 맥을 잃고 멈춰버린 고요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정말 이 원화 그림을 보고 베껴서 그린 그림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모사 그림은 붓질의 나아감이 얌전하게 끊기듯 멈추면서 힘을 잃어버린 느낌이 곧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색상 측면에서도 언뜻 보기에 비슷한 듯했으나 두 그림을 맞대어 놓고 비교해보니까 둔탁하고 생기없는 단조로운 색감이 여실히 비교되었다.

이 그림에서처럼 정성과 품격, 그리고 활력과 윤기가 장착되어 있어 마치 물광이 나면서 입체적으로 번쩍거리는 구두와 구두약만 발라놓은 단순하고 밋밋한 구두와의 차이가 연상되었다.

이 그림의 색상들은 원색들에 마치 백자 도자기의 유약을 입힌 듯 한결같이 빛을 흡수하여 뽀얗고 탐스러운 광택으로 번득거린다. 색감이 화사하면서도 고급스럽고 다양한 색깔이 저마다 자기 칼라를 뽐내며 우후죽순 등장하여 수려하면서도 자연의 색들이 밑바탕이 되어 조화롭고 안정감을 준다.

자주색과 핑크색, 초록색과 연록색, 연보라색과 청보라색, 갈색과 황토색의 동일 계열 색상들이 멀리 보면 찬란한 스펙트럼을 접었다 펼쳤다 하며 혼색으로 뒤섞이기도 하면서 색깔 음미의 진국 하모니를 연출하고 있다.

최제남은 꽃 정물화 중에서도 이런 야생 꽃 정물화를 그릴 때면 마치 신의 입김을 불어넣어 자신이 캔버스 위를 질주하면서 생동하는 꽃의 미학을 창조하는 플로라(꽃과 봄과 번영을 상징하는 여신)가 되어 가는 듯하다.

최제남의 꽃 정물화는 꽃 못지 않게 배경에도 한참 동안 시선을 빼앗긴다. 그곳에 눈길을 주고 나면 최면에 걸린 듯 멍하니 생각에 잠기게 하는 마력이 있다. 마치 무대 뒤에 무수한 꽃과 나비들이 숨어 있는 듯 쉴새 없이 하늘거리며, 낭만적 희망과 몽환이 샘솟 듯 꿈결같은 환영이 어른거린다.

그는 만년으로 갈수록 동양꽃 중에서는 국화, 서양꽃 중에서는 라일락을 신기루를 쫓는 사람처럼 신들린 듯이 몰입해 그렸다. 국화나 라일락은 한창일 때는 꽃이 덩어리져 있는 듯하고 오밀조밀 집합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전성기가 지나면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님에게 흩뿌려져 산화되는 이미지가 강렬하다.

이 꽃들은 몽우리져 있을 때는 알곡들을 품은 듯 풍만해 보이지만, 결국 한잎한잎 분산되어 흩어지고, 한올한올 흩날려서 흔적을 감추는 무상하고 덧없음을 상기시켜 주는 의미심장한 꽃들이다.

최제남 화가의 '봄'(20호 2007년)
최제남 화가의 '봄'(20호 2007년)

▲ 봄(20호 2007년)

최제남의 봄에서는 살구나무꽃(혹은 배나무꽃) 숲을 중심으로 위로는 산맥이 호위벽을 펼치고 있고 맑은 하늘이 밀집모자처럼 씌워져 있다. 그림의 아래 부분은 이 화폭의 주요 포인트로서 마치 겨울잠을 잤던 봄의 정령들이 지하에서 큰 기지개를 켜면서 용틀임하는 기운으로 꿈틀거리며 지상으로 나오려고 들썩거리고 있는 듯하다.

땅의 지표면이 다양한 색채의 껍질로 단단하게 덮여 있다가 땅에서 에너지가 분출하면서 굳어 있던 표면 앙금층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껍질들이 파열되기 일보직전인 모습이다. 자칫 평범한 풍경화로 흐를 수 있는 분위기를 신선한 면모로 반전시킨 것은 이 그림에서 표현된 땅의 ‘색채 추상’ 표현 때문이다.

북한미술에서 색깔 추상 표현이 구상화에서 부분적으로 구현된 점은 독창적이고 참신하게 비춰진다. 구상미술과 추상미술이 섞인 반추상 형식의 작품도 추상작품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 그림도 당연히 추상주의 미술 작품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서구에서조차 색깔 추상을 자유분방하게 구상 형식과 공생을 이뤄가며 표현하는 화가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러나 최제남의 그림에서는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이 그리 특별하지 않고 오히려 ‘무애의 경지’에서 자연스럽게 기분 내키는대로 응용되고 있다.

‘추상 표현주의’는 평론가 알프레드바가 “형식은 추상적이지만 내용은 표현적”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이 ‘추상 표현주의’에는 창작 기법이나 작품 자체의 시각적 특성에 따라 ‘액션페인팅’과 ‘색채 추상’으로 구분된다. 이 두부류 그림의 공통점은 ‘작가 내면의 무의식 세계의 시각화’와 관련이 있고 두 부류의 작품은 확연한 조형적 차이가 있어 구별하기 어렵지 않다.

추상 미술은 작가가 처음부터 대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내면세계의 느낌이나 감흥을 비묘사적으로 그려내고 사물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형태를 새롭게 창작·재구성하여 표현한다. 추상 미술은 기하학적 요소로 지적인 화면을 구성하는 ‘차가운 추상’과 형태나 색채의 자유분방한 요소로 감성적 화면을 구성하는 ‘뜨거운 추상’의 두 가지 성격으로 나뉜다.

최제남의 작품 성향은 당연히 ‘뜨거운 추상’과 호흡을 같이한다. 그의 그림에서는 ‘색채 추상’ 형태를 즐겨 구사하지만, 차분하지 않으면서도 절도를 살린 조화미가 돋보인다. 한국의 이대원의 화풍과 비교해 감상하는 것도 감상의 재미를 더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최제남 화가
최제남 화가

◇최제남(1934-2015)은 누구인가?

최제남 화가를 일컬어 색채 미학의 종결자, 운필의 파가니니 변주자, 동방의 모네, 꽃정물화가의 최고봉 등의 별명을 붙여본다. 그는 파가니니가 연주할 때 놀리는 바이올린의 활처럼 캔버스 위의 운필을 현란하고 힘이 넘치게 구사하면서 엇박자와 변주의 롤러코스터를 제멋대로 타고 노니는 듯하다.

한편 그는 인상파의 아버지 모네가 서양의 현대미술계에서 시들어버린 인상파의 옛 영화를 다시 누비고 다닐 길이 막히어 동양에서 다시 한번 꽃피울 작정으로 최제남으로 환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한다.

최제남의 화폭은 마치 몽유도원도의 한 폭 속으로 뛰어들어가 꿈길을 걸으며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도취해 감상자들의 영혼을 일깨워 함께 끌고 들어가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최상의 경지를 단지 능란한 솜씨라고 일컫는 것은 작가에 대한 경솔한 언사이자 결례를 범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단지 붓끝에서 일어나는 비상한 재주라는 찬사도 적절치 않다. 자유자재의 붓질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울림과 진동에 따라 춤을 추지 않고는 중간중간에 끊어지고 멈춰서게 된다. 하지만 최제남의 화필에서는 멈칫거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최제남은 이태백과 같은 애주가 예술가로 취기에 젖어 있을 때 그의 붓놀림이 더욱 자유롭고 나아가 신들리는 경지의 힘을 발휘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붓질에서는 단숨에 질주하는 경주마의 호흡이 느껴지고 훨훨 날아다니는 새들의 펄럭거리는 날개짓이 감지된다.

그의 유화 캔버스에서는 언제나 탁 트인 구도와 감칠맛 나는 색상, 그리고 시원스럽고 힘찬 붓질과 함께 오목조목 입체감을 선사하는 깔끔한 마띠에르(질감)가 늘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유화의 속성에서 우리가 가장 느끼고 싶어하는 참맛이다.

북한에는 ‘미친 그림’의 화가로 불리우는 이가 둘 있다. 조선화에는 작고 작가 김상직이 있고 유화 분야의 주인공은 최제남이다. 최제남의 붓질에는 조선화의 날렵한 필력을 닮은 뱀의 머리와 혀처럼 붓끝의 힘이 살아서 순간적으로 뻗어나갈 뿐만아니라, 뱀의 구불구불한 움직임처럼 곡선의 부드러움이 왕성한 에너지를 품고 꿈틀댄다.

그런데 최제남은 스승 한상익의 화풍을 좀더 서구적으로 계승하였다. 러시아 유학을 다년간 다녀왔고 동구라파 여러나라를 예술사절로 유람했던 경험 많은 그였으며, 서구 문물을 접할 기회가 더 많았던 영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북한의 우리식 유화를 기본으로 깔고 서양 화풍의 멋이 한껏 고취된 배짱 두둑한 개성파 화가로서의 명성과 평판을 반평생 누려왔다.

스승 한상익처럼 반동과 이단아 소리를 거의 듣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으니 복도 많은 편이고 정통 유화의 회화 맛을 물씬 내는 화가여서 남한의 미술애호가들이 금방 친숙해질 수 있는 인기 화가이다.

캔버스 위에서 금기시되었던 경쾌한 삼바춤을 추어댄 한상익과 같은 위대한 선배가 뚝심있게 후생가외라 할만한 최제남 같은 후배들의 활동 무대를 멋지게 열어준 토양 속에서 그는 마음껏 그의 끼를 발산함으로써 스승의 뜻을 꽃피울 수 있었다.

문학수의 제자이기도 했던 최제남과의 감동적인 일화가 있어 전한다. ‘문학수가 기차를 타고 최제남의 국가미술전람회 입상 소식을 한시바삐 알려주기 위해 불원천리 찾아왔다. 스승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첫 주제작이 그처럼 우수하게 평가된데 저으기 놀랐으며 그보다도 전화로라도 알려줄 수 있는 일을 직접 찾아와 함께 기쁨을 나누는 스승의 고결한 인품에 더욱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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