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행사에도 열심히 참가하는 야오밍 중국농구협회 주석. 최근 청소년들의 음주 반대 행사에 참석, 명예대사 증서를 받았다.[사진제공=신화(新華)통신]
자선행사에도 열심히 참가하는 야오밍 중국농구협회 주석. 최근 청소년들의 음주 반대 행사에 참석, 명예대사 증서를 받았다.[사진제공=신화(新華)통신]

【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14억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에는 키가 큰 거인들이 너무나도 많을 수밖에 없다. 남녀불문하고 장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농구 같은 경기를 중국이 잘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남자의 경우 세계 최고의 무대인 미 NBA(미국 프로농구 리그)에 진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스타는 드물다. 현재 중국농구협회 주석인 야오밍(姚明. 43) 딱 한 명을 제외하면 정말 그렇다고 단언해도 괜찮다. 그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농구협회 주석으로 일하는 것은 이런 사실을 상기하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생전에 자신과 같은 대스타를 다시 보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은 그는 운명적으로 농구와 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980년 상하이(上海)시 쉬후이(徐匯)구에서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 야오즈위안(姚志源. 71)과 어머니 팡펑티(方鳳娣. 74) 씨가 모두 농구를 업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국가대표를 지냈다면 더 이상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하다. 게다가 부모는 각각 208cm와 188cm의 장신으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키였다고 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장착된 농구 DNA에 힘입어 그 역시 9세에 농구를 시작했다. 역시 피는 어디 가지 않았다. 226cm까지 자란 신장에 피나는 노력마저 더해진 탓에 1998년 겨우 18세의 나이에 국가대표 센터에 선발된 것이다. 이후 그는 중국의 CBA(중국 프로농구 리그)를 완전히 평정하고 2002년 미국으로 건너가 NBA의 휴스턴 로키츠에 입단했다.

당시 NBA 선수 중 최장신이었던 그의 등장은 미국에서도 단연 화제가 됐다. 성적도 엄청났다. 8번이나 올스타에 선정됐다면 말 다했다고 해도 좋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인성도 아주 좋았다. 경기에서는 최선을 다했으나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상대팀 동료들이 다치지 않도록 많은 배려를 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지금도 소문이 자자하다.

이같은 그의 인성은 2011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고 난 후 더욱 빛났다. NBA 선수와 사업가로 활동하면서 번 돈을 주변에 아낌없이 기부하는 행보에 나선 것이다. 그가 2018년에 ‘중화자선상’ 모델상을 받은 것은 이로 보면 하나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팬들에게서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농구 쪽의 일도 선수 때보다 더 부지런히 했다. 그 결과 2017년 겨우 37세의 나이로 농구협회 주석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농구협회 70여년 역사상 최연소 주석이었다.

그는 공산당 당원이 아닌 무당파 신분이었음에도 정치 캐리어 역시 순조롭게 쌓아갔다. 2013년 중국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에 선출된 것은 첫 번째 캐리어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는 전국청년연합회 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국회에 해당) 대표의 신분을 보유하고 있다. 공산당 당원이 아닌 무당파 신분으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는 이 정도의 대우를 받기에 충분한 인물로도 평가받고 있다. 우선 기부를 엄청나게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물욕이 그다지 없는 소탈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청렴하다는 말도 될 수 있다. 사실 그의 청렴함은 최근 각종 부정부패 사건으로 완전히 망신창이가 된 다른 체육 단체들의 현실을 살펴보면 정말 돋보인다.

대표적으로 축구협회를 꼽을 수 있다. 회장을 비롯해 멀쩡한 협회 간부들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도박이나 승부 조작 등의 혐의를 받고 체포돼 하나 같이 최소한 10년 전후 징역형을 각오해야 하는 지경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인들 상당수가 그의 휘하의 농구협회가 멀쩡한 것이 너무나 이상하다고 혀를 내두르는 것은 분명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33세에 정협 위원이 된 후 37세에 농구협회를 이끌게 된 것으로 볼 때 그는 지도력 역시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향후 정치적으로 더 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이 된다.

이외에 국제적 경험과 영어에 능통하다는 사실과 보통 수준이 넘는 글쓰기 실력 역시 그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봐야 한다. 특히 글쓰기 실력은 미국에서까지 책을 출간해 히트시켰을 정도로 대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또 순애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7세 때 나중 국가대표가 되는 한 살 연하의 농구 선추 출신 예리(葉莉)와 사귀기 시작해 10년 후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 연애사는 지금도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유명하다. 농구를 막 시작하던 어린 시절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최대 10시간 가까이 연습을 한 집념은 그가 가정을 이루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는 현재 신분만으로도 중국 스포츠계를 대표하는 파워 엘리트라고 단언해도 괜찮다. 당연히 더 성장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본인이 원할 경우 부장(장관)급에 해당하는 체육총국 국장으로 가지 말라는 법이 없다. 또 전인대에 계속 머물 경우 최소한 분과위원회 주임 자리도 바라볼 수 있다.

이미 부주석 자리를 꿰찬 상태인 전국청년연합회에서는 위상이 더욱 막강해질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런민르바오(人民日報) 체육부의 왕다자오(汪大昭) 선임기자의 설명을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의 체육계 내에서의 위상은 그 나이 대에서는 비교할 대상이 없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본인이 하기에 따라서는 일반의 상상을 벗어나는 자리가 기다릴 수 있다. 평상심을 잃지 않고 해오던 대로만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중국 체육계뿐만 아니라 미 NBA에서도 레전드가 아닌가. 그만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

야오밍은 이제 40대 초반의 나이에 불과하다. 종목에 따라 약간 다르겠으나 미국 같은 곳에서는 현역으로 뛰는 경우도 없지 않다. 여기에 앞으로 중국에서도 70세 전후까지는 은퇴하지 않고 정치 활동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전망에 비춰보면 그의 앞길은 정말 창창하다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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