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주석의 오랜 정치적 동지
현 경제난국 수습 여부에 운명 갈려

시진핑 중국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오랜 정치적 동지인 허리펑 부총리. 현재의 경제 위기를 타개할 해결사를 자임하고 있으나 실적을 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사진제공=신화(新華)통신]
시진핑 중국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오랜 정치적 동지인 허리펑 부총리. 현재의 경제 위기를 타개할 해결사를 자임하고 있으나 실적을 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사진제공=신화(新華)통신]

【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모진 사람 옆에 있으면 벼락을 맞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중국어로 하면 ‘양지츠위(殃及池魚. 성문의 불이 연못의 물고기에까지 화가 미치다)’ 정도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반면 귀인을 만나면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역시 중국어로 하면 ‘위다오구이런 런성부퉁(遇到貴人, 人生不同)’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인생은 진짜 그렇다고 해야 한다. 아성(亞聖) 맹자(孟子)가 “하늘의 때는 땅의 이득만 못하다. 또 땅의 이득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고 일찍이 설파한 것은 다 까닭이 있지 않나 싶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불후의 진리들을 증명하는 사례는 굳이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중국의 당정 최고 지도부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봐도 잘 알 수 있다.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라는 최고 지도자와의 인연으로 인해 현재 자리에 올라간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확실히 이 단정은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중국의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허리펑(何立峰. 68) 부총리는 이들 중 한명이라고 단언해도 괜찮다. 시 주석과의 인연이 보통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역시 우선 그의 이력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1955년 광둥(廣東)성 싱닝(興寧)시 출신인 그는 현재 당정 최고 지도부 내의 상당수가 그렇듯 지청(知靑. 문화대혁명 당시 고등학교나 대학에 다녔을 나이) 세대에 해당한다. 대학에 다니는 것은 언감생심이라고 해야 했다. 실제로도 고향을 떠나 1973년부터 무려 5년 동안이나 푸젠(福建)성 영딩(永定)현의 농장과 발전소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다행히 문화대혁명 종료 2년 후인 1978년에는 워낙 노동자로 일했을 때의 평가가 좋았던 탓에 푸젠성 일대의 명문인 샤먼(厦門)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전공은 재정금융이었다. 노동자로 일하면서 배움에 목이 말랐던 그는 내친 김에 대학원에까지 진학, 1984년에 재정학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관료의 길을 걷는다.

처음 일한 곳은 샤먼시 경제특구의 경제연구소였다. 석사 학위를 보유한 것이 그를 연구소로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곧 샤먼시 정부로 이동, 판공실 부주임으로 일했다. 1985년에는 재정국 부국장으로까지 승진하기에 이른다.

이때 그는 평생의 정치적 은인인 시 주석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시 주석이 첫 임지인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에서 서기를 마치고 푸저우 부시장으로 내려온 것이다. 두 살 터울의 직속상관과 부하는 만나자마자 바로 의기투합했다. 둘 모두 젊을 때라 종종 며칠씩 통음을 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둘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공유하고 있다. 때는 1986년의 여름이었다. 당시 결혼과 거의 동시에 이혼한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던 시 주석은 주변 지인으로부터 펑리위안(彭麗媛. 61)이라는 당대 최고의 유명가수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둘은 진지한 만남을 가지고 결혼을 약속한다.

이어 이듬해 9월 1일 결혼에 골인하기에 이른다. 당시 허리펑 부총리는 이 둘의 교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시 주석에게 결혼까지 권했다.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결혼식에 필요한 개인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최대 귀빈 중 한명으로 참석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둘은 그러나 1988년 시 주석이 푸젠성 닝더(寧德)시 서기로 영전하면서 3년 동안의 인연을 뒤로 한 채 일단 헤어지게 된다. 이후 허 부총리는 샤먼시 부시장, 취안저우(泉州)시 서기를 거쳤다. 이 기간 모교인 샤먼대학에서 재정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도 취득했다.

취안저우 서기를 마친 2000년 그는 드디어 푸젠성의 성도(省都)인 푸저우(福州)시 서기로 이동하는 기회를 잡았다.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귀인 시 주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 주석이 푸저우시 서기를 거친 다음 그대로 눌러앉아 푸젠성 부서기와 성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은 이렇게 무려 12년 만에 다시 상사와 부하로 만나 재회를 할 수 있었다. 이후 시 주석이 저장(浙江)시 부서기와 성장으로 영전될 때까지 3년여 동안 다시 환상적인 호흡을 맞출 수 있었다.

시 주석과 눈물의 이별을 한 후 그는 다시 오랜 기간 제2의 고향 푸젠성에서 지방 관료로 계속 활약했다. 이력으로 볼 때 푸젠성을 떠날 기회는 찾지 못할 듯했다. 그러나 정치적 은인인 시 주석이 2007년 국가부주석으로 승진하면서 차기 당정 최고 지도자로 유력해지자 상황은 갑자기 달라졌다. 그의 배려로 2009년 일거에 톈진(天津 )시 부서기로 영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 주석이 대권을 잡은 2012년 이후 그의 앞길은 더욱 탄탄대로가 됐다. 톈진시 정협(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을 거친 다음인 2017년에는 국가발전개혁위원회(장관급) 주임으로도 발탁됐다. 2022년 24명이 정원인 당 최고 권력기관 정치국에 입성, 위원이 된 후 올해 3월 경제 담당 부총리로 승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시 주석과의 인연으로 승승장구했다는 평가가 있는 사실로만 보면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당한 능력도 갖추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시 주석이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으로 있으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 추진력이 대단하다는 사실까지 더한다면 그는 경제 부총리로 전혀 부족하지 않다고 해야 한다.

현재 중국은 상당히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단언해도 좋다.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 5%를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의 앞에 경제 난국 타개라는 절체절명의 임무가 부여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보인다.

만약 현재의 난국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경우 그는 캐리어에 치명적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자리를 보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거의 영웅이 돼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 것으로도 전망된다. 경제 난국 타개의 해결사를 단순히 자임할 것이 아니라 실적을 내야 한다는 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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