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는 어제의 것이다"
진리 탐구하는 구도자의 자세, 경건하고 치열한 삶 살아
헌법과 법철학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 보여

로엘레케 교수가 2011년 10월 30일 칼스루헤 볼파츠바이어에서 별세하였다. 오늘은 그의 12주기가 되는 날이다. 필자는 독일 만하임대 은사(Doktorvater)인 로엘레케 교수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의 삶과 학문세계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뉴스퀘스트=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 로엘레케 교수(Prof. Dr. Gerd Roellecke)는 1927년 7월 13일 이셀론(Iserlon)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만하임 법대에서 평생을 봉직하고 정년퇴직한 후에도 학자의 삶을 영위하다가 2011년 10월 30일 84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1996년 11월 경희대 법학연구소 국제학술세미나에서 로엘레케 교수(오른쪽) 교수가 발표하고, 제자인 필자(가운데)가 통역하고 있다.[사진=김용섭 교수]
1996년 11월 경희대 법학연구소 국제학술세미나에서 로엘레케 교수(오른쪽) 교수가 발표하고, 제자인 필자(가운데)가 통역하고 있다.[사진=김용섭 교수]

2011년 11월 3일자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이하 “FAZ”이라 한다)의 부고 기사에는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복잡성과 민주주의(Komplexität und Demokratie)’의 역설적 모토를 실었다.

즉,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바꿀수 없다(Alles könnte anders sein. aber fast nichts ich kann ändern)”. 2012년 AöR에 키르스테(Stephan Kirste)가 쓴 ‘로엘레케의 죽음에 관하여(Zum Tode von Gerd Roelleck)’라는 제목의 장문의 추도사(Nachruf)가 있다.

또한 JZ 5/2012에 데펜호이어(Otto Depenheuer) 교수가 “로엘레케 교수와 함께 독일의 국가법이론은 가장 독특하고 독창적이며 창의적인 두뇌를 잃었다”라는 말로 시작한 ‘법의 관찰자- 로엘레케(Ein Beobachter des Rechts- Gerd Roelleck)’라는 제목의 추도사가 있다.

로엘레케 교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16세의 나이인 1943년에 징병되어 군인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194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하여 학문과 지식에 대한 갈증이 남달랐다.

로엘레케 교수는 1948년부터 1952년까지 뷔르츠부르크 대학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그후 뒤셀도르프에서 사법관 시보와 제2차 국가시험을 합격하여 법조인 자격을 취득하였다.

1960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돌아와서 ‘연방헌법재판소의 사법권의 내재적 한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박사학위 논문의 도움으로 그는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칼스루헤에 있는 연방헌법재판소 라이프홀츠(Gerhard Leibholz) 재판관 밑에서 헌법연구관(Mitarbeiter)으로 일했다.

1969년 그는 마인츠 대학에서 ‘실정법과 기본법률의 개념’이라는 제목으로 교수자격 논문인 하빌리타치온을 썼다. 같은 해에 그는 만하임 대학의 홀러바흐(Alexander Hollerbach) 교수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정년퇴직할 때까지 공법 및 법철학 연구소의 소장으로 활동하였다.

로엘레케 교수는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만하임대학 부총장,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서독 대학총장협의회 회장, 1974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학술연구재단(DFG) 부회장, 1982년부터 1985년까지 만하임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1995년 여름에 정년퇴임한 후에도 2001년까지 슈파이어 행정대학원 공공행정연구소 연구자문위원회 위원과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의 주된 학문적 연구의 경향은 법철학과 공법 분야로, 특히 헌법과 법철학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헌법 국가에서의 권력 분립과 제한, 헌법재판소의 역할, 법관의 지위와 법의 기능,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 현실적이고 시사적인 헌법문제에 중점을 두었다.

다수의 저서와 300편이 넘는 논문과 칼럼 및 서평은 법학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철학적, 역사적 그리고 사회학적 관점 등 다양한 각도에서 고찰하고 있다. 로엘레케 교수의 학문세계는 다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로엘레케 교수는 2011년 10월 30일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사진=김용섭 교수]
로엘레케 교수는 2011년 10월 30일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사진=김용섭 교수]

첫째로, 로엘레케 교수의 법철학은 헤겔과 루만의 영향을 받았다.

법철학자로서 로엘레케 교수는 철학자로서의 헤겔의 변증법과 이론가인 루만의 사회체계이론의 영향을 받았으나, 로엘레케 교수는 이들과 달리 체계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로엘레케 교수는 루만의 영향을 받아 법, 도덕, 종교의 분리성을 유지하면서 사회의 복잡성을 단순화하여 설명하는데 역량을 발휘하였다.

로엘레케 교수는 1988년에 ‘연구의 길(Wege der Forschung)’ 664권 ‘법철학인가 법이론인가(Rechtsphilosophie oder Rechtstheorie?)’ 라는 저서를 남겼다. 2011년에 ‘법도그마틱과 이론의 구별에 관하여(Zur Unterscheidung von Rechtsdogmatik und Theorie)’라는 논문에서 헤겔과 루만의 개념을 예로 들어 논증하고 있다.

이 논문은 자신의 법철학을 종합 정리한 주목할 만한 내용으로 생전에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 투혼을 불태우며 원고를 완성하여 JZ에 기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로엘레케 교수의 저술은 ”그가 사회 발전에 대한 예리한 분석가이자 법학, 법철학 및 법이론에 대한 간결하고 비판적인 관찰자임을 증명한다“ 고 만하임 대학의 공법 및 법철학 연구소 소장인 크레머(Hans-Joachim Cremer)교수는 말한다.

로엘레케 교수가 평생 동갑의 사회학자 루만의 학문적 세계에 영감을 받고 그를 매료시킨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바꿀수 없다.” 라는 역설적 표현을 법학의 화두로 삼아서 법학자의 삶을 지속해 왔다.

둘째로, 로엘레케 교수는 공법 특히 헌법과 행정법학에 깊이 있는 주목할 만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1969년에 마인츠 대학에서 하빌리타치온을 작성하고 만하임대 교수로 임용된 후 1972년에 “행정법의 기본 개념. 사례를 기반으로 한 소개”를 Kohlhammer 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로엘레케 교수는 1974년 10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개최된 제34회 독일 국법학자대회에서 ‘법관의 법률과 헌법에 대한 구속’이라는 제목하에 제1발제자로 참여하여 발표하였다. 당시 제2발제자는 스타르크(Christian Starck) 교수가 맡았다. 참고적으로 당시 행정법의 주제는 ‘행정책임과 행정재판권’으로 제1발제자는 숄츠(Rupert Scholz) 교수이다. 제2발제자는 아쓰만(Schmidt Assmann) 교수가 참여하여 발표하였다.

로엘레케 교수는 독일 통일에 관한 논문을 여러편 작성하였다. 그는 “동독은 불법국가이었나?(War die DDR ein Unrechtsstaat?)”라는 2011. 7. 28. 자 FAZ의 칼럼에서 동독의 SED를 현대 헌법국가의 의미에서 정당이 아니며, 나치정권과 마찬가지로 동독은 권력분립에 대한 거부, 대중 동원, 인격숭배의 체제이므로 불법국가로 파악하고 있다.

로엘레케 교수의 정년을 맞이하여 데펜호이어 교수가 편집한 “계몽된 실증주의(Aufgeklärter Positivismus)- 헌법 국가의 전제 조건에 관한 선정된 문헌”을 Möller 출판사에서 1995년에 간행하였다. 정년퇴직 이후에 로엘레케 교수는 "연방공화국의 정체성"과 정당을 다루는 독일 기본법 제20조와 제21조에 대한 해설서를 기술하였다.

또한 로엘레케 교수는 교육행정에 전문적 식견을 갖추었으며 대학의 자치를 위해 공헌하였다. 로엘레케 교수는 만하임대 부총장과 총장을 역임하면서 만하임 상과전문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명문대학으로 성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교육행정 분야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고 대학의 역사나 교육행정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로엘레케 교수는 1982년 만하임대 총장의 취임하면서 총장직이 연구의 직이지 행정직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고, 훔볼트의 전통적인 대학관에 기초하여 재정이나 프로그램의 차원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오늘날 철학은 왜 여전히 존재하는가”라는 명제를 던졌다.

만하임 대학에서 로엘레케 교수는 경제행정법 강의를 하였고, 로엘레케 교수는 제자를 많이 양성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인 스토버(Rolf Stober)교수는 로엘레케 70주년 기념논문집에 이슨제(Isensee), 파블로프스키(Pablowski) 등 다양한 분야의 저명한 집필자의 원고를 모아 “법과 법(Recht und Recht)”이라는 역설적이며 흥미로운 제목으로 편집하여 그의 스승인 로엘레케 교수에게 헌정하였다.

셋째로, 보수 성향의 로엘레케 교수는 시대적합적 주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그만의 독특한 논리로 전개하는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마운즈(T. Maunz) 교수의 정치적 스캔들에 대한 해법을 진보 성향의 학술지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인구감소문제, 통일의 문제, 환경문제 등에 관하여 독특하면서 창의적인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파트릭 바너스(Patrick Bahners)가 2004년 편집하여 발행한 “프로이센 스타일, 예술품으로서의 국가(Preußische Stile. Ein Staat als Kunststück)”를 Klett-Cotta 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아울러 로엘레케 교수가 2007년 5월 9일 베를린 법학회에서 행한 강연의 개정판을 “종교–법 –문화 그리고 시스템의 특이성” 이라는 제목으로 De Gruyter 출판사에서 발행하였다.

로엘레케 교수는 인구문제에 관한 논문에서는 인구감소가 위험한 부분인데 이 문제는 본국으로의 이민이나 출생률의 증가로 해소할 수 있다고 하면서 출생률의 증가는 국가가 개인의 사적 내밀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데 이러한 내밀의 영역은 개인의 주관적 권리로 국가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고 있다.

아울러 독일인의 인구감소 문제와 관련한 논문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전제하에 저출산 문제를 환경보호 특히 종의 보호의 관점에서 부부가 두자녀 이하로 출산하게 될 경우에는 반달족처럼 독일 인종이 지구상에서 멸종될 수도 있다는 독특한 논거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넷째로, 로엘레케 교수는 저널 편집인의 경험을 살려 각종 신문 매체에 서평 등을 기고하였으며 전쟁학과 전쟁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로엘레케 교수가 1962년에 아일랜드 정치인 윌리암 제랄드 해밀턴(William Gerald Hamilton)의 ‘의회의 논리(Parliamentary Logic)’을 독일어로 번역 편집한 “대화의 논리(Die Logik der Debatte)”를 초판 발행한 이래 1991년에 제4판을 Sauer-Verlag에서 발행하였다.

로엘레케 교수는 1960년대 초반 무역 저널 "경영-컨설턴트(Der Betriebs-Berater)"의 편집 조수, 그리고 편집인으로서 출판계의 편집기법 등을 익혀 훗날 FAZ에 쓴 수많은 논픽션 비평에 활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로엘레케 교수의 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평론가인 로엘레케 교수의 리뷰의 글은 독자들을 매료시켜 독자로 하여금 흥미진진하게 책을 읽도록 한 반면에 책을 저술한 동료들은 살살해 달라고 할 정도로 엄정하게 비평하기도 했다. 로엘레케 교수의 평론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다분히 계몽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2013년에 로엘레케 교수가 생전에 작성한 글을 모아 2편의 단행본이 발간되었다. 하나는 로엘레케 교수가 1963년 7월 29일부터 2011년 10월 20일 까지 FAZ에 기고한 칼럼 등을 데펜호이어 교수가 편집한 ‘헌법 미니어처- 시간의 질문에 대한 입장’을, 다른 하나는 파트닉 바너스(Patrick Bahners)가 편집한 ‘리뷰속에서의 학문의 역사’가 각각 Mohr Siebeck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로엘레케 교수와 필자가 해인사를 방문 기념 사진을 찍었다.[사진=김용섭 교수]
로엘레케 교수와 필자가 해인사를 방문 기념 사진을 찍었다.[사진=김용섭 교수]

로엘레케 교수는 특히 법학자자 별로 관심을 안 기울이는 전쟁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클라우제비츠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6세의 나이에 군인으로 전쟁터에 소집되어 포탄을 운반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야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서 다소 늦게 대학에 진학할 수 밖에 없었다.

로엘레케 교수는 전쟁학과 관련한 깊이 있는 논문을 학술지에 기고하였다. 1995년에 ‘국가(Der Staat)’라는 학술지에 ”무장된 병력의 외국참전- 전쟁, 대외정책 또는 국내정치?: 헌법개정적 결정“ 이라는 논문을 작성했고, 2009년에 전문학술지 국가법과 정책(Staatsrecht und Politik)에 ”전쟁과 테러: 외부에서 고찰한 비대칭적 투쟁”을 작성하였고, 2011년 ‘국가’라는 학술지에 로엘레케 교수는 ”전쟁법, 전쟁문화 그리고 전쟁개념-비대칭적 전쟁의 문제에 관하여“라는 주목할 만한 논문을 남기고 있다.

로엘레케 교수의 법학 논문은 단순히 규범적 차원에서만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역사적 그리고 사회학적 접근을 하면서 형식의 풍부한 다층성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로엘레케 교수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한 방법으로 비대체적이며 독특한 논거를 제시하면서 강력히 자신의 논조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로엘레케 교수는 생각이 심원하고 유교와 불교 등 동아시아의 문화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한자의 사람을 뜻하는 ‘인(人)’이라는 글자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Mitmensch)’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만하임대 총장 등 화려한 경력에도 매사에 겸손하면서 예의를 지키며 타인을 배려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아이처럼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지적 호기심, 해박하고 명료한 표현, 독특한 문장 스타일은 로엘레케 교수로부터 배워야 할 덕목이다. 로엘레케 교수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구도자(求道者)의 자세로 경건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다. 끝으로, 인생과 학문의 스승인 로엘레케 교수를 추념하며, “모든 텍스트는 어제의 것이다(Alle Texte sind von Gestern)”라는 로엘레케 교수의 말을 떠올려 본다.

◆ 김용섭 박사 프로필

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 경희대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
-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 졸업 (법학석사)
- 제26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16기 수료
- 독일 만하임대 대학원 졸업 (법학박사)
- 법제처 행정심판담당관
- 한국법제연구원 감사
- 법무법인 아람 구성원 변호사
- (현) 전북대 법학전문대학교 교수, 변호사
- (현) 국회 입법지원위원, 대한변호사협회 법제위원회 위원
- (현) 한국행정법학회 회장, 한국조정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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