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풍호반의 가을'...누런 황금색과 청명한 파란색, 완연한 가을의 색깔
'동트는 백두산'...어서 일어나 노을 감상하라고 물안개와 구름바다가 봉우리를 서둘러 깨우는 듯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목장의 아침 (200호 2006년)
목장의 아침 (200호 2006년)

▲목장의 아침(100호 2006년)

이 그림은 황해도가 고향인 작가의 '장수산' 산자락에 펼쳐진 고향마을의 신비롭고 낭만적인 목가적 풍경을 형상화하였다. 장수산은 황해도의 금강산으로 불리운다. 산기슭에 호수를 끼고 있는 듯한 이런 아늑하고 평화로운 경관을 앞마당처럼 품고 있는 모습은 금강산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장수산의 비경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침햇살이 환하게 비치고 강가의 운무가 걷히면서 내려와 쉬었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천사들의 옷자락이 낮게 깔린 구름으로 형상된 듯도 하다. 온통 푸른빛(초록빛과 파란빛)만이 감돌면서도 서늘하게 느껴지지 않고 시원 찬란한 전원 풍경이다. 참으로 동화 속에서나 펼쳐진 것 같은 이상향의 고향 풍경을 모노톤의 실경에 바탕을 두면서 푸근하고 정감어리게 풀어내었다.

1970년부터 만수대창작사 벽화창작단 단장을 맡아왔던 작가는 북한의 대부분 지하철 역사의 대규모 벽화에 대한 주제화 작업을 대대적으로 진두지휘하였다. 그는 이러한 직업적인 화업 외에는 현실 속의 극락세계와 같은 농촌의 행복하고 서정적인 풍경을 묘사하는 그만의 독특한 화폭을 펼쳐낸다. 한없이 평온해 보이는 젓소 떼와 가족들이 모여사는 듯 정겹게 나란히 붙어있는 두 집들은 초자연과 인간세상의 조화와 접목을 짜임새 있게 구성해내고 있다.

마치 딴 세상의 낙원같은 황홀경의 세계로 만들어내는데, 이런 곳이 자신이 살던 마을이어서 언제든 마음의 안식처로 남아 연어처럼 거슬러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이 배어 있다. 누구라도 이 그림 속 경관을 보면서 ‘아! 가보고 싶다. 저기서 살아보고 싶다.’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오는 최고로 신비로운 풍광이 아닐 수 없다.

연풍호반의 가을(30호 2003년)
연풍호반의 가을(30호 2003년)

▲ 연풍호반의 가을(30호 2003년)

그림 속 풍경에는 가을의 색깔이 완연하다. 누런 황금색과 청명한 파란색이 가을의 대표성을 띠고 시원한 대각선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황금 들판, 금빛 과실수와 볏짚단들, 그리고 누렁이 황소는 가을 땅의 전령을 자임하고 가을이 다할 때까지 그 풍요로움을 비추는 발광체가 되어줄 것이다.

시원 상큼한 바람이 불어와 일렁이는 호반의 잔물결과 겹겹이 포개진 산맥 속으로 내리쬐는 푸른 햇살 속에서 익어가는 울긋불긋한 단풍의 색채미는 시절의 주인공임을 알려주는 표상이 되고 있다. 빨려들 것만 같은 그림 속의 경치가 비단 마음속에 그리던 시각적 환영이 아닌 현실 속에 무르녹아 반복해 찾아오는 일상의 풍경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을볕에 고추를 말리는 모녀는 소와 함께 귀가하는 아버지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훈훈한 인간미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신토불이 토양 속에서 만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색채의 친숙은 땀흘리며 부대끼고 부둥키면서 서로 즐거워하고 격려하게 될 운동 경기와 함께 가장 주요한 문화적 가교의 앙상블이 될 것이다.

리종원의 연풍호반의 가을 색깔은 북한과 우리의 문화적 담벼락 경계를 허물기에 충분한 너무도 한민족적인 색채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남북한간 단절의 패인 골은 스포츠와 미술 분야의 교류와 접목으로 인해 가장 빨리 메워지고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게 다가온다.

또한 남북한간 고려 유적의 공동 발굴이나 우리말 큰사전 공동 편찬 같은 학문적 사업들도 서로 손을 내밀기에 전통적으로 익숙한 분야이다. 하지만 상호간 신뢰와 호의가 전제되어야 의기투합이 가능해짐은 보편적 상식이고 자명한 이치이다.

동트는 백두산(60호 1995년)
동트는 백두산(60호 1995년)

▲ 동트는 백두산(60호 1995년)

백두산 향도봉의 해돋이 노을이 황홀한 빛세례를 뿌리고 있다. 노란색과 주황색 노을의 색 파장과 번짐은 신(神)이 그리는 스푸마토(레오나르도다빈치가 즐겨 사용한 화법 - 문질러 번지게 하여 색 혹은 선 사이의 경계를 두루뭉스리 뭉게뜨리는 테크닉) 기법으로 새벽녘이 막 시작되는 시점의 노을을 묘사하고 있다.

조금 더 날이 밝으면 파란색과 붉은색 기운의 노을들이 뒤섞이는데, 지금은 따뜻한 난색 계열의 노을빛만 눈부시게 천지간을 뒤덮고 있다. 이 멋진 노을들을 어서 일어나 감상하라고 천지의 물안개와 보랏빛 구름바다가 벌떡 일어서서 백두산 봉우리들을 서둘러 깨우고 있는 장관이다.

따뜻한 노을빛은 화판 앞으로 달려나올 듯 거침없이 확장세를 뻗어가면서 화면 맨 앞에 돌출된 자그마한 산언덕마저 환하게 빛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이 언덕은 고개를 치켜 세우고 작가와 함께 이 노을빛 파노라마 쇼의 동선을 주시하며 넋을 잃고 감상에 빠져들고 있다. 향도봉을 안팎의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리는 이 부분 구도는 백두산 천지를 품은 백두산 전체 구도의 그림을 제외하면 북한 화가들이 가장 즐겨 그리는 백두산의 부분도가 아닌가 싶다.

불그스름한 노을빛 색상의 구름바다 위를 유영하는 고래상어의 지느러미처럼 삼각형으로 불쑥 솟아오른 구도의 리종원 백두산은 1998년 정영만의 백두산에서 훨씬 더 강렬하게 화산 폭발 직전에 용광로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시뻘건 불덩어리의 화폭으로 진화한다.

향도봉의 바깥쪽 면은 완성된 매끄러운 조각석처럼 보이는데 비해, 안쪽 면은 마치 조각가가 정으로 내리쳐 깍고 다듬는 과정에 있는 미완성의 원석처럼 보인다. 그런데 향도봉의 바깥쪽 면에는 ‘혁명의 성산 백두산 김정일’이라고 커다란 글씨가 씌어 있다.

다른 산의 바위 글씨 새김은 자연에 대한 심각한 훼손의 표상으로서 흉물스럽다는 비난을 받지만, 백두산 바위의 글씨는 북한 입장에서 나름의 절실함이 담긴 상징적 표현이라는 주장에 대해 일고해볼 필요가 있다. 북한과 중국이 백두산의 국경과 개발권에 대한 신경전을 겪어오는 과정에서 북한이 기선 제압용의 쐐기를 박는 행위로서 이런 커다란 글씨를 새겨 넣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중국이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호칭하고 백두산의 대부분을 자기네 영토라고 우겨왔던 전례가 있는 상황이어서 북한쪽 입장에서 보면 글씨 새김이 하나의 영역 표시와 같은 말뚝을 박은 행위라고 간주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와 발해가 획정한 우리 강토에 대한 역사를 제외한다면 고려 시대 이래로 백두산 주변 영토는 지금의 중국 땅에서 일어난 여진과 거란족 등 이민족과 일진일퇴의 밀고 밀리는 강역이었다.

고려의 외교관 서희가 거란 장군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평양과 백두산 부근 사이의 강동 6주 땅을 비로소 요나라로부터 우리땅으로 확약받은 사례와 조선 숙종 때 백두산 정계비를 기준으로 한 청나라와의 영토 획정 문제 등은 중국에서 명멸한 여러 왕조들과의 북방 영토 공방이 얼마나 치열하게 지속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의 저서인 '북한-중국 국경: 역사와 현장'에서 발췌한 내용을 곰곰이 음미해 보면 북한이 중국에 백두산의 반을 헌납했다는 세간의 평가가 사실과 다름을 이해할 수 있다. “1962년에 북·중 국경획정의 과정과 결과를 영토적 득실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북한이 더 많은 이익을 챙겼다. 양측은 백두산 천지를 반분하기로 했지만, 실제 국경선 획정 과정에서 천지 총면적의 54.5%가 북한 경내에 속하게 됐고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중소분쟁 과정에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아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국경획정 이후 중국에서는 북한에 너무 많은 양보를 한 것 아니냐는 불만이 있었고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조선족 지도자들이 국경문제로 홍위병들에게 수난을 받은 사실도 이를 반증한다. (중략) 만약 북중간 갈등이 치열했던 문화대혁명 시기에 국경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분쟁상태로 남아 있었다면 이것이 양국의 갈등에 기름을 부었을 것이고 이후 북중관계도 다르게 전개됐을 가능성이 높다.”

리종원 화가 
리종원 화가 

◇ 리종원(1934년~작고?)은 누구인가?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리종원에 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발췌 요약한다. “리종원은 초기 평양학생소년궁전 중앙홀에 쪽무이벽화(여러가지 색깔의 자기나 돌, 유리, 조개, 나뭇조각 따위를 벽에 박거나 붙여서 만든벽화) <해돋이(63년)>, 수채화 <문주담(64년)>, <모란봉>, 유화<청벽류(64)>, <선죽교(64)>, <묘향산(64년)> 등 풍경화와 벽화들을 창작하였다. 그가 만수대창작사에서 벽화창작을 조직하고 지도하던 1970년대는 북한에서 벽화의 새로운 시원이 열리던 때였다.

만수대창작사 벽화창작단에서는 평양지하철도가 본격적으로 건설되는데 따라 역내부를 장식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진행하였다. 1970년에 벽화창작단 단장으로 임명된 그의 어깨 위에는 참으로 무겁고 아름찬 과업이 제기되였다. 벽화창작에는 만수대창작사의 전체 일군들과 미술가들, 로동자 그리고 평양시의 미술가들과 군인들까지도 작업에 참가하여 6개 역의 벽화를 완성하였다.

이 벽화형상들에는 초안으로부터 완성단계에 이르기까지 제기되는 모든 사업을 맡아 집체적 지혜와 힘을 발동하여 풀어나간 리종원의 공로가 크게 깃들어 있다. 그는 벽화의 내용을 비상히 높이고 쪽무이, 물유리, 회벽, 색부각 등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에 의한 전례없는 규모와 형상의 밀도로 일찌기 보지 못한 굴지의 대형벽화를 창조하여 북한 벽화 문화를 만드는데 공헌하였다.

그는 북한 벽화 예술분야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조선미술가 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두차례에 걸쳐 이전 쏘련과 로므니아를 방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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