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잠룡으로 평가되는 중국 최고 명문 칭화대학의 왕시친 총장. 칭화대 내에서는 행정 능력과 리더십을 두루 갖춘 천재형 학자로 손꼽힌다.[사진=신화(新華)통신]
미래의 잠룡으로 평가되는 중국 최고 명문 칭화대학의 왕시친 총장. 칭화대 내에서는 행정 능력과 리더십을 두루 갖춘 천재형 학자로 손꼽힌다.[사진=신화(新華)통신]

【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중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학벌주의나 교육열이 상상을 초월한다. 굳이 구구한 사례들을 많이 들어볼 필요도 없다. 명문대학 입학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역에 자리 잡은 전국의 주택들이 이른바 호가(呼價)가 바로 값이라고 해도 좋을 세취팡(學區房)으로 불리는 사실을 우선 거론해도 좋다. 세계적 명문이기도 한 베이징, 칭화(淸華)대학의 재학생이나 졸업생들이 쉐바(學覇), 한국식으로 말하면 학력 깡패로 통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둘 중 그래도 조금 더 나은 곳을 꼽으라면 역시 칭화대가 아닌가 싶다. 수험생들이 비슷한 가오카오(高考. 한국의 수능) 성적을 올리더라도 입학하기가 베이징대보다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학교 전체가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을 들어도 괜찮을 만큼 진짜 인재들의 보고 내지는 산실이라는 말이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당연히 이들을 가르치는 교수진들도 보통이 아니어야 한다. 학교의 수장인 총장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뛰어난 능력과 존경받을 만한 인격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쉐바 집단의 선장 노릇을 하기 어렵게 된다. 중국 교육 당국이 이 당연한 진리를 깊이 인식하고 총장 인선에 늘 장고를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지 않나 싶다. 다행히도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된 이후 크게 잘못된 인사는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의 총장인 왕시친(王希勤. 55) 박사 역시 마찬가지라고 단언해도 좋다. 아직 총장에 취임한지 채 2년이 되지 않았으나 중국의 미래를 담보해줄 국보급 학교를 무리 없이 잘 이끌어가고 있다. 특별한 문제가 없을 경우 앞으로 최소한 수년 동안은 더 현직에서 인재들을 양성하는 본연의 임무를 다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국의 당정 직급으로는 부부장(차관)급에 해당하는 그는 장쑤(江蘇)성 타이(泰)현에서 문화대혁명이 한참 대륙을 휩쓸던 때인1968년 태어났다. 지금은 아니나 당시만 해도 완전 깡촌 출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에만 진학해도 지식인 소리를 듣던 곳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의 부모와 친척들 극히 일부 역시 그랬다. 그러나 천재형인 그는 그 정도 레벨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전 장쑤성에서 인정을 받던 인재로 손꼽혔다. 중학에 입학한 이후부터는 전 성에서 매년 10명 이내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 베이징, 칭화대 입학생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예상대로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중고교 6년 내내 전 성 수석을 놓치지 않은 여세를 몰아 1986년 칭화대 전자공학과에 가볍게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의 성적은 더욱 우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동기생으로 칭화대에서 같이 공부했던 개입 사업가 한원(韓文) 사장의 평가를 들어봐야 할 것 같다.

“왕 총장은 입학할 때부터 남달랐다. 장쑤성에서 대단한 천재가 왔다고 학교에서도 기대를 할 정도였다. 입학생 모두가 자기 잘난 맛에 사는데도 그랬다. 학교의 안목은 진짜 틀리지 않았다. 타고난 천재다웠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왕 총장은 군계일학처럼 재학 기간 5년 내내 주위의 감탄을 자아내고는 했다. 단순히 성적이 기가 막히게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변 동창들은 다들 그가 창의력 분야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처럼 전국구 에이스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그는 졸업 직후인 1991년 9월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듯 파격적인 행로를 걷게 된다. 교수들의 추천으로 중간 단계를 생략한 채 바로 전자공학과 박사 과정에 진학한 것이다. 5년 후에는 가볍게 학위도 취득했다. 나이 고작 28세 때였다. 봉건 시대 스타일로 표현할 경우 소년 급제를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장쑤성의 이름 모를 깡촌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30세 이전에 박사가 됐으나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학위 수여식을 마치자마자 바로 미국에서 포스트닥터 코스를 밟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은 그래서였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도교수를 비롯한 모교 스승들의 생각은 그와는 많이 달랐다. 굳이 미국에 가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그에게 학교에 그대로 남아 교수가 될 것을 권유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 스승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38세 때인 2006년에 전자공학과 학과장에 오르고 4년 후에는 정보과학기술학원의 부원장에까지 승진하는 승승장구의 행보를 시작한다. 이어 2년 뒤에는 인사처장과 인재자원개발판공실 주임까지 맡아 기업 스타일로 말하면 경영 수업도 병행하게 됐다.

2016년 2월에 부총장보가 된 것은 10개월 후 부총장 자리에 오르기 위한 당연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2022년 2월에 마침내 대망의 총장이 된 것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나 보인다.

주변과 언론의 평가를 종합할 경우 그는 기본적으로 학자라고 해야 하나 행정적인 능력도 뛰어나다고 해야 한다.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계속 보직을 맡은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천재형 인재들에게 부족하기 쉬운 리더십도 상당 수준으로 키울 수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에게도 부족한 점은 있다고 해야 한다. 학교 밖의 경험이라고는 올해 진입한 제1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한국의 국회에 해당)에서 상무위원으로 활동한 것 외에 거의 없다는 사실은 역시 약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더구나 이 자리도 칭화대학 총장의 자격으로 얻은 당연직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경우 더욱 그렇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불후의 진리가 있다. 그도 행정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검증된 만큼 정치적으로 전격 발탁이 되면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2015년 초까지 3년 동안 칭화대 총장으로 재임한 바 있는 전전임인 천지닝(陳吉寧. 58) 상하이(上海)시 서기가 환경보호부 부장(장관), 베이징 시장을 거치면서 정치인으로 일거에 욱일승천한 케이스를 보면 그라고 비슷한 행보를 걷지 말라는 법도 없다.

실제로 칭화대 선배인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겸 국가주석에 의해 조만간 발탁될 것이라는 소문도 무성하다. 만약 예상이 현실이 될 경우 그 역시 중앙부처의 부장으로 이동한 다음 국가급 지도자가 충분히 될 수 있다.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는 칭화대 동문들의 파워를 감안하면 그래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다. 여기에 최근 당정의 인재 풀이 시 주석이 강력 추진하는 ‘부패와의 전쟁’에 따른 최고위급들의 속속 낙마로 얇아지고 있는 현실까지 더할 경우 더욱 그렇다고 해야 한다. 그가 최근 부쩍 미래의 잠룡으로 뜨고 있는 것은 역시 괜한 게 아니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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