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에'...가을과 추석의 많은 장면을 화폭에 담아내
'파도'...원색의 색채 미학이 불을 내뿜어
'고향집'...남과 북이 다를 바 없는 옛 고향집 정경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봄 소나기(60호 2007년)
봄 소나기(60호 2007년)

▲봄 소나기(60호 2007년)

이 그림은 황순원의 1959년 국민 명작소설 소나기가 연상되는 감미로운 작품이다. 문학을 사랑한 최동수 화가는 소나기 내리는 봄날의 정서에 흠뻑 젖어들면서 화폭에 소설 속 소나기의 하이라이트를 착안하고 이를 각색해 펼쳐 놓은 연출자이기도 하다. 청년과 처녀의 수수하고 풋풋한 사랑의 교감이 동화 속의 삽화에서 봄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중이다.

처녀는 개울 건너 저멀리 고래등 같은 성루를 바라보며 물이 불어난 징검돌을 과연 걸어서 건너갈 수 있을까를 근심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총각도 밭에서 호미를 든 채 김을 매다 수양버들 밑으로 소나기를 피하던 중 처녀와 만났으나 아직 서로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고 있는 호기심 어린 형국이다. 총각의 여인을 향한 관심 집중의 눈동자는 등을 돌리며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처녀의 무심한 듯한 응시와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회색빛 하늘과 노란색 광선이 교차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아직 소나기가 내린지 얼마 안되는 초기인 것 같다. 가녀린 분홍빛 매화가 봄처녀처럼 바람에 한들거리면서 화폭의 전면을 부드럽게 살리며 맵씨있게 입체감이 돋보이는 수를 놓고 있는 듯하며, 무성한 수양버들잎은 바람에 휘날리는 사자의 갈기처럼 총각의 마음을 두근두근 울리며 요동을 일으키고 있음을 은유하고 있는 형상이다.

구도의 정 중앙에 위치한 근경의 우뚝 솟은 나무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남녀, 그리고 그들을 살포시 감싸 안고 있는 매화꽃잎들은 환상적인 영화 속 정지된 영상미를 선사해 주고 있다. 수양버들의 초록빛과 처녀의 치마색 그리고 초봄의 싱그러운 풀빛은 봄기운이 하늘에서 대지로 기운차게 전달되고 있는 느낌을 안겨 준다. 처녀의 분홍색 저고리와 한창 피어나는 매화꽃잎의 화사한 분홍빛은 같은 염색을 한 듯한 색채미의 일체감이 은은히 배어 나오고 있다.

원경의 옅은 하늘빛과 희미한 배경 속 형상 윤곽들은 유화의 느낌보다는 조선화의 간결한 화풍과 산뜻한 질감을 여운 있게 깔아놓고 있다. 유화와 조선화를 자유자재로 넘나든 화가의 다재다능함이 상황에 매끄럽게 조화되어 유화와 조선화적인 포인트가 요소마다 녹아들고 스며든 느낌이다. 하늘이 울렁이며 너울거리고 있는 듯 생동감이 퍼져나가면서 배경의 상단에서부터 소나기와 어울리며 역동적인 공간미를 창출하고 있다.

빗살무늬처럼 내리는 소나기는 수양버들 잎새들을 빗질하듯 쓸어 내리며 살아 꿈틀거리는 생생한 현장감을 고취하고 있다. 이제 막 빗물이 고이기 시작한 흙바닥은 촉촉한 흙냄새를 물씬 풍기며 질퍽한 땅의 감촉이 질펀하게 느껴진다. 중경의 오른쪽 자주빛 토지로부터는 왕성한 기운이 피어오르며 강렬한 색채미가 발산된다. 좌측의 강줄기에서는 강물이 불어나고 물살의 흐름이 세지는 가운데 외로운 사나이가 위태롭게 징검 돌다리를 건너고 있어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원로화가가 서정미 넘치는 소설 속 삽화같은 이러한 낭만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창출해낸다는 것은 맑고 고귀한 심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그림은 책무감 속에서 전투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선전화를 그리는데 몰두하는 북한의 풍토만을 염두에 두는 감상자들에게는 무척 낯설은 유형의 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예전의 궁정화가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권 화가에게는 그들의 예술세계에 있어 정치 사회적인 주문 그림을 그리는 직업적인 측면과 마음 속 그대로가 투영되어 예술적인 감흥에 이끌리는 내면적인 면모가 동시에 작동함을 우리는 주시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입견의 노예가 되어 자신만만하게 북한의 예술은 형식적이고 천편일률적일 뿐만아니라 비인격적이고 감동이 거세된 도식만이 자리한 무미건조한 예술이라고 판단하기 쉽다. 그들의 진실에 접할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 국가가 갖추고 있는 다양한 세계에서 정치적인 암운이 모든 현상에 그늘만을 드리울 수는 없다. 인간이 순수한 영혼을 희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해주고, 맑고 고운 심성을 되찾게 해주는 역할을 선도하는 예술가들이 어딘가에서 암울한 구석에 한줄기 햇살을 내려주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추석날에(30호 1990년)
추석날에(30호 1990년)

▲ 추석날에(30호 1990년)

추석에 제사를 마치고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은행나무 그늘에서 쉬는 여인들이 꽤나 피로에 지친 듯 대부분 나무그늘에서 단잠을 취하고 있다. 싸가지고 온 음식들을 먹고나서 옆에 둔채로 아이를 팔베개하고 함께 자거나, 축 늘어져 누워자는 모습이 휴일을 만끽하려는 양 태평해 보인다.

고궁 주위를 둘러보러 가는 이들, 농악대에 맞추어 흥겹게 춤을 추고 있는 모습들, 이들을 지긋이 바라보며 쉬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전통 복식과 비슷한 개량 한복 차림이다.

저멀리 추경색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숲, 다양한 단풍 색깔의 나무들, 다양한 군상의 형형색색 옷차림의 사람들, 시원한 냇가의 물살과 정갈한 전통 기와의 고궁 풍경 등에서 가을과 추석의 많은 면을 화폭에 담아내려고 애쓴 작가의 의도가 역력히 엿보인다.

또한 여인네들이 야외에서 널브러져 쉬거나 놀고 있는 풍경은 평양미술대학 초대 학장인 스승 김주경의 부녀야유(婦女野遊) 그림의 한가스럽고 즐거운 모습을 연상시킨다.

북한은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봉건유습 타파와 사회주의 생활양식을 외치면서 조상숭배, 민간풍속을 봉건적 잔재로 취급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국가 공휴일은 아니었지만 가족끼리 모여 음식을 나눠먹고 성묘를 갈 수 있도록 했다.

북한의 명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국가명절(사회주의 명절)과 민속명절이 그것이다. 북한정보포털에 따르면 북한은 1988년부터 추석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한데 이어 1989년에는 음력설을 민속명절로 지정했다. 2003년부터는 음력설을 기본명절로 하고 정월대보름도 휴무일로 인정했다.

파도(60호 2007년)
파도(60호 2007년)

▲ 파도(60호 2007년)

원색의 색채 미학이 불을 뿜고 있다. 중간에 낀 짙은 녹청색의 바다가 그나마 현실감의 징검다리가 되고 있다. 빛이 이글거리는 황녹색의 파도 거품과 그늘진 청보라빛의 잔물결, 시원하게 일어난 연록색 파도의 깍아지른 살결면과 붉은 노을빛을 흡수한 닭벼슬 같이 우뚝 선 바위들이 불꽃튀는 원색의 향연을 쏟아내고 있다.

야수파에 대한 고전적인 설명을 인용한다. ‘야수파는 새로운 실험정신을 발휘한 작가의 색채를 통해 표현적 감정적 힘을 표현하고 과거의 전통을 깨는 것이다. 야수파는 넓은 추상적 색면을 중요시하여 묘사적 기능에서 조형적 자유를 추구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색채 자체로 형상된 표현주의라고 할 수 있다. 화가 최동수는 이 그림 속에서 색채 표현주의(야수파)의 바다에서 마음껏 노닐고 있다.

이 그림의 가장 큰 소재인 파도가 도깨비불처럼 정중앙으로부터 상반신을 치켜 들고 일어나 현란하게 춤을 추며 바닷가 주변을 초원처럼 녹색 조명을 비추고 있다. 다른 한편 파도는 삼각뿔처럼 좌우 대칭 구도를 이루고 안정감을 심어주며 상단의 해돋이 풍경과 경쟁적 구도를 형성하고 화면을 반분하고 있다. 구도적 긴장감 보다 더 이목을 집중시키는 점은 일견 보색 대비의 강렬한 색채 대조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전체적으로는 원색 계열의 산뜻한 하모니를 불러 일으키며 가일층 선택적으로 시선의 가파른 쏠림 현상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고 있다.

이 그림을 서구의 야수파 대가가 그린 명화라고 한다면 그대로 곧이 받아들이고 감탄사를 연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가히 ‘북한판 야수파’ 화가의 그림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기량이나 내면의 성숙이 무르익어 그윽한 경지에 오른 화가가 그리는 그림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보편적 정서를 파도처럼 어루만지며 순수한 감성 깊숙히 스며들어 정화시킨다. 또한 마법의 매혹 속으로 그들의 얼을 빨아들이고 그들의 허망함을 달래주며 공허감을 채워준다.

북한 화가의 자택 소장의 자기 작품들 중에는 종종 정통 서양화의 실험적인 작품들과 다름 없는 번득이듯 눈에 들어오는 작품들이 있다. 남의 시선을 굳이 의식할 필요 없는 영혼의 고백 속에서는 자유로운 탐색이 얼마든지 가능해서인가? 세상과 일부러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영혼의 감흥을 화폭에 옮겨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흡족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리라. 동심으로 돌아가 재미삼아 단번에 쓱싹쓱싹 그려낸 그림이면 그런 속성을 지니기에 충분하다.

항상 맨정신으로만 살아가다보면 쌓여가는 심신의 피로를 녹여내기 어렵다. 그럴 때면 음주 가무가 무상하게 굳어진 사람의 프레임(격식)을 풀어헤치게 하는데 약이 되고, 예술가들은 자신의 잠자는 영혼을 깨어내고 이따금씩 혼을 내며 도깨비불처럼 거침없이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면 그대로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따금 명화가 탄생되는 조건이 되는 때가 신기들려 별 고민 없이 붓질 가는 대로 놀리다 보면 어느새 훌륭한 그림이 탄생되는 법처럼 말이다. 잔 손질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로 조형성이 힘 있게 뻗치고 사정없이 꺽이며 불쑥 튀어 나오면서 매듭짓는 표현주의적인 스타일로 구김살이 별로 안가는 그런 형태이다.

주황색 아침노을 구름이 푸른색 해무(海霧)에 올라타고 파도와 동반 리듬을 타며 삼각형의 나래짓을 펼치고 있는 듯 보인다. 구름은 배려심 깊게 바다가 갑자기 눈이 부시지 않도록 서서히 커텐을 들치며 햇님의 자취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타오르는 불덩어리 태양에서 하얀 광명의 태양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 새벽녘을 한참 지나치고 있는 중이다. 해가 좀더 중천으로 떠오르면 노을은 이내 자취를 감출 것이라서 사라지기 직전에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음을 음미해보자.

고향집(40호 2005년)
고향집(40호 2005년)

▲ 고향집(40호 2005년)

북한 최동수 화가(1937년생)와 비슷한 연배의 남한 최동수 화가가 있다. 이 둘은 생존시 서로를 아마도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의 최동수 화가는 이미 작고했다. 이 그림만을 놓고 본다면 북한 화가의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화풍과 색감이 남한의 어떤 화가의 것이라고 해도 모를 정도이고, 그림의 내용은 우리 모두의 옛 고향집 정경이라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참으로 평화롭고 이상적이기도 하지만, 일상과 다를 바 없는 시골 고향집의 모습 그대로이다. 두 화가 모두 각국 화단에서 비중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두분이 전시회에서 조우했더라면 그 반가움은 가히 상상이 간다.

고향집 마당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역할 분담하여 집안일에 열중이다. 기운이 성한 며느리는 절구에 나락을 넣어 찧고 있고, 시어머니는 앉아서 채거름으로 나락의 껍질을 분리해 내고 있다. 채질 옆쪽 한켠에는 흰 쌀을 담아 둔 바구니가 배치됨으로써 집안일에 들인 시간의 경과를 어림 가늠케 한다. 어머니가 채에 끼여 있는 부스러기를 털어 사립문 쪽으로 던져 주었더니, 닭과 병아리들이 숨가쁘게 달려와 모이를 쪼아 먹고 있다.

이 그림에는 돼지를 제외한 모든 일반 가축들이 등장한다. 닭과 병아리를 제외한 소와 고양이와 강아지는 정적인 모습의 주인공들이다. 게다가 소와 고양이가 좌우측에 위치하여 앉아 있음으로 해서 안정감 있는 구도를 연출하고 있다. 그런데 소도 풀을 먹고 있고 강아지도 밥그릇을 비워가고 있는데, 고양이만은 마루에 앉아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여유를 보이고 있다.

때는 가을이다. 감나무가 마당 중앙까지 드리워져 있는데, 짙은 주황빛 감들이 한결같이 아주 탐스럽게 익어서 곧 땅에 떨어질 것 같다. 좌우측 지붕 위에는 호박과 박이 덩굴과 함께 커다랗게 자라나 있어, 가을의 풍요로움과 넉넉한 집안 풍경을 드러내고 있다. 닭들이 집 밖으로 나갈 걱정은 애초에 없는 듯 문을 저리 활짝 열어둔 것은, 저 멀리서 소 달구지에 시장 짐을 싣고 오는 아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집에서 이렇게 확보한 곡식의 여유분을 가지고 읍내에 나가 내다팔아서 다른 작물로 가지고 오는 길인 듯 보인다. 정 중앙의 곳간 창고 좌측으로는 장작더미가 가진런하게 수북히 쌓여 있고, 반대쪽에는 전통의 옹기 항아리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으며 그 바로 옆에는 부엌 문이 열려 있다. 아마도 이제 곧 저녁을 먹기 위해 부엌에서 저녁준비를 동시에 진행중인 듯 보인다. 아들이 오면 바로 상을 차려 주고 싶은 두 아낙들의 살뜰한 마음씨가 엿보인다.

최동수 화가
최동수 화가

◇ 최동수(1937~작고?)는 누구인가?

최동수는 조선화와 유화를 모두 다 잘 그린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 위원장(1974~1977)과 동맹부위원장(1977~1982)을 역임하였다. 또한 그는 1983년 이후 문화예술부 미술지도국장,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업미술지도국장을 맡기도 하였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문학을 좋아하고 사색하기 좋아하는 그로서 계속 그림을 그렸다면 기대되는 작품들이 창작되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확실히 문학이 있고 시적 정서가 있다. 그는 지금 옥류민예사에서 유화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새것을 지향하는 그로서 특색있는 유화를 창조하려는 각오와 열의가 높다.”

<최동수 화가 주요약력>

1937년 8월 16일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 신흥동에서 출생.

1948년 아동미술전람회 특등상(크레용화<우리학교>)

1954년 평양미술대학 입학.

1959년 조선우표사 미술가.

1973년 조선미술가 동맹 현역미술가.

1974~1977년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 위원장.

1977~1982년 조선미술가동맹 부위원장.

1978년 공훈예술가

1983년 문화예술부 미술지도국장,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업미술지도국장.

2001년부터 송화미술원 원로화가로 창작활동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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