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팔의 나이에도 치열한 비판의식으로 무장, 막강한 권력에 시종일관 맞서

중국 언론계와 반체제 인사들의 모임에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것으로 유명한 철혈 여기자 가오위 여사.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의 프리랜서 기자로 일할 때의 모습.[사진제공=VOA(미국의 소리 방송)]
중국 언론계와 반체제 인사들의 모임에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것으로 유명한 철혈 여기자 가오위 여사.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의 프리랜서 기자로 일할 때의 모습.[사진제공=VOA(미국의 소리 방송)]

【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전 세계에서 중국은 언론자유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국가로 손꼽힌다. 운명적으로 체제를 비판하기 어려운 정치 상황이 가장 절대적인 이유로 꼽힌다.

당연히 기자들은 자신들에게 기본적으로 부여된 비판의 본령을 잃어버리고 권력에 순치된 순한 양이 될 수밖에 없다. 권력과 자본에는 스스로 재갈을 문 채 비판과는 담을 쌓고 ‘용비어천가’를 주야장천 읊어대는 기레기가 판을 치는 한국과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비판적인 언론인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간혹 계란으로 바위를 치겠다는 식으로 무모하게 권력에 저항하는 이른바 반체제 '독고다이'들이 아주 드물기는 하나 분명히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의 전설적 여기자인 오리아니 팔라치의 중국 버전으로 일컬어지는 가오위(高瑜. 79) 여사를 가장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자식뻘보다 훨씬 어린 젊은 기자들에게는 완전히 언감생심인 치열한 비판의식으로 무장한 채 지구촌 그 어떤 것보다 막강한 권력에 시종일관 맞서고 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의미는 상당하되 정말 무모한 일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오 여사가 해마다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는 것은 이로 보면 하나 이상할 것이 없지 않나 싶다.

반체제 인권 운동가 외에도 철혈 여기자로 불리는 가오 여사는 중국 내 최대 인구 보유 도시인 충칭(重慶)에서 1944년 태어났다. 학력을 비롯한 기타 자세한 스펙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세계 최대 중국어 검색 엔진인 바이두(百度)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기야 바이두가 꼭 집어 미국을 지칭하지 않고 그저 해외에서 침투한 간첩이라고 그녀를 직설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언론인으로서의 이력은 바이두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잘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일한 곳은 신화(新華)통신에 버금간다고 해도 좋을 관영인 중국신문사(CNS)로 알려지고 있다. 태생적으로 반골은 그녀가 이곳에서 오래 일했다면 이상하다고 해야 한다.

실제로도 오래 일하지 못하고 시쳇말로 곧 짤렸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그녀는 비교적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이 1982년에 창간한 경제학주보에 입사해 부총편집(부국장. 부사장에 해당)으로 승진할 때까지 일하는 기회를 가질 수는 있었다.

이후 다시 직장을 잃은 그녀는 이번에는 아예 취재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해외 매체에 눈을 돌렸다. 독일의 ‘도이체 벨레’TV의 ‘베이징 관찰’ 프로그램의 특약 기자가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adio Free Asia), 홍콩의 밍바오(明報), 징바오(鏡報)의 해설위원과 프리랜서 기자로 일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워낙 반골 언론인이었던 탓에 그녀는 30대 초반의 젊은 시절부터 당국의 요시찰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89년 6월 3일 인생 최초로 국가반역죄라는 죄목을 뒤집어쓴 채 당국에 체포되는 횡액을 당하게 된다. 하루 후 발생한 톈안먼(天安門) 유혈 사태의 배후 주모자로 낙인이 찍힌 것이다.

다행히도 1년 2개월여 후에는 석방이 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1993년 10월 2일 다시 체포됐다. 1994년 11월 9일에 베이징 중급인민법원에서 열린 재판을 통해서는 ‘국가기밀누설죄’라는 어마무시한 죄를 뒤집어쓰고 무려 6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정치 권리 1년 박탈과 800 위안(元. 14만5000 원) 몰수 조치는 완전 애교에 가까운 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때 이미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반체제 투사답게 옥중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14억 명의 중국인들이 사람답게 살게 위해서는 중국의 획기적인 체제의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는 입장 역시 고수했다. 형량 경감을 미끼로 내건 당국의 회유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불굴의 버티기는 그녀에게 무려 4년 3개월 동안의 영어 생활을 강요했다. 만약 1995년 2월 15일 병보석으로 석방되지 못했다면 아마 형기를 꼬박 채웠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이 51세 때였다.

출소한 이후 그녀는 가능하면 당국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괜히 미운털이 박혀 감옥에 들락거리면 본인만 손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순한 양이 된 것은 아니었다.

201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인권운동가 겸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 톈안먼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의 비서실장 겸 핵심 브레인이었던 바오퉁(鮑彤)과 빈번히 교류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당국의 감시망에는 언제나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 2013년 8월에 기어코 또 사달이 나고 말았다. 당시 해외의 모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중요한 기밀 문건인 이른바 ‘문서넘버 9’이 마치 당국에서 작심하고 발표한 것처럼 자세하게 실렸다. 내용은 진짜 엄청났다. 다당제로 이뤄진 민주주의 체제, 독립 언론, 인권 개념 등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내용 등이었으니 정말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분기탱천한 중국 공안 당국은 바로 문건 유출자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곧 가오 여사가 범인으로 특정됐다. 문서를 홍콩으로 유출한 사실이 확실하게 포착된 것이다. 그녀는 즉각 기소돼 재판을 받은 끝에 다시 7년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70세의 고령이었던 노인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중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행히 고령이라는 사실이 고려됐는지 그녀는 곧 5년 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이어 국제 인권단체들의 도움으로 2015년 11월 극적으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현재 베이징 차오양(朝陽)구 모처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가오 여사는 몸이 이전 같지 않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특별한 이슈가 아닌 한 진보 인사들의 모임 등에는 참석을 잘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도 있다.

하지만 아직 열정은 완전히 사그러들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톈안먼 민주화 시위 당시 희생자들의 유가족 모임인 ‘톈안먼어머니회’ 회원들과 여전히 긴밀하게 접촉하는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녀는 바람 앞에 촛불처럼 보이는 연로한 여성이기는 하나 패기는 한창 나이의 젊은 남성 못지않다고 한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지난 1995년부터 그녀에게 ‘자유언론상’, ‘세계에서 가장 걸출한 기자상’, ‘세계 언론 영웅 50인’ 등을 비롯한 각종 상을 경쟁적으로 준 사실이 무엇보다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녀는 리더십도 대단히 뛰어나다. 젊은 남성 기자들을 비롯한 각계의 후배들이 그녀를 ‘다졔(大姐. 큰 누나)’라고 부르면서 따르는 것은 확실히 괜한 게 아니라고 해야 한다.

약점이라고는 진짜 나이와 그에 비례할 수밖에 없는 좋지 않은 건강이 아닌가 보인다. 그녀가 중국의 두 번째 노벨 평화상 후보로 국제사회에서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은 다 까닭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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