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구설에도 불구 예술적으로 엄청난 위업 이뤄

중국의 예술 총서기로 불리는 장이머우 감독. 향후 상당 기간 동안 영향력을 더발휘할 것으로 보인다.[사진=런민르바오(人民日報)]
중국의 예술 총서기로 불리는 장이머우 감독. 향후 상당 기간 동안 영향력을 더발휘할 것으로 보인다.[사진=런민르바오(人民日報)]

【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 이념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지난 세기 90년대 전후에 “낮에는 늙은 덩(鄧)의 연설을 듣고, 밤에는 젊은 덩의 노래를 듣는다(白天聽老鄧, 晚上聽小鄧).”라는 아이러니한 유행어가 중국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 사이에 널리 퍼졌었다면 더 이상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하다.

중국인들이 대만의 국민 가수 덩리쥔(鄧麗君)의 노래를 너무 좋아하다보니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까지 자신도 모르게 소환되면서 의문의 1패를 당했다는 얘기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요즘이라고 크게 달라질 까닭이 없다. 중국의 국민 감독이라고 해도 좋을 장이머우(張藝謀. 73)가 대만에서 여러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크게 어필하고 있는 현실을 상기할 경우 분명 그렇다고 해야 한다.

중국 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덩리쥔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중국의 밤낮을 지배하는 예술 총서기라는 얘기를 듣고 있다면 확실히 예술에는 그 어떤 것일지라도 장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양안(兩岸. 중국과 대만)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내로라하는 거장으로 손꼽히는 장 감독은 산시(陝西)성 시안(西安) 출신으로 문화대혁명에 직격당한 이른바 즈칭(知靑. 지식 청년) 세대로 유명하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 인근의 공장에 들어가 무려 10년이나 노동을 강요당한 것은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때 좌절했다면 천카이거(陳凱歌. 71)와 함께 중국의 5세대 감독 그룹을 대표한다는 그는 지금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를 영화계로 자연스럽게 이끌었던 것 같다. 노동을 성실하게 한 대가로 28세 되던 해인 1978년 명문 베이징영화학원에 입학하는 전혀 예상 못한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1982년 32세의 나이로 겨우 졸업에 성공한 그는 바로 광시(廣西)영화제작공사에 촬영기사로 입사하게 됐다. 곧 대학 동기인 천카이거의 작품 ‘황토지(黃土地)’에 촬영감독으로 데뷔도 했다.

그러다 3년 후 고향에 소재한 시안영화제작공사로 옮기면서 거장이 될 결정적 기회를 얻었다. 대학 대선배인 우톈밍(吳天明) 감독의 작품인 ‘노정(老井)’의 촬영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으면서 중화권 영화계에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이다.

1988년 그는 마침내 자신의 첫 번째 감독 작품인 ‘홍고량(紅高粱)’, 즉 ‘붉은 수수밭’을 완성,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우선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어 ‘베니스 영화제’와 ‘칸 영화제’에서도 잇따라 수상하는 기염까지 토했다. 서구 관객들에게 중국 영화의 강렬한 인상을 각인시킨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중국의 근현대사와 개인의 삶을 자신 특유의 은은한 영상으로 엮어내는 작품을 주로 만들었다. ‘국두(菊豆)’, ‘홍등(紅燈)’, ‘인생(人生)’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하나 같이 그의 인생작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즈음 그는 중학교 동창이었던 첫 번째 부인인 작가 샤오화(肖華. 72)와 이혼하는 아픔도 겪게 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페르소나였던 배우 공리(鞏俐. 58)와의 스캔들이 원인이었다. 그는 하지만 이후 11년 동안 동거한 공과도 재혼하지 않고 1996년 헤어지는 선택을 했다.

그는 이런 개인적인 아픔을 뒤로 한 채 금세기 들어서면서부터는 전형적인 사극 상업 영화 제작에 전념했다. ‘영웅’을 비롯해 ‘십면매복’, ‘만성진대황금갑(滿城盡帶黃金甲)’, ‘금릉십삼채(金陵十三釵)’ 등의 작품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당연히 그의 명성에 힘입어 전 세계적인 성공도 거뒀다. 그가 중화권을 대표하는 예술 총서기가 됐다는 말은 이때부터 중국인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각종 글로벌 행사에서 맹활약을 한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우선 2008년의 베이징 하계올림픽을 꼽아야 할 것 같다. 개막식과 폐막식 행사의 총감독을 맡아 전 세계에 중국의 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의 활약으로 그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의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2019년과 2022년의 중국 건국 70주년 행사와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 총감독을 맡은 사실 역시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행사 모두 그가 아니었다면 성공적으로 치러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금도 나오고 있다.

그는 초창기 감독 시절 때만 해도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점에서 보면 두 살 아래의 베이징영화학원 동창인 또 다른 5세대 감독 톈좡좡(田壯壯. 71)과는 많이 달랐다. 톈의 경우는 정부나 당에 비판적인 작품들을 발표했다 감독 생활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으니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말년으로 갈수록 국뽕 감독으로 전향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그가 2021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선전영화인 ‘저격수’를 자신의 딸 장모(張末. 40)와 함께 공동 연출한 사실에서 무엇보다 잘 알 수 있다. 가장 최근작인 만강홍(滿腔紅)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애국주의적인 메시지가 물씬 풍긴다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주위로부터 손가락질을 많이 받는 대표적인 예술계의 거장으로 손꼽힌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다.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게 되는데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열애 상대였던 공리를 사실상 차버린 사실을 우선 꼽을 수 있다.

공리가 울면서 싱가포르 출신 사업가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중화권 연예계에 지금도 파다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1999년 무려 31년 차이가 나는 현 부인인 천팅(陳婷)과 결혼한 이후에는 한 자녀만 낳아야 한다는 법도 우습게 여기면서 가볍게 어겼다. 지금은 탁월한 선택으로 뒤늦은 박수갈채를 받고 있으나 이로 인해 엄청난 액수의 벌금 역시 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러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예술적으로 볼 때는 일가를 이뤘다는 평가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 엄청난 위업을 남겼다고 해야 한다. 예술에는 나이도 없는 만큼 앞으로도 더 많은 기록을 쌓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향후 상당 기간 중국을 지배하는 예술 총서기로 계속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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