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춤놀이'...남녀노소 관객들과 탈패 농악패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건강한 기상과 웃음이 넘쳐
'봄'...보면 볼수록 행복감과 추억이 밀물처럼 밀려와
'추석 전날 밤'...그림 속 인물 군상들의 아기자기한 생활상과 알록달록한 색채의 묘미 돋보여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김장철이 다가오니 대동강 선창가 장이 흥성거리네(40호 2004년 8월) 

2015년 12월 2일 열린 유네스코에서 북한의 ‘김치 만들기’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3년 한국의 김장 문화도 동일하게 등재된 바 있어 남한과 북한이 공히 아리랑과 함께 같은 식생활의 김장 문화로서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이와 같이 남과 북이 분단된 지 3분의 2세기가 흘렀건만 언어나 풍습은 달라진 게 별로 없다. 북한의 김장은 6개월치의 중요한 식량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자기 집에서는 김장을 1000포기 담궜다고 어느 탈북자가 방송에서 말한 것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또한 대개 가족과 친척들이 김장철에 모여 품앗이로 김장을 담그지만, 친척이 멀리 있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이웃끼리 모여서 품앗이 노동을 한다고도 전한다. 우리도 김장철 품앗이 노동은 지금도 시골에서는 여전하고 첨단 도시화 이전의 어린 시절 삶 속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계절의 집안 잔치 풍경이었다.

북한에서는 땅을 파서 김치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인 김치움을 만들어 이 속에 김치를 위 그림 속의 옹기로 된 김칫독에 담아 보관한다. 김치움을 만들 때는 1.5m 내외의 깊이로 판다고 하는데 너무 얕게 파서 묻으면 곧 얼어버리고 너무 깊이 묻으면 빨리 쉬기 때문에 땅 깊이를 적절히 파는 일이 중요하다.

북한의 남자들이 김장 시기 주로 땅 파고 김치 묻는 일만을 하고 김치 담그는 과정에는 잘 손을 대지 않는 모습도 남한의 남자들과 닮은 모습이다. 최근에는 온실과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한겨울에도 배추나 무를 살 수 있어 김장철에 일정량의 김장을 하고 이듬해 초에 추가로 담그기도 하여 김장 규모가 점차 감소 추세를 보인다고 한다.

북한의 말과 글들을 접해 보면 거의 95프로는 글귀와 단어를 이해하는데 별다른 장애가 없다. 한글 사용을 우리 보다 더 중요시해온 북한의 언어와 문법은 일부 특별한 한글전용어를 제외하고서는 우리와 달라진 것을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남과 북이 통일된다고 해도 인도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남한 사람들이 공존공영(共存共榮)을 위한 겸손하고 덕성 있는 아량의 자세만 견지한다면, 일반 국민들의 실생활은 그다지 혼란스럽지 않고 빠르게 상호 적응해 나갈 것으로 본다. 여러 TV 채널의 탈북자 출현 프로그램을 보면 이와 같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방식이 짧은 시간에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위 그림에서는 대동강가에 큰 옹기장이 섰는데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북적거리면서 저마다 옹골진 옹기들을 골라 지게로 짊어지고 갈 채비를 하고 있다. 옹기 백화점이 펼쳐진 장터에서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꽃과 활기가 샘솟고 있고 행동거지에는 신바람이 불고 있다. 불과 해방 전후까지만 해도 저런 모습과 풍경의 재현이었으리라.

북한의 금슬 좋은 인민화가 리정섭 부부는 이처럼 정감 있고 현장감 넘치는 향토적인 풍속화를 다수 그려내었다. 옹기는 고구려 시대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전할만큼 우리 민족의 삶에 가장 귀중한 생활도기로 사용되어 왔다.

이 그림은 김장철 문화를 표현하면서 김장 품앗이하는 사람들 보다도 옹기를 주소재로 할 만큼 각양각색의 옹기를 이처럼 다채롭게 묘사한 작품은 보기 어려울 것이다. 옹기를 팔고 사기 위해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의 활기찬 기운이 북한 주민의 삶 속에 스며들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의 전통 발효 음식을 담는 보물 창고인 옹기의 크기와 형태는 이 그림처럼 다양하고 윤기가 흐른다. 옹기의 크기는 곡식 저장용이 가장 크고 고추장 저장용이 가장 작으며 볼록한 정도는 간장 저장용 옹기가 가장 볼록하고 김치 저장용 옹기가 가장 날씬하다고 한다.

탈춤놀이(40호 2004년 4월)
탈춤놀이(40호 2004년 4월)

▲ 탈춤놀이(40호 2004년 4월)

안동의 세계 탈박물관에서 느낀 점은 우리나라 탈은 유달리 형태가 원만하고 표정은 부드러우며 생김새는 어리숙하여 금방 친숙해질 수 있는 묘한 매력이 있고, 가까이 다가가서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싶은 충동을 유발한다.

심지어 무섭다는 도깨비조차 만화같이 우스꽝스럽다. 그러한 탈들의 춤 경연장에는 공포와 괴기스러움 그리고 진지한 고민은 사라지고 해학과 웃음 그리고 신명이 난무한다. 고통스럽고 힘든 현실에 짓눌릴지라도 탈춤의 율동과 노래가락이 그것들을 먼지처럼 털어 날려버리는 신바람의 마력을 뿜어낸다.

이는 남북한의 모든 탈춤놀이에 일관하는 코드로서 달관한 탈춤의 예술인들은 어깨와 팔을 덩실덩실 휘두르고 다리를 흔들흔들 사뿐거리며 춤추는 취권의 도인들처럼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고 삶의 의지를 흠씬 끌어올린다.

한국탈춤단체총연합회 황종욱 선생님의 글을 인용한다. “북한의 황해도 지방에서 춤추어졌던 가면극을 ‘탈춤’이라 부르는데 대표적으로 봉산탈춤, 은율탈춤, 강령탈춤, 북청사자놀음을 떠올리면 된다. 그리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에서 전승되는 탈춤을 산대놀이라 하는데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가 그것이다.

또한 현재 경상도 지역에서 공연되는 탈춤을 ‘오광대’라고 하는데 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 가산오광대가 있다. 그리고 부산지방에서 연희되는 가면극을 야류(野遊)라 하는데 동래야류와 수영야류가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안동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강릉관노가면극이 있다.

이러한 탈춤은 그 지역이나 놀이방식 등에 따라 기원이나 유래 특색은 다소차이가 있으나 그 표현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첫 번째 조선시대 신분계급에 대한 투쟁과 갈등을 표현하며, 두 번째 일부 잘못된 종교인의 모습을 비판하는 내용이며, 세 번째 남녀간(처첩)의 문제를 표현하는 내용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위의 3가지 내용이 한데 뒤섞여 근엄하고 위선적인 양반과 고매한 승들의 파계한 삶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치정에 얽힌 행태가 서민들 자신들보다 못하고 때로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우리나라의 탈춤은 개방적인 마당놀이 형태로 진행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허물어지면서 나중에는 공연자와 관객이 한마당에서 스스럼 없이 어울려 일체가 되는 무아의 절정으로 몰입하는 퍼레이드를 이끈다.

위 그림은 연극적인 구경거리의 꼭지가 지난 다음 전개되는 농악대와 사물놀이 패들이 탈춤꾼들에게 사기를 불어넣어 진동시키고 함께 어우러지면서 춤사위가 한바탕 휘몰아치는 절정의 피날레 광경이다. 남녀노소의 관객들과 탈패와 농악패들 그 어느 누구의 표정과 몸짓에서도 건강한 기상과 웃음이 넘쳐 흐르지 않는 이가 없다.

공연의 주체인 춤꾼과 소리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객체인 관객조차도 모두가 예술을 즐기면서 달관한 낙천주의자의 경지에 오르는 것 같다. 이와 같이 밝고 해학적인 현장예술이 상징과 감각으로 전개되는 현대의 그 어떤 무용극이나 영상보다 건강한 삶의 촉매제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탈패와 농악대의 박력 있는 춤사위와 굵직한 노래가락, 그리고 도취적인 리듬은 궁중 음악의 거창한 향연과 기방에서 흘러나온 풍악소리와는 다른 민초들의 삶의 탄력과 윤기, 웃음을 선사하는 측면에서 종합행위예술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봄 1 (10호 1985년 5월)
봄 1 (10호 1985년 5월)
봄 2 (10호 연대미상)
봄 2 (10호 연대미상)

▲ 봄 1~2편(10호 1985년 5월)

보면 볼수록 행복감과 추억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그림이다. 정확히는 다색 판화 작품으로 위 그림은 85년 작이고 아래 그림은 년대 미상이다. 하단에 작품번호가 명기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원작이면서 1장만 만들어졌거나 극소량(3장 이내)만 찍어낸 작품이다.

오래 전 그 당시 판매용으로는 염두에 없이 대부분 내외부용 전시 작품이거나 개인 소장용 작품만 창작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사회주의권에서 현실지향적인 사상성도 배제된 순수 예술 작품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어울려 동심에 젖어서 즐겁게 뛰노는 장면이 너무나 예쁜 울림으로 다가와 때로는 섬세하게 혹은 간명하고 질박하게 이 광경들을 환상적인 화폭 속에 꽃을 피워 예술지상주의로 승화한 경우이다.

북한에는 시대를 풍미한 세계적인 판화가의 이름이 둘 떠오른다. 배운성과 함창연이다.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장을 지낸 배운성은 일제시대 유럽에서 미술을 배워 구미 각국의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당시로서는 희대의 미술계 저명인사이면서 민속적인 경향의 판화 작품을 다수 남겼다.

리정섭은 그의 제자이면서 스승의 그런 화풍의 영향을 깊이 받아 토속적이고 풍속적인 정감어린 작품을 다수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리정섭과 비슷한 연배의 함창연은 배운성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일찍이 폴란드 유학생활을 거치면서 서구의 모티브를 과감히 도입한 누드 형상과 종교적인 상징성이 짙게 배인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북한 작가의 그것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의 세련된 유럽 스타일로 확연한 대비를 이룬다.

추석 전날 밤(30호 2005년)
추석 전날 밤(30호 2005년)

▲ 추석 전날 밤(30호 2005년)

리정섭은 현대적인 세련된 기명절지도 같은 병풍 그림에도 뛰어났고 한편 그의 만년에는 그의 부인 신옥과 함께 금슬좋게 민속화, 풍속화 등 조선화를 다수 합작하며 소일하였다. 물론 판화라는 주분야에서 우뚝 서는 업적들을 많이 남겼지만 예술가로서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재능과 끼를 펼치었다. 이 '추석전날밤' 작품도 부부 공동 합작품이다.

이 부부 공동작품이 리정섭 단독의 조선화 풍속도에 비해 다소 산만한 점은 있지만, 그의 부인과 합작품 속 인물 군상들의 아기자기한 생활상과 알록달록한 색채의 묘미가 가미되어 더욱 재미있고 정성스러운 묘사들은 더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그림 속 남녀 가리지 않고 입술을 붉게 도드라지게 색칠한 것은 여성의 감수성이 농후해 보인다.

조선시대의 풍속화가로 최고 유명한 화가는 단연 김홍도다. 그 김홍도는 남북한 미술사 평론에서 정조 임금의 어진, 병풍 그림 뿐만아니라 풍속화, 심지어 춘화도 잘 그렸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편 김홍도는 자기가 마음에 드는 2000냥의 매화를 사려고 자기가 즉석에서 그린 그림을 3000냥 받고 팔게 되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남은 800냥을 자기가 산 매화를 감상하며 벗들과 술값으로 하여 잔치를 치뤘고, 자투리 200냥을 집에 주었다고 하는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예술가였다. 이렇듯 그는 궁중을 벗어나면 마음내키는대로 재미있게 사는 미술가로서 민중들의 고락의 현장을 보고 감흥이 당기면 화선지에 즉흥적으로 붓을 대어 크로키하는 그림쟁이가 본업이었다는 것이다.

리정섭 화가 (1936~2004)
리정섭 화가 (1936~2004)

◇ 리정섭(1936~2004)은 누구인가?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리정섭 화가에 대한 평가를 전한다. “리정섭은 배운성, 김건중, 함창연 이후 미술계에서 손꼽히는 우수한 판화가의 한 사람이다. (중략) 리정섭의 판화에는 민족적 정서와 감정이 짙게 깔려 있다. 이것은 그가 창작한 판화 작품들의 주제가 보여주고 있는 바 전통적인 민족생활의 풍습들이 판화적 형상을 통하여 인상 깊게 형상화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작품에 내재하고 있는 정서가 지극히 향토적이며 그것이 현실생활을 통하여 우러나오는 것으로 하여 더욱 깊은 감명을 불러일으킨다.”

이어서 “리정섭은 선전화, 템페라화, 조선화, 수채화 등 여러 형식의 그림들도 창작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 판화 <단오날>, <가을밤>, <새각시 맞는 날> 등 민족 풍습을 반영한 독특한 주제의 그림들도 화가의 독특한 주제탐구와 개성적인 형상으로 하여 일정한 사회적 평가를 받았다. 그의 판화에서는 표현언어들이 정리되고 있고, 함축되고 집중된 수법으로 묘사대상의 본질적 특징을 설명이나 군더더기 없이 선명하고 간결하게 형상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리정섭은 그의 부인 신옥과 합작을 많이 한 독특한 이력의 작가이다. 이 부부는 영원한 길동무가 될 것을 굳게 약속한 원앙금실로 자연과 민속 정서에 취해 감미로운 명작들을 다수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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