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의 ‘2국가·2민족론’과 김정은의 ‘위장독자국가노선’
배경과 목적도 달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8일 잠수함발사순항미사일(SLCM) 시험발사를 지도하고 핵잠수함 건조 사업을 둘러봤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9일 보도했다.[사지=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8일 잠수함발사순항미사일(SLCM) 시험발사를 지도하고 핵잠수함 건조 사업을 둘러봤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9일 보도했다.[사지=연합뉴스]

【뉴스퀘스트=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 김정은의 ‘대한민국 호칭’, ‘동족 거부’로 동독의 ‘2국가·2민족론’이 소환되었다. 둘은 배경도 목적도 다르다.

독일을 패전시킨 전승4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을 4개 지역으로 나누어 점령했다. 미·영·프 점령지역(후일 서독)을 서방연합군이 그리고 소련 점령지역(후일 동독)을 소련군이 통치했다. 소련 점령지 내 위치한 베를린도 4개 구역으로 나누고, 미·영·프 점령지역(서베를린)을 서방연합군이 그리고 소련 점령지역(동베를린)을 소련군이 통치했다.

소련의 독일 정책상 목표는 독일 서쪽이 서구 국가 공동체로 경사(傾斜)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과 눈엣가시와 같은 서베를린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물론 최대 희망은 독일 전체의 공산화였다.

이를 위해 소련이 내세운 것이 독일의 동서쪽이 하나로 통일되어 하나의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치하의 동쪽에서는 물론이고 서쪽에서도 사회민주당(SPD) 계열의 지지 여론도 있었다. 6.25전쟁 직전의 한반도 상황과 유사하다.

반면 콘라드 아데나워의 기독교민주당(CDU)을 중심으로 독일 민족이 걸어야 할 길은 이념적으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이고, 진영적으로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미·소가 대립하는 냉전 상황에서 소련이 맹주인 동구가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 긴밀한 관계 형성이란 결단이 이루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독일 서쪽은 1947년 6월 조직되고 7월부터 시작된, 미국이 만든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이른바 ‘마셜 플랜(Marshall Plan)’에 의한 막대한 지원으로 전후 복구에 나설 수 있었다. 미국은 연합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경제적·기술적 지원을 전범국인 독일의 서쪽에 베풀었다.

1948년 6월 24일 새벽 소련은 실력행사에 나섰다. 미·영·프 점령지역인 독일 서쪽과 서베를린을 연결하는 모든 도로·철도·수로를 차단하고, 서베를린에 공급하던 전기도 끊는 서베를린 고립·고사 전략이었다. 1949년 5월 12일 0시 1분까지 지속된 이른바 ‘베를린 봉쇄’였다.

당시 서베를린 인구는 2만여 명의 연합군과 군속을 포함해 약 220만 명에 달했고, 모든 생필품을 시 외부로부터 조달해야 했다. 약 75%를 독일 서쪽에서 수입했고, 나머지는 소련 점령지로부터 수급하던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끊긴 상황에서 생존투쟁이 시작되었다. 남은 것은 하늘 길뿐이었다. 서베를린 시민의 단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연합국의 의지·결단으로 ‘베를린 공수 작전’이 전개되었다.

모든 지원 물자가 독일 서쪽에서 서베를린으로 바로 간 것이 아니었다. 전쟁 직후 어려웠던 서쪽에서 물자를 확보할 수 없었기에 대부분 미국에서 서쪽으로 먼저 공수돼야 했다. 미국→독일 서쪽→서베를린을 연결하는 대륙 간 ‘하늘다리(Luftbrücke)’가 만들어졌다. 약 10t의 지원물품을 실은 수송기가 매 3분마다, 봉쇄 시작부터 끝까지, 밤낮없이 하루 종일 이륙했다.

강력한 서방연합국의 대처, 3차 세계대전 촉발을 우려한 소련은 봉쇄를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 봉쇄는 역설적으로 서방연합국 점령지 내 독일 주민이 소련의 속셈을 알아차리는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의미를 깨닫는데, 미국의 중요성을 인식하는데 큰 자극이 되었다.

베를린 봉쇄가 끝나자마자 1949년 5월 23일 독일 서쪽 서방연합국 점령지역에서 독일연방공화국 헌법 ‘기본법’이 발표되어, 점령 시대가 끝나고 하나의 국가, 서독이 출발했다. 1949년 10월 7일에는 동독이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동서독이 별개로 나타났음에도 서독의 서방 밀착을 저지하려는 소련의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명분은 여전히 독일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1950년 6월 25일 저 멀리 동방의 한반도에서 전쟁의 포성이 울리는데 공모하고 뒷받침해줘, 다음 전쟁이 독일 땅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협박하면서 소련은 동독을 내세워 통일논의를 시작하게 했다.

1950년 11월 동독 총리 오토 그로테볼은 서독 아데나워 수상에게 분단 극복을 위한 전독일평의회 구성을 제안했다. 그러나 동독을 국가로는 물론이고 동독 정부조차 정통성을 부정한 아데나워 정부는 동독과 협상할 의사가 없었다. 대신 독일 전주민이 참여하는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하나의 독일 정부 구성을 주장했다.

소련이 다음으로 꺼낸 카드가 ‘독일 중립화’였다. 1952년 3월 10일 스탈린은 서신, 이른바 ‘스탈린 노트(Stalin Note)’를 통해 독일 통일과 독일 중립화에 관한 협상을 제안했다. 서독과 서방은 이를 서독의 ‘서방통합(Westintegration)’을 방해하려는 소련의 우회전술로 간파했고, 스탈린의 시도는 성과 없이 끝났다.

소련의 방해에도 서독의 서방통합은 착실히 진행되었다. 1951년 ‘파리조약’을 통해 서독의 완전한 주권성이 인정되었고, 서독은 프랑스와 함께 유럽연합(EU)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의 중심국가가 되었다. 1949년 4월 4일 체결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6.25전쟁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서독이 1955년 5월 5일 가담함에 따라 서독의 정치·군사·경제적 서방통합은 확고히 정립되었다.

소련은 독일정책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2국가’ 주장으로 동독만이라도 확고하게 틀어쥐고자 했다.

1955년 7월 전승4국이 1945년 7·8월의 ‘포츠담회담’ 이후 처음으로 만난 ‘제네바 정상회담’에서 소련 공산당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가 2독일국가를 공식화했다. 직후 7월 말 흐루쇼프는 동베를린을 찾아 새로운 독일정책, ‘2국가론(Zwei-Staaten-Theorie)’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소련은 독일의 영구 분단을 기정사실화했다. 독립적 주권을 가진 2개의 독일 국가가 소련 독일정책의 기반임을 명확히 했다.

소련은 기본적으로 통일은 독일인 자신들의 문제이지만, 동독의 ‘사회주의적 성취’도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는 동독에게 소련의 영향권에 더욱 긴밀히 통합해야 한다는 명령이기도 했다.

소련의 지도 아래 동독은 소련 및 동구권과의 ‘동방통합(Ostintegration)’과 동독 경제의 사회주의적 변혁에 박차를 가했다. 1949년 소련이 창설한 동구 공산권 경제협력기구인 ‘경제상호원조회의’, 이른바 ‘코메콘(COMECON)’에 1950년 가담한데 이어, NATO에 대항하기 위해 역시 소련이 1955년 5월 14일 만든 군사협력(정식 명칭은 우호, 협력 및 상호 원조)기구인 ‘바르샤바조약기구(WTO)’에 참여했다.

소련의 정책 변화에 따라 동독은 공산권 국가와의 외교관계 수립에 이어 가장 중요한 외교초점을 국제사회, 특히 서방국가로부터 독립적 주권을 가진 개별 국가로 승인받는데 두었다. 주권국가로 인정받아야만 무엇보다 서방과 국제법 특히 상법(商法)에 따라 구속력이 있는 조약을 체결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절실한 경제문제 해결의 길을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과는 1971년 에리히 호네커가 권력을 잡으면서 나타났다. 빌리 브란트 수상의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과 그에 기반한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äherung)’란 ‘독일정책(Deutschlandpolitik)’을 편승·이용했다. 브란트는 ‘적대적 대결’과 ‘단절’을 상징으로 했던 ‘동방정책(Ostpolitik)’을 미·소가 긴장을 완화하려는 ‘데탕트(Détente)’ 시기에 수정하여 동구권·동독과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1972년 동서독은 평등에 기초한 정상적인 선린 우호관계 발전을 골자로 한 ‘기본조약(Grundvertrag)’을 체결했다. 동독은 이를 서독이 주권국가로 인정한 것으로 간주했다.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기본조약’ 체결로 동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국가와는 단교하거나 수교하지 않는다고 1955년 서독이 선언한 ‘할슈타인 독트린’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독이 건국 이후 줄기차게 주장해온 서독만이 전체의 독일과 독일민족을 대표한다는 ‘단일대표권요구(Alleinvertretungsanspruch)’도 중단했다.

이로써 두 독일이 유엔에 가입하는데 장애물이 없어졌고, 동서독은 1973년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동독은 이를 전세계로부터 정회원, 독립적 주권국가로 확증 받은 것으로 간주했다.

곧 동독의 ‘2민족’ 주장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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