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력에 대한 자신감과 자만심 바탕으로 한 전쟁협박'

【뉴스퀘스트=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 동독은 자본주의 서독과 별개의 독립국가임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1974년 헌법을 개정해 통일조항을 삭제하고, ‘2국가론’에 이어 ‘2민족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동독 외무장관 오스카 피셔가 ‘사회주의 민족’과 ‘자본주의 민족’이라는 2민족론을 제기하면서, 동독 사회주의 동독 국민은 서독과 다른 새로운 독일 민족임을 주창한 것이다.

이후 동독은 국제무대에서 외교적으로 크게 성과를 거두었다. 1975년 7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에 호네커가 국가 원수로 참석함으로써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성을 과시했다. CSCE의 출범을 알린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참가국은 서로의 주권 평등과 개성, 그리고 특히 법적 평등, 영토 보전, 자유와 정치적 독립에 대한 각 국가의 권리를 포함해 주권에 내재하고 포함되는 모든 권리를 존중할 것이다”라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동독은 1970년대 말까지 세계 거의 모든 나라와 수교했다. 1978년까지 동서양의 123개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1980년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이 되어 2년간 활동했다. 1980년 동독은 거의 200개국에 대사관, 무역 및 군사 사절단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동독을 개별적 주권국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일될 때까지 동독을 국제법상 독일의 일부로 간주했다. 동독을 정치적 실체로서만 인정한 것이다.

이 사실은 서독 헌법인 ‘기본법’에서 알 수 있다. 전문(前文)의 ‘재통일명제(Wiedervereinigungsgebot)’, “모든 독일 주민은 자유로운 민족자결로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완성할 것이 요청된다”는 변함이 없었다. 동서독 ‘기본조약’ 부속문서인 ‘서독 연방정부가 동독 정부에 보내는 서한’에서 “이 ‘기본조약’은 서독의 ‘기본법’ 전문에서 명시된 재통일명제의 정치적 목적에 반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또한 ‘기본법’ 제23조 “독일의 그 밖의 지역에 대해서는 편입 후에 ‘기본법’이 효력을 발생한다”는 조항과, ‘기본법’ 제146조 “이 ‘기본법’은 독일 국민이 자유로운 결정으로 의결한 헌법이 효력을 발생하는 날에 그 효력을 상실한다”는 두 통일조항을 그대로 두었다.

동서독 ‘기본조약’에 국적에 관한 문제를 규정하지 않았다. 서독 주민은 여전히 서독 국적이 아니라 ​​독일 국적을 가졌다. 이로 인해 동독 주민이 독일 국적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들이 동독을 떠나거나 탈출한 경우, 그들은 외국인이 아닌 독일인으로 간주되었다.

“독일 민족은 하나고 독일 국민도 하나다”라는 원칙이 통일될 때까지 서독 정부와 서독 주민에 내재했다. 서독은 대외적으로 전독일단일대표권 요구를 삼갔으나, 서독이 전독일 및 전독일민족을 유일하게 대표한다는 사실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 상징적 사례가 동독에 대가를 지불하고 동독 정치범을 자유케하여 서독으로 데려오는 ‘자유거래(Freikauf)’였다. 동독 주민이지만 독일인, 독일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과 인권 개선에 서독 정부가 나선 것이다.

서독은 ‘접근을 통한 변화’를 정권 변화와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헌법 ‘기본법’에 명시한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를 확고히 하고, ‘라인강의 기적’과 ‘Made in Germany’로 상징되는 경제력을 키우면서 동독 주민 변화를 위한 노력은 보수 정권인 헬무트 콜 정부 시기 더 활성화되었다.

결국 1989년 11월 9일 동독 주민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고, 그들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1990년 10월 3일 서독 ‘기본법’ 제23조에 따라 동독이 서독에 ‘편입’하는 형태로 통일을 이루었다.

동독의 2국가 주장은 소련에 의해 주어졌다. 2국가론 심화와 2민족론 주장은 동독이 서독을 정치·군사·경제·사회 등 모든 면에서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객관적 열세의 환경 속에서 나온, 수세적 입장에서 국가 존속을 위한 자구책이었다.

김정은의 ‘대한민국 호칭’과 ‘동족 거부’는 첫째, 배경·상황적 측면에서 ‘2국가·2민족론’을 주장한 동독과 다르다. 북한은 이미 1991년 우리와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했고, 유엔에도 동시 가입했다. 어찌되었건 사회주의권은 물론이고 자유세계의 국가들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동독의 소련과 같이 김정은에게 이를 요구하는 종주국이 있는 것도 아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 동독의 GDP는 서독의 10.3%, 1인당 GDP는 서독의 39.7%에 불과했다. 2국가·2민족을 주장할 70년대는 소련의 지원도 있었고 동독 경제가 그래도 어느 정도 돌아갈 때라 이 수준보다는 나았다.

현재 북한의 GDP는 우리의 2%가 되지 않고, 1인당 GDP는 5%에 미치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동독보다 훨씬 열악한 북한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의 ‘대한민국 호칭’과 ‘동족 거부’가 동독과 마찬가지로 수세적 입장에서 자신과 김씨 일가가 대를 이어 통치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이라도 유지하려는 별개의 독립적 주권국가 주장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정은은 둘째, 목적 측면에서 동독과 다르다. 그의 ‘대한민국 호칭’ 및 ‘동족 거부’가 ‘전쟁 협박’에 연계되어 있음을, 그 바탕에는 핵무력에 대한 자신감·자만심이 놓여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핵보유로 김정은은 체제 존속을 의심치 않는다. ‘대한민국 호칭’ 및 ‘동족 거부’의 노림수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전쟁의 문턱을 낮추기 위한 ‘공세적 위장 독자국가 노선’이다.

첫째, 경제난을 극복할 능력도 방법도 없는 김정은은 전쟁 분위기 조성으로 북한 주민의 이완·이반을 통제하면서 시간을 벌고자 한다.

둘째, 중·러 줄타기를 통해 난국을 그럭저럭 버티는 ‘머들링 스루(Muddling Through)’ 하면서, 도발로 한·미의 정권 변화를 기다림을 넘어 유도하고자 한다. 미국과 ‘빅딜’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셋째, 남북 공존을 지향하는 듯 보여 우리 사회 내 대북 유화적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면서 남남 갈등·분열을 조장한다. 통일 의지를 꺾고, 통일 의식을 형해화 시키고자 한다. 대남 기구·매체 개편이 끝나면 곧 위장 독자국가 나팔을 불어제칠 것이다.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넷째, 핵심은 통일 전쟁의 실제 저울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보여주듯이 핵무기로 위협하면 외부로부터의 참전은 차단될 것으로 상정하고, 주한 미군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중국의 대만 침공을 결정적 기회로 노린다.

김정은이 전술핵공격잠수함, 군사정찰위성을 선보인데 이어 극초음속미사일, 핵어뢰, 신형 순항미사일, 잠수함발사순항미사일(SLCM)을 연이어 날리는 상황이다. 김정은이 수세적 입장에서 체제 유지를 위한 별개의 독자국가 노선을 걸으려 한다는 한가한 단정을 입에 담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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