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두 남녀의 이별, 더는 지체하기 어려운 긴박한 시대 상황을 암시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떡메 치는 고향집(20호 1956년)
떡메 치는 고향집(20호 1956년)

▲떡메 치는 고향집(20호 1956년)

리순종은 견실하고 강인한 인상에서와 같이 남과 북에서 공히 미술가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였고 꾸준한 성공가도를 달린 미술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그림은 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진국의 맛과 냄새가 물씬 풍겨오고 묵직한 기풍을 지니고 있다. 그의 화풍에서는 정통한 아카데미즘 유화의 바탕에서 향토적 정감과 토속적 향취가 진하게 농축되어 있다.

두꺼운 가마니 포대를 잘라서 화판으로 사용한 이 그림은 유화물감이 떨어져나갈 까봐 물감을 겹겹이 바르고 촘촘히 정성스럽게 칠해져 있다. 그림이 떨어져 나간 자리는 가마니의 날실이 그대로 드러나 있지만, 그림의 전반적인 경향과 실질적인 분위기와 맞닿아 있어서 그 자국이 쉽게 표시를 드러내지 않고 묻혀 있는 형국이다. 마치 이 그림 속 지붕 위 볏집의 마띠에르에서 느껴지는 감촉같은 입체감처럼 가마니 캔버스 오브제의 원형과 질감이 세월의 고뇌와 작품의 무게감을 생생히 전달해주고 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고향집에서 떡메를 치던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그린 그림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의 집에는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대신 형제간에 우애좋게 시소타듯 떡메를 찧고 있는데, 어머니는 흐뭇하면서도 너무 힘이 들어간 형의 동작을 다소간 불안한 듯이 보며 살살하라고 주문을 넣고 계신다.

호박꽃 속에 파묻힌 여동생은 이따금씩 물을 뿌려주며 떡을 찰지게 찧도록 오빠들을 격려하고 있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일어서는 56년 시기에 먹음직스러운 흰 떡과 평화로운 농촌의 정경을 통하여 삶의 풍요와 가정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다.

설경(8호 1957년)
설경(8호 1957년)

▲설경(8호 1957년)

동면에 접어든 나뭇가지와 하늘과 땅에도 우수와 회상이 잠겨 있다. 나무의 피부결과 설경의 눈밭과 대기에 스며든 색감은 화사로운 은백색의 눈빛이 아니라 회백색의 침잠된 잿빛이다. 황량하고 메마른 정서에 생기를 불어넣는 포인트는 다름아닌 소실점으로 멀어져 가기 직전의 두 남녀이다.

화폭의 중앙에 아련하게 배치된 두 남녀는 거리를 두고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두 남녀가 발산하는 온기가 퍼져나가며 전체 화면을 포근하게 감싸안고 있다. 지난 시기 우리의 1세대 화가들의 색깔 톤은 분위기가 가볍거나 들뜨지 않고 사유의 무게로 가라앉아 있으며, 묵직하고 고독한 느낌의 둔중한 파스텔톤이 주류를 이룬다.

어렵고 험준한 시기를 살아온 데다가 당시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저미는 사연들이 자신의 가슴을 향하여 아픔을 파도 속에 실어 날라와 부딪침을 겪었기 때문이다. 강아지처럼 눈을 반가워하거나 설경을 환상적인 빛 속에 녹여내는 감미로운 감상을 작가의 들뜬 감흥으로 포용하기 어려웠던 시절이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두 남녀는 모자지간이거나 연인사이 같다. 남자는 배낭을 짊어지고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여인은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운듯 이별의 결행을 일시 정지시키고 있지만, 더는 지체하기 어려운 긴박한 시대 상황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957년이다. 6.25 전쟁이 끝난 뒤 4년이 흘렀다.

작가는 6.25 전쟁 중에 월북을 하였는데 이제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안정된 삶을 꾸리며 자신의 쓰라린 상처를 보듬으며 옛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남자는 산중의 틈새로 야음을 틈타 한시바삐 저멀리 떠나지 않으면 자기 한몸도 보전시키기 어려운 지경이다. 고향산천에 남겨둔 어머니 혹은 애인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 꼭 살아있으라고 신신당부하며 자신도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의 결의를 눈빛으로 발산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는 마주치지 못하는 엇갈린 비운의 수레바퀴 위에 올라타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천경자와 이우환 화백 그림의 진위 논쟁이 여러 차례의 반박과 재반박의 사례를 통하여 한창 공방이 진행중이다. 오래된 유화에 있어 싸인으로 진위를 감별하는 방법은 조선화의 서명 필체 감별 양태 보다는 고난도이다. 먼저 싸인이 세월의 흔적 속에 자연스럽고 점차적으로 희미하게 벗겨져 있는 풍화작용을 거쳤느냐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필체의 색감이 그림의 바탕과 본류 혹은 특정 부위와 달리 외딴 섬처럼 느껴지거나 이방인처럼 튀지 않고 한몸처럼 붙어 있거나 녹아들었음이 직감적으로 다가와야 한다. 이렇게 직감 혹은 심안(心眼) 식별법으로 진위 분간 혹은 감별이 되지 않을 때 과학적인 물감 안료 검사와 화판 재질 등을 검토해야 하는데 이는 개인의 역량으로 하기 어려운 과학적 기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서 문화재 보존 차원에서라도 뒷짐만 지고 수사 형태로만 개입하는 것이 아닌 상시적인 감정관으로서의 책임자로 적극 나서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바인데, 요즘 신문 칼럼 등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건강한 미술 시장 활성화를 위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공론화되고 있어 다행스럽다.

국내 경매시장에서 유통된 이 그림에서 화가를 일제시대 ‘선전’작가 라고만 소개하고 있다. 일제시대 화가 등용문인 ‘조선미술 전람회’를 약자로 일컫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저항적 기백이 넘친 예술가는 ‘선전’이라는 등용문을 잠시 거쳐가는 인연으로 따랐을 따름이다.

리순종 화가
리순종 화가

◇리순종(1915~1979)은 누구인가?

그는 경상북도 대구시 동성동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네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1928년에 대구 공립보통학교를, 1933년에는 서울 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미술에 재능이 있어 1932년에 수채화 <아침의 광화문>을 그려 전람회에 입선하였다. 그후 수채화 <북악산>을 그려 소년미술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림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주위 사람들이 고무해주는데 신심을 얻어 1934년에 고학을 목적으로 해외에 나가 회화연구소에서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생활의 곤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반년만에 돌아왔다. 그후 다시 동경미술학교 유화과를 1941년에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배재중학교 미술교원으로 있었다.

8.15 해방 직후 좌익적인 남조선미술가동맹의 중앙위원, 미술교육분과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 서울사범대학과 경기중학교에서 미술교원으로 있었다. 그는 6.25전쟁 시기 월북하여 나머지 생애도 평야미술대학에서 후대육성사업을 하였다. 1951년에 있은 조선미술가동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어 일정한 기간 활동하였다.

해방 전후를 통하여 그는 미술부문의 교육자로 근 40년간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평양미술대학에서 조국의 미술인재를 키워내는 것이 나라의 미술문화를 발전시키는 중대한 사업이라는 높은 자각이 그로 하여금 지칠줄 모르는 정열과 왕성한 의욕을 가지고 이 사업을 꾸준하게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그에게 미술교육사업은 미술작품 창작 못지 않는 보람 있는 사업이었으며 미술가로 성장하여 성과를 거두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한생의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 또한 교육자로서의 더없는 긍지이며 자랑이었다. 이 기간 대학의 유화강좌, 소묘강좌에서 학생들의 기초교육과 실기교육에 힘을 쏟아 넣었고 교육과정에서 얻은 경험에 기초하여 <소묘기법>에 대한 글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그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큰 폭의 작품들은 대학 내의 교원들과 합작으로 형상의 요구를 실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는 이 글의 서두에서 ‘소묘는 모든 조형예술(회화, 조각, 건축, 공예 등)의 기초이며 토대이다. 사실주의 소묘는 사회 현실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에 대해서 깊이 연구 분석하고 관찰하는 능력을 배양하며 그 사물의 특성과 구조를 옳게 이해하고 또한 그를 전체적으로 종합 통일시키며 특히 정확히 묘사하여 형상화하는 힘을 배양한다.’라고 소묘의 본질과 사명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리순종 약력)

● 1915년 경상북도 대구시 동성동 출생

● 1928년 대구 공립보통학교

● 1932년 수채화《아침의 광화문》(25호)를 그려 제11회 선전에 입선

● 1933년 서울 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

● 1934년 일본에 건너가 회화연구에서 공부, 반년만에 귀국,

그후 동경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

● 1941년 동경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 귀국하여 서울배재중학교 미술교원

● 8.15해방 남조선 미술가동맹의 중앙위원, 미술교육분과 위원장으로 선거

● 6.25시기 서울사범대학, 경기고등학교 미술교사

● 1951년 평양미술대학 교원

● 1960~1970년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 해방전후를 통하여 미술부문의 교육자로 40여년간 있으면서 많은 후배들을 양성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