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러지 전인대 상무위원장. 오뚜기 같은 생명력으로 퇴임 후에도 국가부주석으로 활동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사진제공=런민르바오(人民日報)]
자오러지 전인대 상무위원장. 오뚜기 같은 생명력으로 퇴임 후에도 국가부주석으로 활동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사진제공=런민르바오(人民日報)]

【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중국은 매년 3월 초에 이른바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인대와 정협) 회의를 약 2주 가까이 열어 국가의 주요 정책과 현안들을 논의한다. 당연히 올해 제14기 2차 회의의 일정과 행사 역시 국회에 해당하는 전인대의 상무위원장과 정책 자문기관인 정협의 주석이 주재한다. 중국 내외의 언론으로부터도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중 전인대의 상무위원장은 당정 권력 서열 3위에 해당한다.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총리 다음의 막강한 실세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임기를 마치면 은퇴하는 것이 원칙으로 돼 있다. 현재 자오러지(趙樂際. 67) 정치국 상무위원이 맡고 있다.

중국 정계 정보에 정통한 베이징 소식통들의 최근 전언에 따르면 그는 그러나 다른 전임 전인대 상무위원장과는 달리 퇴임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퇴임한 후 은퇴하지 않고 국가부주석으로 옮겨 앉은 한정(韓正. 70) 전 상무부총리처럼 끈질긴 정치적 생명력을 과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때문에 별명이 부다오웡(不倒翁. 오뚜기)이 아닌가 보인다.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고향인 산시(陝西)성의 성도(省都) 시안(西安) 출신인 그는 이른바 즈칭(知靑. 문화대혁명 당시 하방된 지식청년)으로 1974년부터 4년 동안 칭하이(靑海)성 구이더(貴德)현에서 노동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10년 동안의 문혁이 1976년 종결되면서 그 역시 노동자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지칭 시절 주경야독한 덕에 명문 베이징대 철학과 진학에도 가볍게 성공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노동자 생활을 했던 칭하이성으로 돌아가 10여 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다. 그 공로로 나이 고작 36세 때인 1993년 성장조리(부성장보)에 파격적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1년 후에는 일거에 부성장이 되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다고 해도 좋았다. 나이 43세이던 2000년 부서기 겸 성장이 된 것은 하나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정치적 고향인 칭하이성에서 서기까지 마친 2007년 그는 그야말로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 고향인 산시성 서기로 자리를 이동한 것이다. 2012년 25명의 정원의 중앙정치국 위원이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해야 했다. 2017년 7명 정원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것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직책은 부정부패 척결의 칼을 휘두르는 자리인 중앙기율검사위 서기였다. 당정 고위 관료들에게는 완전 저승사자가 아니었나 싶다. 2022년 다시 상무위원 자리를 유지하면서 실세라는 사실을 입증한 그는 지난해에는 드디어 당정 권력 서열 3위인 전인대 상무위원장으로 발탁되는 경사를 맞이했다.

그는 남들은 한번 하기도 힘든 상무위원을 두 번이나 역임한 것에서 보듯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점 역시 많다. 우선 철학과 출신답게 상당히 논리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시 총서기 겸 주석조차 논리력에 근거한 그의 달변에 혀를 내둘렀다면 더 이상 설명은 필요 없다. 이에 대해서는 기자 출신인 베이징의 사업가 류즈화(劉志華) 씨의 설명은 들어봐야 할 것 같다.

“그는 학부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박사 학위를 가진 웬만한 당정 고위급 인사들보다 더 논리적으로 말을 잘한다. 타고난 것도 있으나 역시 문혁 때 즈칭으로 활동한 것과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것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원고 없이 2시간을 강연해도 되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얘기도 들었다. 주변 사람들을 진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저승사자로 불리면서 당정의 사정 작업을 총괄했던 책임자답게 추진력도 상당히 뛰어나다. 여기에 한 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끈기 역시 거론해야 한다. 젊은 시절부터 몸에 뱄다고 해도 좋을 상사에 대한 충성심 역시 장점으로 부족하지 않다.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두 전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그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던 것은 이로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게 바로 사정 작업 총책임자였던 전력과는 완전 반대되는 부정부패 연루설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홍콩 언론의 보도를 종합하면 최소한 다섯 번 정도였다. 실제로 몇 번 낙마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도 꼽을 수 있다. 그에게는 중국인이라면 대부분 안다고 봐야 하는 동생이 한 명 있다. 자오러친(趙樂秦. 64) 전 광시(廣西)장족(壯族)자치구 구이린(啓林)시 서기가 주인공으로 2021년 1월 해임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제는 형의 후광을 등에 업고 모종의 금전적 비리를 저질러 낙마하지 않았느냐는 소문이 파다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 역시 연루됐다는 설이 항간에는 난무했다. 그가 2015년 낙마한 후 열린 재판에서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은 저우융캉(周永康. 82) 전 상무위원에 뒤이은 또 한명의 부패 호랑이(거물)가 될 것이라는 설이 당시 파다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다오웡이라는 별명처럼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다른 부패 연루설 역시 아슬아슬하게 피해갈 수 있었다.

홍콩 언론을 비롯한 외신들의 보도를 종합하면 그는 아직도 부패와 연결돼 있다는 의혹에서 썩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에도 낙마설이 나돈 것은 다 나름의 까닭이 있다. 그럼에도 이전까지 보여준 끈질긴 정치적 생명력을 보여줄 경우 무사히 임기를 마친 후 국가부주석으로 활동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30대에 성장조리에 임명된 이후 2017년 최연소 상무위원이 된 저력은 역시 괜한 게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