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간마을'...초여름 싱그러운 기운과 함께 진한 꽃향기 화면 밖으로까지 진동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여인초상(1967년 6호)
여인초상(1967년 6호)

▲ 여인초상(1967년 6호)

동양화의 초상화 화법에서는 서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극사실주의적인 전통이 확립되어 있었고, 더 나아가 전신사조(傳神寫照) 이론과 배채법(背彩法)의 회화 기법이 적용되었다. 초상화를 그릴 때 터럭 한올까지 빠뜨리면 안된다는 철저한 사실주의 정신에 충실했으며, 인물의 외형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세계 즉, 인물의 정신, 기운 그리고 인격 등을 표출해 내야 한다는 ‘전신사조’를 구현하였다.

초상화나 불화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 살색처럼 자연스럽고 은은한 색감의 발색 비결은 배채법이다. 얼굴 등에 채색할 때 비단이나 화선지 화면 뒤쪽에서 흰색을 칠하고 앞쪽에 다시 엷게 붉은 색이나 황토색 계통의 색을 칠함으로서 중간톤에 의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살색 표현과 깊이감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바탕색은 여인 초상의 경우 옅은 연녹색을 종종 사용하였고 대부분은 은은하고 연한 황토색 계열로 하여 인물의 입체감의 보장과 배경과의 자연스러운 일체감을 돋보이게 하였다.

허영의 유화 초상화에서도 전래의 동양화 초상의 연한 연록색 배경을 깔고 있다. 허영의 색채 표현의 두드러진 특징은 색채의 부드러운 계조와 본색 위주의 색통일이 품격 있게 발현된다는 평가다. 이 그림에서도 여인의 분홍 저고리 옷고름마저 동일한 분홍빛으로 통일되어 단아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안겨주고 있다. 그는 색면 분할시의 거친 터치와 두터운 질감의 유화맛이 듬뿍 나는 표현을 지양하고 원만한 굴곡과 이어짐으로 처리하고 있다.

보름달 같은 여인의 둥그스름한 인물 형상 표현에서도 부드러운 색조와 함께 온유한 이미지가 두드러지고 있다. 도톰하고 자연 미감의 붉은 입술에서는 여인의 미적 형상의 백미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다소 충혈된 눈빛은 생활 전선에서 강인한 주부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강조해 보이려는 듯하다.

허영은 얼굴을 비롯한 인체의 모든 형상에서 자연환경에 의해 변화된 색이 아니라 고유하게 느낄 수 있는 본색을 위주로 하는 채색 방법을 살려 색대비 관계를 의도적으로 폭 넓게 설정하였으며, 고유한 민족적 색채 감정이 짙게 나타나도록 노력한 화가라는 칭찬 세례를 받아왔다. 허영의 유화는 색채와 정서, 형상 표현에서 조선화처럼 선명하고 간결한 인상을 준다는 평가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마치 인상파 화가들의 주특기인 빛과 대기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색채 표현에 반기를 든 세잔 화가의 본색 위주의 색채 구사력에 대한 평가와 유사한 비평의 시각이다.

북한 여인네들은 북한 남정네들의 마초적인 성향을 감싸안고 용인할 정도로 여인으로서의 후덕스러운 여유와 성정을 아직도 견실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 사회에서 배급제가 거의 끊긴 가운데 시장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기류 속에서 요즘은 시장에서 가정 생계를 책임지는 부인들이 많아져서 종전의 남편과 부인의 위상이 뒤바뀐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남편과 부인에 대한 종래의 가치관의 혼란상을 피하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에 처할수록 서로를 위하고 보듬어가는 따뜻하고 합심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삶을 타개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간마을(44-25 1964)
산간마을(44-25 1964)

▲ 산간마을(44-25 1964)

1924년생인 허영은 조선화 기법을 유화에 적용하여 우리식 유화를 선도하려고 무던히도 애쓴 1.5세대 작가군 중 가장 선배에 속하면서 거의 1세대 작가군의 막내에 위치하기도 한 인상을 심어주곤 한다. 한상익 스타일처럼 몰골법과 같은 활달한 붓질을 통한 조선화 기법을 응용하려고 하기 보다는 담채와 같은 맑고 고운 색채 구사를 통하여 산뜻하고 밝은 유화의 화면을 구성하는데 주력하였다.

​물론 그림 성격에 따라 인물화가 주축일 때는 전면적으로 전개하기도 하고 풍경화일 경우는 부분적으로 도입할 때도 있었다. 위 그림에서는 손에 닿을 듯한 좌측의 근경은 유화의 마띠에르가 고스란히 담겨 있고 오목조목한 명암에서 파생되는 유화맛이 느껴진다. 그와 대칭으로 펼쳐져 있는 맞은 편의 우측 산자락도 마찬가지로 엷은 주름 옷과 같은 어렴풋한 유화적 질감이 입혀져 있다.

하지만 대각선 구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밀집된 마을과 중간을 가로지르는 강줄기와 평야, 그리고 원경의 겹겹이 포개져 있는 산맥들은 수채화를 방불케하는 조선화의 여운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가운데 들판과 접목한 강줄기를 중심으로 한 둥그스름한 원형 구도는 전반적으로 화목함과 부드러움을 강조하기 위한 배치라고 보여진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원형의 테두리 내에 오밀조밀 안락하게 밀집한 부락의 풍경도 사생한 것과 같이 섬세한 필치의 공력이 배어 들어 있다.

​ 공기원근법에 따라 부감도의(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려진 화면은 중경의 투명한 하늘색 강물과 원경의 첩첩 산중의 풍경과 하늘은 아련하고도 오묘한 색채 변화를 가하면서 화가 개성이 여실히 느껴지는 간결한 색채 표현력이 돋보인다. 좌우측 산에 즐비한 바이올렛(자주보랏빛) 색계열의 라일락 꽃나무들은 화려한 자수로 수놓은 것처럼 산골 풍경의 단조로움을 방지해주는 색채 미학을 돋구어 주고 있다. 초여름의 싱그러운 기운과 함께 그 진한 꽃향기가 화면 밖으로까지 진동하여 생생히 전해지는 느낌을 선사한다.

허영 화가
허영 화가

◇허영(1924.6.23 – 1984.12.16)은 누구인가?

경기도 경성부(지금의 서울) 청수동의 막노동자 가정에서 출생한 허영은 경성수송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4살 때부터 제약회사, 운송주식회사에서 견습공으로 일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간이 있어 부모들도 아들을 미술가로 키워보려고 하였으나 생활이 곤란하여 희망을 실현시켜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신심을 잃지 않고 자습으로 노동의 여가시간에 그림 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기량을 연마해 나갔고, 해방 초기 강원도 예술공작단 무대미술가로 활동하면서 미술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는 1960년대에 창작의 개화기를 맞이하여 대표작 유화 <농장의 저녁길 1965년> 등 국보적 가치가 있는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허영은 이 작품과 관련한 글 ‘나의 첫 시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농장의 저녁길>에서 유화에서 조선화적인 수법을 도입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오늘 미술작품의 사상예술적 질을 높임에 있어서 민족적 특성을 보다 훌륭히 구현하는 문제는 모든 미술가에게 제기되는 요구지만, 특히 유화가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논의들을 해왔던가! 유화 창작에서 조선화의 수법을 도입해보려는 나의 창작적 충동은 바로 이러한 논의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중략) 우선 나는 나의 결심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미술 창작에서 민족적 특성 구현에 대한 미학이론적 준비를 더 확고히 갖추기 위한 학습부터 시작하였다.

이 학습을 통하여 나는 내용과 형식 간의 호상 관계 문제, 구체적 생활 반영과 인민들의 사상감정에 대한 문제, 민족고전들에 대한 비판적 계승 등에 대한 일련의 미학실천상 문제들에 대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였으며 나의 창작 실천에 필요한 도움과 힘을 얻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발췌 편집하였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논평한 그의 우리식 유화에 얽힌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을 이어서 보자. “허영은 유화에 조선화 수법을 도입하기 위해 형식을 효과적으로 살릴 수 있는 적합한 생활 내용을 발견하는 것을 선차적으로 내세우고 민족적 색채와 정서가 풍부한 농촌현실에서 그것을 찾으려 하였다고 하면서 이를 위해 농촌에 나가 현실체험을 하는 과정에 쟁반같은 둥근달이 동산 위에 솟아오르고 명절같은 옷차림을 한 농장원들이 삼삼오오 떼지어 구락부로 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정황은 비록 저녁이었지만 농장마을이 환하게 안겨오고 농장원들의 얼굴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이러한 밝기가 보장되는 계기는 밝고 선명한 조선화의 형상적 요구를 실현할 가능성을 준다고 보고 이에 기초하여 창작에 달라붙었다. (중략)

유화 <농장의 저녁길>에 구현된 조선적인 면모는 무엇보다도 내용에서 민족적 색채가 진한 생활현상을 바로 선택한 것이며 또한 형상 방법에서 선명성을 실현하고 필치의 간결성, 섬세성을 보장한 것이다. 형상의 선명성은 주로 색채 표현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명암관계를 기본으로 대상 표현을 실현하는 유화의 고유한 형상방법에 매여달리지 않고 조선화에서와 같이 색채의 부드러운 계조를 살리면서 화면의 전반적인 색통일을 보장하였다. 형상의 간결성은 주로 필치에서 나타나고 있다. 투터운 색층과 거친 탓치를 피하고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저녁의 미묘한 분위기를 부드럽고 정교한 필치로 잘 살리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간이 있었으나 자습으로 로동의 여가시간에 그림을 배운 미술가이다. 1960년대에 창작의 개화기를 맞이하여 국보적가치가 있는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의 특징은 색채의 부드러운계조와 본색위주의 색통일이다. 그의 여러 작품들은 조선미술박물관에 국보로 소장되어 있다.

(약력)

경기도 경성부 청수동에서 출생.(서울출생)

경성수송공립보통학교 졸업, 제약회사, 운송주식회사 로동.

1945년초 강원도 예술공작단 무대미술가.

1946년 함흥미술가동맹 서기장,

1949년 조선미술가동맹 현역미술가.

1953-1960년 종군화가.

1953년이후 조선미술가동맹분과지도원, 조선미술가동맹 평안북도 지부장, 황해북도 현역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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