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완 / 중학교 교사

세월호 사건이 터진 지도 벌써 넉 달이 되어 가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개조', '적폐 척결' 등의 어마어마한 용어를 써 가며 세월호 이전과 이후는 확실히 달라져야 하고 달라지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청와대와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무엇 하나 미더운 게 없다. 진상조사도, 특별법 제정도 그들의 정치적 계산 앞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7.30 보궐선거가 여당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이제는 경제를 살리자’며 노골적으로 손을 털고 있다.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는 유가족들을 ‘노숙자’ 운운하며 비난하는 여당의원들의 뻔뻔함에도 치가 떨리지만, 선거참패로 특별법 제정은커녕 자신들 코가 석자인 야당의 지리멸렬에 더 절망스럽다. 

살아가는 이유였을 자식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가슴이 찢어지고 피가 끓었을 유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재발방지를 위해 엄정한 진상규명과 이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일이 정치인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모든 방송에서 클로우즈업해 보여주었던 ‘대통령의 눈물’. 그는 화면 속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주르르 눈물을 흘렸고, 우리는 그 눈물에서 희망을 가져보려 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다. 100일이 넘도록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절규하는 그들을 어쩌면 이리도 철저하게 외면할 수 있는지…. 

세월호 사건 100일 째 있었던 추모제가 끝나고, 행진을 시도했던 유족들의 절절한 요구에 정부당국은 수백 대의 경찰차와 병력으로 응대했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겠지만, 끊이지 않고 터지는 군 내 폭행사건을 처리하는 군 당국의 태도도 똑같다. 사건이 터지면 진상조사보다는 은폐하기에 급급하고, 은폐에 실패하면 뒤늦게 찔끔찔끔 사과하고 재발방지 약속하고,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사건은 또 터지고……. 사건의 진상규명과 실질적인 재발방지보다는 숨길 때까지 숨겼다가 시간을 끌고 사람들의 건망증을 이용해 차고앉은 자리를 보전하는 게 먼저인 것이다.

실질적으로 개선된 것은 없는데, 자고 일어나면 뻥뻥 터지는 대형 사고들 덕에 많은 사람들이 이제 웬만한 인명사고에는 눈 하나 깜박 안 하는 담대함(?)을 가지게 된 건 아닌지 싶다. 이런 담대함과 건망증이 아니고서는 이 사회에서 살아내기가 어려울 테니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사건과 사고들이 줄을 잇고, 제대로 된 해결도 대책도 무망하다면 정치는 왜 필요한 건지, 피같은 세금은 왜 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몇 해 전 모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의 대사가 떠오른다.

현실 속에서 “정치란 정당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것, 정 떨어지고 치 떨리는 것, 정기적으로 치사한 짓 하는 것, 정 줄만 하면 뒤통수치는 것, 정상인은 없고 치기배만 가득한 것, …… 정리하면 정마담 치마폭보다 더 구린 것.”이란다. 

세월호 사건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기는커녕 한쪽에선 ‘보상금’ 들먹이며 ‘시체장사’로 폄훼하고 있고, 정부와 여당은 이런 분위기를 나서서 조장하고 있다. 특별법 타령은 그만하고 보상금이나 챙겨서 꺼지라는 투다. 이제 그만 경제를 살려야한다는 거다. 도대체 누구의 경제를 살리려는 건가?

정치가 이런 것이고, 정치인들이 이런 족속들이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권력을 주어선 안 되 는 거였다. 그들이 ‘국민’을 내세워 사욕을 채우고 우리 위에 군림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눈곱만큼의 진정성도 없는 자들이 거짓시늉으로 권력을 휘두르게 놔둬서는 안 되는 거였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고, 정치가란 작자들도 원래 그런 거라고 손놓고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세월호 100일 째에 진행된 문화제에서 고인이 된 이보미양은 가수 김장훈씨와 함께 ‘거위의 꿈’을 듀엣으로 불렀다. 영상 속에서 노래하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실신할 듯이 절규했던 어머니의 모습에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20일이 넘도록 단식을 끝내지 못하는 세월호 유족의 모습을 외면하지 못하고, 함께 단식에 참여한 가수 김장훈씨를 보며 우리 정치가 저버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서로 기대고 지탱해 주어야 살아갈 수 있기에 ‘人’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드라마 속 주인공이 바라는 정치는 이런 것이었다.

“근데 내가 바라는 정치는 정성껏 국민의 삶을 치유하는 것, 그거예요.” “정치요? 그까짓 게 뭔데요? 못사는 사람은 잘 살게, 잘 사는 사람 베풀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옳고 그름이 바로 서지 않는 지금, 기득권자들이 ‘국민’의 이름을 훔쳐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짓밟는 지금, ‘정치’란 함께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매순간의 삶이며, 그래서 결국 우리 개개인 모두가 지고 가야 할 우리들의 몫이라는 걸 무겁게 깨달아야 한다.

전국완 교사의 이 글은 <인권연대> 517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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