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스토리] 이기은 기자 = 날 때부터 '센터'가 운명인 여자아이도 있을 것이다. 골목을 질주하느라 단련된 다리는 길고 근육질이었으며 풍채가 좋았다. 150~160cm 신장의 고만고만한 또래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그의 등뒤를 에워쌌다. 소녀의 주변을 둘러싼 공기 입자마저 역동적인 뜀박질을 뛰는 듯 했다. 든든한 이 여자 리더에겐 '친구들을 건드리면 발차기로 응징하겠다'는 당찬 각오가 있었다.

10대들에게 친구란 목숨과도 같은 무게다. 동료들을 자신의 힘으로 지켜내겠다는 괄괄한 정의감 같은 것. 그래서 영화 '써니'(2011)의 믿음직한 골목대장 같은 춘화(강소라), KBS2 드라마 '드림하이'의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여고생 신해성(강소라)은 차라리 어떤 공익에 가까웠다. 공부를 잘하거나 사회에 보탬이 될만한 재능을 갖지 않아도 괜찮았다. 소녀에게 공동체의 삶이란 그 자체로 지켜낼만한 가치가 있는 절대적 무엇이었으니까.

그러나 왈가닥에게도 인생의 시련들은 엇비슷하게 당도했을 것이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만만하지 않아서 어른의 문턱에 들어선 사람들은 모두들 각자도생을 시작한다. 그때부턴 누구도 타인에게 쉽사리 책임질 수 없는 관심을 건네지 않는다. 소녀는 험난한 연예계를 비롯한 모든 공동체 속에서 떠밀리듯 숙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SBS 드라마 '못난이 주의보'의 나도희(강소라)는 숙녀로서의 사회생활 고군분투기를 펼친다. 나도희에겐 깔끔한 커리어우먼 블라우스 아래 내면의 허전함을 숨긴, 또래 여자들의 전형성이 있었다. '닥터이방인'의 흉부외과의사 오수현(강소라)도 마찬가지다. 한국드라마 속 강인해보이지만 트라우마가 있는 젊은 여자 캐릭터는 궁극적으로 내면의 치유를 목표로 달린다. 이렇듯 구김살이라고는 없었던 한 소녀는 강인한 외양을 방패처럼 장착한 '외강내유'형의 숙녀로 성장하게 된다.

강소라의 군살없는 보디라인이 화제가 되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요가·발레·필라테스에 관련한 자세교정 다이어트는 이내 강소라 관련 기사의 헤드라인이 됐다. 그런데 강소라의 몸매 관리는 타 여배우들과는 좀 다른 측면이 있다. 비단 카메라 안에서 좀더 예뻐보이고자 하는 여배우의 흔한 욕망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여배우 강소라는 반드시 젖살이 빠져야만 했다. 젖살이 빠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이기도 하고 은유적인 의미이기도 한데, 이는 골목대장 이미지의 소녀가 성숙한 한 여인으로 도약하는 필연적 과정을 뜻한다. 그래서 자세교정과 다이어트는 여배우로 장기존속하기 위한 강소라의 중요한 선택이자 과제였다.

 

이후 강소라는 맞춤옷을 입은 듯한 케이블TV tvN 드라마 '미생'의 안영이 역할을 따냈다. 당초 강소라가 안영이 역할에 투입됐을 때 항간에서는 "원작 이미지의 안영이보다 투박하고 드센 느낌"이라는 우려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중반까지 달려온 '미생' 속 안영이는 현재 시청자들의 뜨거운 호평을 이끌어내며 순항중이다. 강소라의 여장부 얼굴과 그에 수반된 강단 있는 연기톤은, 안영이가 왜 반드시 강소라여야만 했는가를 증명한다.

유창한 외국어, 냉철한 판단력, 뛰어난 업무수행력을 가진 안영이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남자로 태어났다면 겪지 않아도 될 시련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그래서 안영이의 주된 갈등은 성차별적 태도로 자신을 부당하게 괴롭히는 자원팀 하 대리(전석호)와의 기싸움이다. 그럼에도 안영이는 버티고 또 버티며 원 인터내셔널에 기어코 자리를 잡으려 한다.

예를 들어 10회의 안영이는 현장 공장이 파업하자 자신의 힘으로 대형트럭을 운전하며 결국 하 대리를 승복시키고 만다. 이는 '여자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남자직원들의 편견에 맞선 안영이의 투항이다. 드라마적 클리셰인 듯 싶지만 이러한 묘사가 끝내 현실 풍경으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의 권리가 신장됐다곤 하나, 안영이만큼의 심리적 모욕과 불합리한 처사를 당하는 직업여성들은 오늘날에도 숱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영이가 처참하리마치 부당한 회사생활을 버텨내면서 완생(完生)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결국 여성권리 신장을 위해 투쟁해온 진통의 역사를 은유하는 부분이다.

부리부리한 눈매 속 그윽한 눈빛, 투박한 듯 고혹적인 느낌의 도톰한 입술, 사나이의 기개를 갖춘 강인한 콧날. 한국 배우계에서 좀처럼 드문 '여장부' 관상을 가진 강소라는 이렇듯 세상의 많은 동료들을 지키는 방향으로 씩씩하게 나아간다. 어느덧 속마저 단단하게 여물어버린, 이 '외강내강'형의 여전사를 우리가 마침내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진=영화 스틸컷, SBS·tvN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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