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문학의 산실, 담양기행

[트루스토리] 따뜻한 봄을 알리는 3월 어느 날, 한 여행사에서 주관한 담양 문학기행에 참가했다. 서울에서 버스로 4시간 반을 달려 광주 무등산을 마주 보고 펼쳐진 담양에 도착했다. 일단 담양 어귀의 번듯한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소문대로 가짓수도 많고 반찬마다 맛이 있었다. 식사 후 우선 송강 정철이 초기작품인 성산별곡에서 썼다는 식영정에 들렸다. 식영정 아래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오벨리스크처럼 생긴 기념탑이서 있었다. 그 뒤로 연못 딸린 부용당과 서하당이 있었고, 주변에 사당과 장서각이 있었으며, 언덕배기에 올라서니 비로서 식영정이 나왔다. 부용당과 서하당은 정철이 동문수학한 벗이자 인척인 김성원의 소유였으며, 식영정도 김성원이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장인 임억령을 위해 세운 정자라고 한다. 정철은 이곳을 드나들며 임억령으로부터 시를 배웠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았던 김성원의 풍류를 읊은 것이 성산별곡이라 한다. 식영정은 언덕 아래를 흐르는 광주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수리 중이었고, 바로 옆에 성산별곡 시비가 서 있었다.

 
식영정 인근에 가사문학관과 정철이 벼슬길에 나가기 전까지 수학했다는 환벽당이 있다는데, 시간이 없어 들르질 못했다. 환벽당은 나주목사 출신의 김윤제가 후학을 가르친 곳으로, 정철과 김성원도 이 곳에서 같이 공부했다고 한다. 정철은 서울에서 태어나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후 낙향했는데, 김윤제가 거두어 가르치면서 외손녀와 결혼시키고 과거 급제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었다고 한다. 식영정에서 버스로 15분쯤 떨어진 곳, 높다란 언덕배기에 정철이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썼다는 송강정이 있었다. 너른 담양벌 너머에 무등산이 바라다보였고, 예저네 이 정자 밑에 송강이 흘러 호를 송강이었라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부근에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강물도 거의 말라 풍광이 영 예전 같지 않았다.

정철은 4차례에 걸쳐 당쟁에 휘말려 파직과 복직을 되풀이했는데, 낙향 후 임금의 부름을 기다리며 군신 간의 정리를 남녀 간의 연정에 빗대어 간곡한 마음을 풀어놓은 작품이 전후 미인곡이라고 한다. 송강정 옆에는 사미인곡 시비가 서 있었는데, 교과서에 실렸던 가사문학의 백미를 여기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사미인곡도 좋지만, 작품성은 속미인곡이 더 절묘하다는 평이 많다.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이자 많은 교훈적 시조를 써서 국문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분인데, 한편으로는 서인의 영수로서 수많은 반대파를 죽이고 탄압한 허물 때문에 비판을 받은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는 선조 때 좌의정까지 지냈는데 세자책봉 문제를 거론하다가 쫓겨나 임란 와중에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아사했다고 한다. 오늘은 애써, 윤선도와 함께 우리 시가 문학사상 쌍벽을 이루는 문인 정철로서만 그를 기억하고 싶다.

다시 버스로 이동해 담양군에서 조성한 메타세콰이어길을 걸은 후, 송순의 면양정으로 향했다. 이 정자도 높다란 언덕배기 경치 좋은 곳에 서 있었는데, 송강정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자그만 초가 정자였다가 후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기와를 얹었다 한다. 송순은 한성 부윤 등 고위직을 지내고 은퇴했으며, 91세까지 장수한 사람으로, 면양정에서 바라본 사계의 풍광을 담아 면양정가를 짓고 많은 사조를 남겼다고 한다. 그 중에서 명종이 옥당에 내린 국화를 보고 지었다는 ‘풍상이 섞어 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 /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 도리야 꽃인 양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라는 시조가 유명하다.

정철도 그의 문하생으로, 송순의 회방연(급제 후 60년째 여는 잔치) 때 정철을 비롯한 제자 4명이 스승을 태운 가마를 메고 행진했다고 한다. 송순은 ‘레 미제라블’을 쓴 빅톨 위고처럼 생전에 부와 명예를 모두 움켜쥔 복 받은 인물이다. 이번에 가보지 못했지만 담양에는 국내 최고의 민간 정원으로 불리는 소쇄원이 있는데, 소쇄원의 주인인 양산보는 조광조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조광조가 모함을 받고 유배된 후 사사되자 낙향해 소쇄원을 빗고 재야선비로서 자유롭게 살았다고 한다.

담양지역은 정자문화가 만개한 곳으로 이 곳에 김인후, 송순, 정철, 송시열, 기대승 등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 드나들며 사유와 만남의 지평을 넓혔다. 실로 호남의 8학군이라 할 만 했다. 이는 정자들이 하나같이 물과 숲이 어우러진 풍광 좋은 곳에 지어져 시적 감응을 불러 넣어줌으로써 ‘문학의 산실’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신이 지쳐 있을 때는 한번쯤 담양여행을 하면서 과거 재야선비들의 고고한 숨경을 느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유청식 독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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