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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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이규창 경제에디터] A그룹은 조선과 해운, 건설업 등을 영위하며 공격적인 M&A(인수합병)와 투자로 2000년대 급격히 사세를 확장했다. 유럽의 유명 유람선 제조업체까지 인수, 유럽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정도로 거칠 것이 없었다. 유람선은 선박 제조에 있어서 장인 정신이 깃든 종합예술품이었기 때문에 이름도 낯선 한국 기업의 인수는 가히 충격이었다.

이처럼 급격히 확장된 사세는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독이 됐다. 당시 글로벌 경기침체로 해운사들은 물동량 감소, 운임 하락에 시달렸고 미리 주문한 선박에 대한 잔금을 치르기 어려웠다. 조선사들은 발주량 감소에 따라 저가 수주에 매달려야 했다. 건설사들도 원가율 상승, 미분양 때문에 안팎으로 손실이 나기 시작했다. 경기 민감도가 높은 업종이다 보니 호황의 대가는 혹독했다. 이에 따라 A그룹에 대한 위기설이 본격화됐다.

재무제표 상 수조원의 현금성 자산을 앞세워 걱정할 것 없다며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던 A그룹은 위기설이 계속 확산되자 2009년부터 IR(투자 설명회)을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를 시작했다. 특히 A그룹은 CFO(최고재무책임자)를 내세워 증권사 애널리스트들과 신용평가사 연구원들, 언론사 기자들에게 공을 들였다.

덩치 큰 투자자들은 물론 소액 주주들의 불안심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기업 보고서와 기사를 쓰는 사람들부터 설득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개최해 자금 조달 방안을 설명했다. 그 내용은 지주사 전환과 비상장 계열사의 IPO(상장, 기업공개), Pre-IPO(상장 전 투자유치) 등을 골자로 한 재무 안정 계획이었다. 이를 통해 조달한 자금과 보유 현금성 자산을 합치면 혹여 발생할 수도 있는 유동성 위기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IPO와 Pre-IPO는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업황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실적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부채는 쌓여만 갔다. A그룹 회장이 수조 원이 소요되는 M&A에 출사표를 던지며 ‘끄떡없다’는 메시지를 던졌지만, 오히려 위기설을 키우며 많은 비판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결국 A그룹은 해체의 길로 들어섰고 한 때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던 회장은 수천억 원대의 배임·횡령 혐의로 구속되는 비운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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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A그룹의 설명회는 한 편의 사기극이었을까. 결과만 놓고 보면 완전히 사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A그룹이 자신 있게 밝힌 자금 조달 계획과 실적 회복에 일부 기관 투자자들도 관련 채권, 주식관련사채, 주식 등을 매입했기 때문이다.(물론 모두 손실을 입은 것은 아니다).

IPO와 Pre-IPO로 조달되는 자금 규모는 악화되는 업황을 고려할 때 지나치게 낙관적인 수치였다. 설사 성공적으로 조달된다고 해도 차입금은 그 보다 훨씬 많았다. 게다가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한 영업력으로 실적을 끌어올리기에는 업황 자체가 너무 좋지 않았다. 조선과 해운, 건설 부문의 어려운 점을 메워줄 그룹 내 사업도 극히 미미했다. 따라서 A그룹이 최악의 시나리오 하에 조달 예상 금액에 미치지 못한 가격을 감수하고서라도 국내외 자산 매각을 서둘렀어야 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A그룹은 2009년 설명회에서 차입금(특히 해외 계열사 연결기준)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을 인정하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한 자구 계획을 발표해야 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A그룹은 자금줄이 막히고, IPO와 Pre-IPO에 그나마 참여 의사가 있는 투자자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며, 조그만 자산 조차 매각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잠재적 투자자 또는 인수자들은 ‘A그룹이 그렇게 어렵다고 인정하니 더 좋은 조건에 매입해야지’라고 여유를 부렸을 것이다. 또, 주식 투자자들은 관련주를 투매했을 수도 있다. A그룹이 ‘인정한’ 어려운 현실을 사실로 받아들인 투자자의 심리는 쉽게 붕괴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A그룹은 2009년에 어떻게 IR을 진행해야 했을까. 위기설 초기부터 개별 언론보도 등에 대응할게 아니고 자주 IR을 열었어야 했다. 위기설을 초기에 진화하면서 투자자들의 신뢰를 쌓는데 주력했어야 했다. 투자자들이 ‘A그룹은 투명하게 경영하는구나’라는 생각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이는 나중에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대단한 효과가 있다. 또, IR의 목적 중의 하나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또 다른 하나는 의견을 청취하는 것에도 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정말 중요한 시기에 열리는 IR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A그룹은 조금 더 보수적인 전망과 데이터를 제시했어야 했다. 당시 IR에서 모든 시나리오의 기반이 된 거시경제 및 업황 전망 자체가 너무 낙관적이었다. 물론 A그룹이 관련된 업황, 즉 조선과 해운, 건설 경기 등을 정확히 전망한다는 것은 사실 ‘신의 영역’에 가깝다.

투자의 귀재라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조차도 업황을 제대로 읽지 못해 종종 실패를 맛보지 않는가. 대규모 자금을 동원해 인수한 후 업황부진으로 다시 토해내거나 그룹 전체가 위기에 빠진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M&A의 귀재’와 ‘승자의 저주’는 그 간격이 종이 한 장 차이다. 따라서 낙관적인 전망 하에 내놓은 자구 계획을 허구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내부적으로나마 지속적인 거시경제 및 업황 악화를 염두에 두고 비록 전면에 내세울 수는 없어도 살짝 ‘플랜B’도 보여줬어야 했다. ‘우리는 이런 대안도 갖고 있다’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필요했다. 이는 단기는 물론 중장기적인 여러 약속들이 어긋나거나 늦어지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A그룹은 스스로 그러한 길을 차단한 셈이 됐다.

IR이 아닌 위기관리 부분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A그룹은 수조 원의 자금이 소요되는 대형 기업 인수전에 잇따라 뛰어드는 호기를 보였다. 여기에는 예정된 자구 계획이 이행되지 않자 다시 확산된 위기설을 진화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투자자의 신뢰를 상당 부분 잃은 A그룹은 오히려 비판의 십자포화 대상이 됐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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