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스토리] 오늘날 한국 사회는 ‘노동무시적’ 행태가 팽배해 있다. 우리 국민 가운데 상당수는 노조란 “있어서는 안될 존재” “자본주의 사회의 적” “빨갱이”와 같은 ‘이념적’ 존재로 인식돼 있다. 노조에 대한 이 같은 극악무도한 사회적 냉대와 무관심은 아쉽게도 천민자본주의에서 출발한다. 노동은 무식한자, 배우지 못한 자, 힘없는 자,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명령이고, 경제적 가치는 유식하고, 배우고, 힘이 있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이 진두지휘해야 한다는 그릇된 믿음이 저변에 깔려 있다.

‘적자 운영’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진주의료원 사태를 ‘적자이기 때문에’ 폐업해야 한다는 기괴한 논리로 여론이 질타를 한 몸에 받은 홍준표 경남지사가 느닷없이 ‘노조’를 운운한 것도 노동 무시적 행태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지지를 받기 위해, 아울러 ‘지배자’들의 지원사격을 받기 위한 몸부림 정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보면, 노동이 아름다운 것으로 추앙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아마 70년대 80년대나 90년대로 기억된다.

노동이냐 통일이냐, 고민에 빠져 있던 당시의 청춘들에게 ‘노동’은 1순위적 가치였다. 이 ‘고민의 시대’에 노동은 ‘정당한 몫’을 얻어내는 상식이자, 희망의 등불이었고, 자본은 그런 노동의 숭고하고 소중한 가치를 착취하는 ‘악의 대상’으로 투쟁의 대상이 됐다. 그래서 혹자들은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대학을 때려치고, 학운(학생운동)을 때려치고 느닷없이 ‘현장’으로 뛰어들어 노동자가 됐다. 그리고 노조를 만들었다.

그런 노동운동에 대한 투신에 그 누구도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다만 90년대 초,중반에 접어들면서 ‘노동의 유토피아’ 보다는 ‘통일의 유토피아’가 좀 더 대중들에게 큰 영향력(인기)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청년운동의 중심도 93년 한총련의 탄생을 신호탄으로 민족해방을 우선시했다. 아마도 이 때부터 청춘들의 숭고한 삶의 목표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거나 부자가 되는 것이고, 많은 젊은이들은 노조에 무관심하거나 분개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노동이 수십 년에 걸쳐 무시되는 대한민국의 풍경과 달리 노동에 대한 철저한 존중으로 ‘강대국’에 들어선 나라도 많다. 이를테면 영국은 광산·철강·조선 등 제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했는데, 많은 영국인들이 광산이나 공장에서 숙련기술을 발휘하며 경영자들보다 더 나은 보수를 받았고 고용 안정성도 대단히 높았다. 노동자 역시 노조를 통해 소속감과 자부심을 유지했고, 집단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도 노동자 대표가 주요 기업의 이사회에 정례적으로 참여할 정도로 노동의 파워는 막강했다. 이 같은 노동의 경영 참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과 더불어 경쟁력의 원천이 되었다. 영국의 경우도 ‘노동’의 가치는 신성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집권에 성공한 노동당 정부는 의료·주택·교육·연금·실업급여 관련 사회안전망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구축했다. 노동당 정권은 철강·광산·철도·석유·통신 등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다. 나아가 완전고용을 중요한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경제 곳곳에 개입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이 중요하고 정부는 모든 국민의 경제적 안녕을 보살필 책무가 있다는 가치관이 영국인들 삶 속에 철옹성처럼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며칠 후면 노동절이다. 우리 사회가 이런 선진국의 과거지사를 다시금 반복할 이유는 없지만, 노동을 죄악시 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은 분명히 뭔가 잘못된 방향을 설정해 놓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박영식 시사전문 기자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