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계곡 물소리, 4월 초순이니 진달래, 개나리, 벚꽃 활짝 폈다.

들길 따라 풀냄새 상큼 정신이 맑다. 똘복숭아로 부르는 개복숭아 분홍 꽃. 어디서 많이 들어본 새소리다. 궁국, 궁국, 궁국~.

8시 10분, 바위에 산조팝나무, 진달래, 소나무, 계곡 바위 물소리와 산비둘기 소리 섞여서 난다.

참회·회양목·노간주·국수·층층나무, 자생하는 회양목은 잘 보기 어려운데 인연이 닿았다. 직경 5센티미터는 족히 넘을 것이다.

바위와 물길 경계에 돌단풍이 흰 꽃을 피웠고 병꽃나무는 초록색 봉오리 겨우 만들었다.

의상대사와 용소

산조팝나무, 돌단풍 최대 군락지다. 진달래 온 산천 붉게 물들였고 여기는 선계(仙界)다.

수렴동·백담사 계곡보다 낫고, 삼척의 무릉계보다 훌륭하다. 조금 더 오르니 웅장한 물소리. 바위로 떨어지는 폭포의 물보라가 날려 얼굴을 적신다.

나뭇잎 둥둥 떠다니고 바람은 연못에 파문을 그린다. 8시 40분, 왼쪽 바윗길로 올라가려다 절벽으로 피난도로 진입금지 푯말이다.

아마도 물이 범람하면 대피하는 길일 것이다. 층층·개박달나무, 생강나무는 꽃과 잎이 같이 달려 있다.

버들치, 산천어가 살고 연못은 에메랄드 빛 차가운 기운이다. 첫 번째 못에서 두 번째까지 한 시간가량 걸리는데 병풍을 친 듯 석벽이 소나무와 어우러졌다.

용소.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용소.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9시경 돌단풍 꽃들이 뽐내고 있지만 한 달 지나면 산조팝 꽃도 장관을 이루겠다. 물가의 나뭇가지마다 새둥지처럼 덤불을 둥글게 달고 있다.

강물이 범람해서 지푸라기 걸린 것들이다. 비상대피 계단이 있던 이유를 알겠다. 지리산·설악산 계곡과 겨루는 곳이나 장마철에는 물이 넘치므로 위험하다.

뒤따라오다 부른다.

“동물 뼈다.”

기슭에 하얀 두개골인데 물이 넘쳐 떠 내려왔거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죽은 것 같다. 어쩌면 산양일지도 모른다.

갯가의 두릅나무 순 몇 개 따고 몇 개는 남겨 두고 간다. 다래나무 순은 너무 어리다. 군데군데 모래에 붙어사는 자주색 꽃은 현호색이고 노란 것은 산괴불주머니다.

폭포 오르는 길엔 실사리, 돌단풍이 어울려서 자란다.

작은 연못을 몇 개 지나왔는데 용소라고 표시돼 있다. 모두 아름답고 빼어난 경관이니 제1·제2·제3용소 등 무의미한 이름을 붙이기보다 차라리 그냥 두는 게 낫겠다.

계곡마다 작은 못이며 소(沼). 풍곡지역은 오르기 어려운 구간으로 정상까지 5~6시간 걸린다.

얼굴 닮은 바위산.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얼굴 닮은 바위산.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물살에 둥글어진 바위.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물살에 둥글어진 바위.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신라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을 전파하러 이 먼데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나무기러기를 만들어 풍곡에서 날렸는데, 계곡에 떨어져 용이 하늘로 오르고 절벽 사이 못이 생겨 용소(龍沼)라는 것이다.

난리 때는 피난처였다.

어디를 가도 의상대사와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다. 거룩한 대사께서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유학을 다녀왔으니 전국적으로 안 가본 곳이 없었는가 보다.

9시 반에 만나는 연못은 내 키보다 깊겠다. 깊은 곳은 수십 미터다. 물길을 바라보니 하늘이 떠 있고 절벽에 진달래, 박달나무껍데기는 한껏 갈라졌다.

강같은 계곡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옛날 집터에 돌배나무, 감나무가 오래된 주인인데 신갈나무 고목이 강가에 버티고 섰다. 강을 이리저리 건너고 물소리도 여전하다.

하도 시끄러워 귀먹은 바위, 오죽했으면 농암(聾巖)이라 했을까? 신발 벗고 강을 건너니 발이 시려 팔짝팔짝 뛰었다.

흐르는 계곡물 마시며 가도 가도 끝없는 계곡, 10시다. 바위를 건너다 미끄러져 그만 등산화 다 젖었다. 버들강아지도 잎을 틔웠는데 강가의 소나무 줄기는 물길에 쓸려 한 쪽이 모두 닳았다.

11시경 곧게 뻗은 오래된 소나무가 홀로 섰다. 용케 견뎠군. 덕풍계곡, 가곡일대 소나무는 재질이 좋아 삼척목이라 해서 경복궁 재건 대들보로, 일제 강점기 때는 수탈해 갔다.

이 산중에 철도 레일이 물길에 휘어져 녹슨 채 뒹굴고 앞에는 매바위라 하지만 얼굴 닮은 거대한 바위산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 물로 씻었으면 저렇게 매끄러울까? 둥근 암반이 목욕탕처럼 생겼다. 사람이 문질렀다면 수백만 년 걸렸을 것이다.

일제는 1930~40년대 이곳에서 소나무를 수탈하기 위해 산림궤도를 놓고 호산항구를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목재는 수송선과 도시의 목조건축을 짓는데 주로 썼다. 1896년 미국이 경인선 부설권을 얻었지만, 일본에게 팔아넘겨 이듬해 경인선 철도가 완공됐다.

경부선, 경의선을 비롯해 대부분 철도는 일제에 의해 대륙침략과 자원수탈을 위해 설치되었다.

오래된 석축이 있는 걸로 봐서 계곡 기슭으로 궤도를 깔고 소나무를 베어 날랐을 것이다. 잠시 발걸음 멈추니 물소리밖에 없다.

달뿌리풀 바람에 흔들리고 투명한 물속에 나뭇잎 이리저리 몰려있다. 바위의 도마뱀은 사진을 찍어도 꿈쩍 않는다.

산림수탈에 썼던 레일.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산림수탈에 썼던 레일.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산림수탈에 썼던 레일 근처의 도마뱀.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산림수탈에 썼던 레일 근처의 도마뱀.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박달·서어·신갈·소나무, 진달래는 만발해 온산이 붉다. 11시 20분 오른쪽 바위에서 내려오는 실폭포를 만난다.

정오. 미끄러져 돌과 같이 뒹굴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이정표도 없는 협곡의 끝은 어디인가?

계곡물 채우며 마시고 본격적으로 산에 오를 준비를 한다. 드디어 이정표가 나타났다.

바로가면 소광리 10킬로미터, 4시간 거리. 왼쪽으로 응봉산 2킬로미터, 2시간 거리다. 우리가 걸어온 것도 4시간, 12킬로미터는 될 것이다. 소광리 가는 계곡 쪽으로 햇살에 물이 눈부시다.

깎아지른 왼쪽 바위로 떨어지는 물길 따라 밧줄을 잡고 오르는데 개구리 알이 낙엽 뜬 물에 보인다.

가파른 바위산길 오른쪽 암반을 따라 흘러내리는 폭포 바위에서 도(道) 닦기 좋으련만 20분 더 오르니 물소리 사라졌다.

불타서 까만 그루터기 따라 올라 신갈나무 숲이다.

추워선지 새싹은 돋지 않고 아직도 황량한 겨울 닮은 산. 500년가량 되는 소나무들이 나타나고 굴참나무 지나자 겨우살이도 붙어산다.

남쪽으로 기운 산길에 햇살이 따갑지만 솔가지 사이로 바람소리 거세다. 내륙에서 동해로 부는 바람이다.

원래 높새(북동)바람은 북동풍이 태백산맥을 넘으면서 기온이 낮아져 응결된 수증기 구름이 정상에 비를 뿌리고 서쪽으로 내려갈 때 고온건조 해지는 바람이다.

지금은 산꼭대기에서 기슭으로 내리 부는 고온건조한 모든 바람을 일컫는다. 로키산맥의 치누크, 알프스는 푄, 우리나라는 높새바람이다. 푄(foehn 熱風)은 알프스 지방 이름이다.

어느 해였던가? 푄에 대해 설명하는데, 한 학생이

“프라이팬”이라고 한다.

우스개라고 하기도 그렇고 기발한 생각이라는 것도 그렇고 아무튼 통하는 무엇이 있었다.

“뜨거운 프라이팬의 열기 같은 것이다.”

봄철 강풍은 중국에서 오는 뜨거운 편서풍이 태백산맥 협곡의 좁은 통로를 지날 때 공기가 압축되면서 바람이 세진다.

오늘처럼 서풍이 불 때 고온건조해서 큰 불이 날 수 있다. 우산이 휘어질 만큼 부는 초속 20미터 이상의 강풍이 몰아치는데 양양·강릉의 돌개바람을 양강지풍(襄江之風), 눈이 많은 통천·고성을 통고지설(通高之雪)이라 한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인 2000년 동해안 산불은 고성에서 울진원전 코앞까지 모두 태웠고 2005년엔 낙산사일대를 다시 태웠다.

새로 1시가 되자 대단한 소나무가 반긴다.

밑 부분은 검은색, 위로 붉은 빛을 띠는 귀한 솔이다. 잠시 지나 700년쯤 되는 대왕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발길을 잡는다. 오후1시 10분경 도계(道界) 삼거리 팻말에서 숨고르기로 했다.

왼쪽 구수곡 자연휴양림9.9·응봉산0.6·소광리금강송숲13·용소골,덕풍마을 13킬로미터 거리다.

소광리 5시간 30분, 덕풍마을 6시간 걸린다.

신갈나무 숲에 드문드문 피나물 노란 꽃이 앙증맞게 몇 송이씩 올라왔다. 참나무겨우살이는 남사면에 집단적으로 많고 간혹 북쪽에도 자란다.

오후 1시 20분 응봉산 정상 999미터이다. 날씨는 좋은데 곧바로 덕풍마을 이정표를 따라 20분 내려가니 알록제비꽃 드물게 잎을 드러내고 참나무 숲에서 분홍빛 얼레지 꽃이 폈다.

이 산중에 아무도 봐 주는 이 없는데 홀로 잘 피었다. 족도리풀, 제비꽃도 친구들. 잠시 후 얼레지 군락지다.

낙엽에 푹푹 빠져 걷는 길 힘들지만 병아리 닮은 생강나무 꽃이 위로해 준다. 오후 2시경 쉬어갈 자리 마땅찮아 산길에 앉아 김밥, 쑥떡으로 배고픔을 달랜다. 물이 부족할 것 같아 목만 적셨다.

덕풍마을 가는 산길은 무인지경, 소나무, 참나무 섞여 자라는데 금강소나무가 일품이다. 2시 40분경 갈림길 지날 때 진달래 꽃 맛이 봄맛이다.

왼쪽은 덕풍마을, 오른쪽은 사곡으로 가는 길 뒤돌아보니 우람한 소나무 가지사이 응봉산 정상이 잘 보인다.

오후 3시, 외진 산중에 친구는 힘 드는지 걸음이 느리다. 물박달·박달·참나무림에 겨우살이만 푸른빛이고 이파리는 봄인데도 아직 나올 생각을 않는다. 20여 분 지나면서 길 왼쪽 돌에 뿌리박은 소나무가 걸작이다.

능선 따라 걸을수록 첩첩산중, 절벽의 노송(老松)은 세 갈래 가지를 늘여 서쪽 산 바라보는데 우람한 가지에 힘이 느껴진다.

3시 40분경, 거대한 신갈나무 지나고 무덤이 반가운 건 거의 왔다는 것 아닌가? 계곡으로 내려갈 수 있어 다행이다. 수피가 황금색인 특이한 소나무에 눈을 떼기 어렵다.

얼레지.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얼레지.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바위에 붙은 소나무.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바위에 붙은 소나무.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여기저기 짐승들의 배설물이 쌓여있다. 고라니, 산양, 토끼들일 것이다. 길도 잘 보이지 않고 그나마 겨우 생긴 길 위로 경사가 급해선지 위쪽에서 흘러내린 흙더미에 몇 번씩 미끄러진다. 잘못하면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

긴 계곡아래 유난히 눈에 띄는 식물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한다. 감자 잎을 닮은 미치광이풀, 검은색 종모양의 꽃을 달았다.

서북사면 계곡 1킬로미터까지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며 산다. 그야말로 심산유곡에 사는 풀이다.

오후 4시경 사람이 다니지 않은 경사진 산길로 낙엽에 또 발목이 빠진다. 뒤따라오다 뒤로 처졌다.

“야 아~”

불러보니 계곡이 울리고 산돌배나무 꽃이 하얗다.

“미끄러져 못가겠다.”

“다 왔다.”

일행이 힘들어 할 때 위로하는 나의 립 서비스(Lip service)다.

정말 다 내려왔네. 아침에 유난히 많던 산조팝나무를 만나고 드디어 계곡이 보인다. 생강·물푸레·다래나무도 물소리도 반갑다.

고사리·다래·생강·취나물 새순들이 봄볕에 여리다. 묘지(羽溪李氏)를 지나자 이제부터 길이 좋다.

주차장도 보이고 오후 4시 반, 출발지점으로 돌아왔다. 개나리, 복숭아꽃이 아침보다 더 만발하고 햇살이 좋아서 산골 정취가 새롭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 응봉산 정상, 긴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데 거의 19킬로미터 8시간 30분 걸렸다.

길옆에서 만난 성황당.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길옆에서 만난 성황당.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병풍을 두른 강원도 산마을 달리면서 길옆의 성황당을 만난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퇴락했지만 정갈스런 당집을 요모조모 살피는데 오래된 소나무가 오히려 주인 같았다.

“소나무가 터줏대감이야.”

“우리는 누가 주인이지?”

“…….”

<탐방로>

● 덕구온천(정상까지 5.1킬로미터, 1시간 45분 정도)

산불감시초소 → (20분)모랫재 갈림길(원탕)→ (20분)헬기장 → (35분)노송지대 → (5분)헬기장 → (25분)정상 → (1시간 15분)모랫재 갈림길(원탕) → (15분)산불감시초소

● 원탕·계곡(정상에서 온천·초소까지 7.3킬로미터, 2시간 30분 정도)

정상 → (15분)노송지대 → (55분)원탕 → (25분)연리지 → (10분)모랫재 갈림길(능선) → (30분)덕구온천 → (15분)산불감시초소

● 덕풍계곡(정상까지 13.6킬로미터, 5시간 40분 정도)

계곡입구고향산장 → (1시간 50분)제2용소 → (1시간 30분)노송 → (20분)실폭포 → (10분)소광리 ·응봉산갈림길 → (1시간 30분)노송지대 → (10분)삼거리팻말(도계) → (10분)정상 → (1시간 20분)사곡 갈림길 → (40분)바위소나무 → (20분)신갈나무고목·무덤 → (20분)계곡입구 민박집

* 덕풍계곡구간 전체 약 19킬로미터, 8시간 20분 정도 걸음(기상·인원수·현지여건 등에 따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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