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윤창중 성추행, 핵심은 갑-을 관계 그리고 젠더감수성

청와대 윤창중 전 대변인이 방미 중 일으킨 성추행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경쟁이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고위공직자의 성추행사건에 대한 본질적 해결책은 오간 데 없고 볼썽사나운 ‘엉덩이’와 ‘노팬티’ 공박만 난무한다.
 
성추행, 성폭력을 둘러싼 잘못된 통념, 이번 사건에도 여지없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온갖 말, 말, 말들은 마치 왜곡된 성차별적 의식의 종합셋트를 보는 듯 하다. 수많은 말들 속에 드러난 우리사회의 젠더감수성, 어떤 수준일까?
 
툭툭 쳤건 움켜쥐었건 모두 다 성추행이다

‘엉덩이를 툭툭’ 쳤을뿐 ‘엉덩이를 움켜쥔 것’이 아니란다. ‘부적절한 행동’은 인정하지만 의도는 그렇지 않았고 성추행은 아니란다. 윤창중 전 대변인의 말이다.
 
우선 이 사람에겐 공무원들이 연1회 의무교육으로 이수하게 되어있는 ‘성희롱 예방교육’의 흔적조차 안보인다. 성폭력이란 ‘의도와 상관없이 상대방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해 성적 수치심등을 유발시킨 모든 성적 폭력’을 말한다.’
 
성폭력, 성희롱에 대한 기본 상식도 없으면서 어떻게 21세기 글로벌한 사회에서 고위공직자가 되었을까? 게다가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적으로 한 변명이 거짓말인 것이 하룻만에 들통났고 청와대 홍보실은 쑥대밭이 되었다. 이쯤되면 박근혜 대통령은 인사 실패에 대한 총체적 책임을 져야 할 때다.
 
졸지에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영어 단어 하나를 암기하게 되었다. ‘grabbed’를 놓고 해석논쟁과 성추행 논쟁, 온갖 패러디물이 난무한다. 움켜쥐었건 툭툭쳤건 의도가 있었건 없었건 모두 다 성추행이니 그만들 좀 하시기 바란다.
 
덧붙여 그놈의 ‘부적절한’이란 단어는 누가 만들었는지(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이 자신의 불륜사건을 국민들에게 해명할 때 등장한 걸로 안다) 이런 성폭력사건이나 윤리관련 사안이 생길때마다 공직자와 사회지도층들의 책임면피용으로 이렇게 적절하게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한국의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이 단어를 선사해주신 클린턴에게 감사해야 할 듯 하다.
 
여성 대통령 성추행 걱정하시는 국민들께도 한 마디
 
‘여성대통령 모시고 간 고위 수행원, 대통령을 성추행하면 어쩔 뻔 했나?’ 이 사건을 보고 박근혜 대통령을 너무 걱정하고 계신 국민들 말이다. 국가의 통치권자인 대통령 걱정을 해주는 건 좋은데 걱정을 해도 완전 남의 다리 긁는 걱정이니 이 역시 그만하시기 바란다.
 
성폭력(성희롱,성추행,강간등 모든 성적 폭력)은 폭력이다. 즉 권력관계에서 발생한다는 뜻이다. 요즘 대중매체나 언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로 하면 '갑-을'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이야기이다. 대통령과 대변인 중 누가 '갑'일까? 삼척동자도 다 안다.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권리를 짓밟을 때, 즉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이 없는 자의 성적 권리를 짓밟을 때 성폭력이 발생한다.
 
윤창중이 자신의 연령, 직책, 성별(중년, 상급자, 남성)보다 힘이 없는 교포(젊은, 인턴, 여성)를 성추행 한 것은 그런 맥락이다. 윤창중의 이번 성추행사건을 보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한다. 국내에서 평상시에 자신이 ‘갑’인 것을 이용해 얼마나 많은 여성 ‘을’들에게 그런짓을 했으면 해외순방때도 그 버릇 못 버리고 똑같이 하다가 미국사회에서 바로 경찰에 신고를 당했겠느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윤창중같은 성추행범은 이런 권력관계를 귀신같이 파악한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 임기 끝날 때까지 대변인을 계속 한다 해도 감히 자신의 ‘갑’인 대통령님께는 성추행을 하지 못하니 대통령 걱정은 그만하셔도 될 듯하다.
 
선정적 보도경쟁, 피해자 신상털기, 친노종북페미니스트(!)까지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과 마찬가지로 사건이 터지자 마자 언론과 인터넷은 윤창중 성추행사건에 대한 온갖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피해상황에 대해 시시콜콜하고 상세한 보도가 연일 신문과 방송 메인뉴스를 도배하고 있다.
 
윤창중이 몇 시까지 술을 마셨는지? 피해자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모든 관심은 엉덩이와 노팬티로 쏠렸다. 어떤 극우단체는 이 사건을 이념적인 잣대로 들이대며 공상소설까지 썼다. 일부 네티즌들의 피해자 신상털기는 피해자에 대한 2차가해와 인권침해까지 서슴치 않고 있다. 이러한 공박은 사건의 본질을 흐려버린다.
 
정치적으로 대통령과 청와대가 이 사건을 제대로 책임지고 윤창중을 처벌하는것과 별개로 우리사회에서 이번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 본질적인 이유와 제대로 된 해법을 찾고자 하는 진지한 성찰과 토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성폭력, 우리 사회 젠더감수성 보여주는 거울
 
모든 폭력은 그 사회의 불평등과 인권환경을 반영한다. 또한 모든 성폭력 사건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젠더감수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번 사건에 대해 쏟아지는 온갖 말, 말, 말들의 홍수 속에 윤창중은 생생히 살아있다. 또한 윤창중을 악마화하고 피해자의 사진을 돌리고 여성대통령을 비하하며 성폭력과 폭력적인 언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악플들은 마치 윤창중이 빙의된 것도 같다.
 
이번에 단지 윤창중 같은 괴물 하나 파면시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까? 이 사회의 성폭력을 근절시킬 수 있을까? 괴물을 키워온 우리 사회의 반인권적인 환경, 천박한 젠더감수성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제2, 제3의 윤창중은 도처에서 출몰할 것이다. 아동학대, 학교폭력, 동성애혐오, 이주민에 대한 차별, 장애인에 대한 무시, 성폭력, 노인학대, 갑의 횡포 등 여러 얼굴과 모습으로.
 
다음 번 윤창중은 어떤 자리에서 어디를 'grab' 할 것인가. 생각만 해도 섬찟하다.
 
최혜영 진보신당 여성위원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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