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구 중계동 납대울마을은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의 별장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

드라마 '징비록'에서 탤런트 임동진(위)이 윤두수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드라마에서는 류성용(김상중:아래)과 대립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사진=KBS방송 화면 캡쳐]
드라마 '징비록'에서 탤런트 임동진(위)이 윤두수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드라마에서는 류성용(김상중:아래)과 대립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사진=KBS방송 화면 캡쳐]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 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불암산 쪽으로 길을 건너면 아파트가 아닌 자연 부락이 나타나고 삼거리에 편의점이 하나 있다(CU 중계 한아름점, 노원구 중계로 14사길 4). 이 편의점 앞에 그야말로 볼품없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의 내용은 이렇다.

납대울 마을

나라에 바치는 세곡(稅穀)을 모아 놓았던 곳에 유래하여 납대(納大)울 이라 하였으며 조선 선조 때 영의정 윤두수가 살았던 마을

납대울 마을 표지석
납대울 마을 표지석

이 비석의 존재를 본지에 제보한 노원문화재단 김승국 이사장은 산책하다가 우연히 이 비석을 보았다고 한다. 노원구 홈페이지에 지명 유래를 보아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납대울 마을 : 중계동 75-95번지 일대, 영신 여중고 자리. 조선 선조때 오음 윤두수가 살았던 마을로 조정에 조공을 모아놓은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

하지만 이 이상의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본지 하응백 문화에디터는 이 마을에 윤두수가 살았다는 근거를 찾아 나섰다.

시골이라면 대대로 터를 잡고 사는 사람이 있으련만 아파트 사이에 겨우 남아 있는 자연마을에서 마을 역사의 진상을 수소문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럴 때 이 비문의 진실성, 혹은 사실성을 확인하는 마지막 방법은 문헌 조사를 통해서다. 윤두수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면, 이 마을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을지도 모른다.

윤두수(尹斗壽:1533년~1601년)는 1555년에 생원시 1등, 1558년 식년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한 수제였다. 이조정랑, 대사간, 평안감사 등 조정의 주요 관직을 거쳤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아들과 함께 선조의 몽진을 수행했다.

임란 중 어영대장,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류성룡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영의정에 올랐으나,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물러났다. 호는 오음(梧陰)이며, 저서로는 아들 윤방(尹昉:1563년~1640년)이 편찬한 『오음유고』가 있다.

윤두수의 장남인 윤방도 훗날 영의정에 오른다. 조선조에서 2대에 걸쳐 영의정이 된 경우는 아주 드물다.

윤두수의 경우 서인이었던 관계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윤방의 둘째 아들 윤신지가 선조의 딸 정혜옹주의 배필이 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당시 윤두수 가문의 명성을 알 수 있다. 윤방과 선조는 사돈지간이었다.

대개 이 정도의 위세를 가진 가문이 이 마을에 살았다면 그럴듯한 집 한 채, 정자 한 칸 정도는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노원구 중계동 부근에 그러한 흔적은 전혀 없다. 윤두수가 죽은 다음에 아들 윤방이 윤두수의 원고를 모아 『오음유고』를 간행했다.

옛 사대부들의 기록은 거의 틀림이 없다. 더군다나 이 정도의 관직을 지냈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 『오음유고』에 노원구와 관련된 기록이 있지 않을까?

『오음유고』는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 2권은 오음이 쓴 시, 3권은 서(序), 발(跋), 기(記), 문(文) 등이 모여 있다.

『오음유고』 2권에 의미심장한 시 두 편을 발견되었다.

기해년(1599, 선조32) 5월에 노동(蘆洞)의 작은 별장으로 갔다가 취하여, 우는 냇물 소리를 들으며 우연히 제하다(己亥五月 往蘆洞小莊 醉聞鳴磵聲 偶題)

동쪽 시냇물이 서쪽 시내에서 오니

나막신 신고 새 이끼를 밟을 필요 없네

석 잔 술에 취하여 시냇가에 누웠노라니

감은 눈 귓가의 우렛소리에 자주 놀라네

東磵水從西磵來 不勞蠟屐破新苔 三杯一醉溪邊臥 合眼頻驚耳側雷

7월에 노동의 별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 우연히 짓다(七月 往蘆莊 歸路遇雨 偶作)

검은 사모에 흰 갈옷은 교외 행차에 걸맞은데

다시 옅은 구름 보니 나의 시정을 일으키네

해 지고 돌아오며 도로에서 시름하나니

하늘 가득한 비바람이 신경을 어둡게 하네

烏紗白葛稱郊行 更看輕陰起我情 日暮歸來愁道路 滿天風雨暗神京

‘노동(蘆洞)’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기 바란다. 노동이라면 노원구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현재의 노원구(蘆原區)는 조선시대 ‘노원역(蘆原驛)’, ‘노원면(蘆原面)’에서 나온 말이다. 중랑천 혹은 당현천을 따라 대규모 갈대밭이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 시 두 편은 1599년 지은 것이니 이때 윤두수은 여러 기록으로 보아 분명 서울에 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 ‘노동’은 노원구의 어느 동네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또 ‘교행(郊行)’이라는 단어를 보면 서울 도성의 교외를 가리키고 있다. 또 “동쪽 시냇물이 서쪽 시내에서 오니(東磵水從西磵來)”는 중랑천과 당현천을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시 두 편에 나오는 노동과 노장(蘆莊:노동의 별장)은 노원구의 어느 마을일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다. 서울 주변에 갈대가 많은 곳이 노원구만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증거는 없을까? 그러다가 아래와 같은 시를 발견했다.

경자년(1600, 선조33) 2월에 노동(蘆洞)의 별장을 방문하고 짓다(庚子二月 往訪蘆莊有作)

1.

동부에는 구불구불한 길 하나 희미하고

길게 늘어진 칡덩굴은 치의를 걸어 놓은 듯하네

산꽃이 마치 산인의 술을 권하는 듯하니

종일토록 앞 내에서 돌아가길 잊었네

洞府盤回一逕微 薜蘿長擬掛絺衣 山花似勸山人酒 盡日前溪却忘歸

2.

성 동쪽 십 리 밖은 세상의 번잡 적지만

필마에 아직도 단후의를 걸쳤네

흰 돌 깔린 맑은 내에서 이런 말을 듣나니

산꽃이 지기 전에 돌아와야 할 거라나

東城十里世紛微 匹馬猶兼短後衣 白石淸川聞此語 山花未落我當歸

(한시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 권경열)

성 동쪽 십 리 밖(東城十里)은 ‘노동’의 위치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다.

실질적으로 동대문에서 노원구까지는 이십 오리 정도 되지만, 이 정도 거리를 시로 표현할 때는 대개 십 리로 했다. 그래야 시적이다.

여기서 십 리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란 말이다.

아무리 별장이래도 산중이거나 들판 한가운데 있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사는 마을에 집이 들어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납대울 마을에는 수령 400년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 주변으로 또 300년 정도 되는 은행나무가 있고, 또 수령을 짐작하기 어려운-약 400년 정도 이상으로 보이는-느티나무도 빌라 사이에 서 있다.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사람이 살았다는 표식이다. 최소한 약 400년 전에 이 마을에는 사람이 살았다.

중계동 납대울 마을의 은행나무. 보호수 수령 400년으로 추정. 지정번호 서11-3
중계동 납대울 마을의 은행나무. 보호수 수령 400년으로 추정. 지정번호 서11-3

이렇게 보면 납대울 비석은 마을에 구전되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지만 문헌적으로 사실로 확인되었다 할 것이다.

다만 납대울 마을은 윤두수가 살았다기보다는 ‘윤두수의 별장이 있었던 마을’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구전, 400년 된 은행나무, 『오음유고』의 시 세 편, 이 세 가지 증거로 보아 노원구 중계동은 윤두수의 별장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노원구 중계본동 일대에 윤두수의 별장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발견된 윤두수 시의 수준이다.

「노동(蘆洞)의 별장을 방문하고 짓다(往訪蘆莊有作)」는 매우 빼어난 시다. 음력 2월 이른 봄이라 단후의(짧은 외투)를 걸쳐야 했지만 이른 봄 불암산 산꽃의 정취와 맑은 시냇물을 윤두수는 절묘하게 표현했다.

봄꽃이 지기 전에 다시 보러 오겠다는 말을 이렇게 멋있게 표현한 것이다. 이 시는 윤두수가 67세에 지은 것으로 그야말로 완숙미가 돋보인다.

그 다음 해인 1601년 윤두수는 68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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