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신암리 느티나무

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

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

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

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영주 신암리 느티나무는 두암고택 앞에 있는 마을의 정자나무이자 수호목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영주 신암리 느티나무는 600년을 살아왔지만, 높이가 6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고목이다.

높이는 낮은 편이지만 둘레는 사람 가슴높이에서 6.5m쯤이나 되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위쪽의 줄기와 사방으로 난 가지의 상당 부분을 덜어냈기 때문이다.

줄기 아랫부분은 썩어 동공이 생긴 부분을 메워준 처치의 흔적이 크게 남아있다.

게다가 살아남은 줄기 바깥쪽에서 이어진 부분 두 군데에 또 동공이 생겼다.

줄기의 심재는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가지 두 개가 무성하게 잔가지를 펼쳤지만, 한창때의 위용에는 미치지 못한다.

결국 느티나무가 600년 동안 지어놓은 줄기와 가지 대부분이 세월의 풍진에 묻혀 사라진 셈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나무 옆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된 우금촌 두암고택(友琴村 斗巖古宅)이 있다.

두암고택은 1590년에 두암(斗巖) 김우익(金友益:1571~1639)이 20세에 분가할 때 지은 집이다.

이 지역 출신의 문인인 김우익은 어린 시절부터 효성이 지극하기로 인근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임진왜란으로 세상이 혼란하던 시절, 그의 아버지 김윤의(金允誼)가 역병에 걸렸을 때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김우익은 병든 아버지의 변을 직접 맛보기까지 하면서 아버지를 극진히 간호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김우익은 3년 동안 집에서 십 리 넘게 떨어진 아버지의 묘를 매일 걸어서 찾아가 돌보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지극한 효행을 펼친 김우익을 칭송했다고 한다.

김우익은 1612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거산도찰방에 부임했다.

1616년에는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로 부임했다.

이때 일어난 ‘최기(崔沂)의 옥사(獄事)’ 사건으로 황해도의 많은 인사가 화를 입게 되었는데, 여러 방면으로 주선해 많은 사람을 구했다.

‘최기의 옥사’ 사건은 ‘해주옥사’라고도 하며, 1616년 이이첨 등의 대북 세력이 박승종, 유희분 등의 소북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조작한 역모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해주목사인 최기는 심문 중에 죽었지만,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신원되었다.

그 뒤로도 김우익은 곳곳에서 선정을 펼쳤다.

특히 해미현감을 지낼 때의 치적이 높아 해미 지역 백성들이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두암고택 대문 밖에 서 있는 신암리 느티나무는 김우익이 집을 지을 당시에 이미 수령이 200년에 가까운 큰 나무였다.

두암 김우익은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고 백성들의 살림을 걱정했을 것이다.

신암리 느티나무는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 선정으로 삶의 모범을 제시한 김우익의 집 앞에 있는 마을의 수호목이자 정자나무다.

<영주 신암리 느티나무>

·보호수 지정 번호 11-28-2-3
·보호수 지정 일자 1982. 10. 26.
·나무 종류 느티나무
·나이 600년
·나무 높이 6m
·둘레 6.5m
·소재지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376-1
·위도 36.842721, 경도 128.696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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