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적 침입으로 인한 파괴와 도난 방지
종교적인 사고의 변화… "승천"의 개념에서 "지하세계의 여행" 개념으로

【뉴스퀘스트=김형근 과학전문기자】 고대 이집트의 상징적인 피라미드는 최고 권력자인 파라오들이 1000년 이상 그들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다. 그런데 어느 날 고대 이집트인들은 갑자기 피라미드 건설을 중단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들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승천과 탈바꿈의 개념에서 건설됐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이집트 제국 신왕국으로 바뀌면서 변한다. [사진=wikipedia]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들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승천과 탈바꿈의 개념에서 건설됐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이집트 제국 신왕국으로 바뀌면서 변했다. [사진=wikipedia]

무엇보다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파괴와 도굴 방지

과학전문 매체 라이브 사이언스(Live Science)가 최근 그 이유를 추적했다. 이 매체는 현지의 자료들을 근거로 아마도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파괴나 도굴 등을 방지하기 위해 보안 차원에서 중단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집트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해 그 속에 묻혔으며, 때로는 거대한 기념물 아래에 묻히기도 했다. 피라미드는 왕들의 무덤으로 지상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하나의 루트였다.

피라미드 건축은 사카라(Saqqara)에 계단식 피라미드를 지은 조저왕(King Djoser, 재위 기간 BC2630~BC2611년)부터 아비도스(Abydos)에 마지막으로 왕족 피라미드를 지은 아흐모세 1세(King Ahmose 재위기간 BC1550~BC1525년)까지 이어졌다.

이 상징적인 피라미드들은 파라오의 힘과 부를 보여주었고 그들의 종교적 믿음을 대중들에게 알렸다. 그렇다면 왜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집트 신왕국(New Kingdom of Egypt BC1550~BC1070년)이 시작된 직후 피라미드를 짓는 것을 중단했을까?

이집트 제국으로 불리는 신왕국은 고대 이집트의 황금기로 가장 번영한 시기였으며 광활한 영토의 수단을 점령할 정도로 전성기를 이루었다. 18왕조, 19왕조, 그리고 20왕조를 포함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 건설은 아흐모세(Ahmose) 통치 이후 시들하게 변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파라오는 당시 수도 테베 근처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 묻혔는데, 지금의 룩소르(Luxor)이다.

◆ ‘왕들의 계곡’에는 피라미드와 같은 산봉우리가 있어

이집트 피라미드 연구 프로그램인 ‘테베 맵핑 프로젝트(Theban Mapping Project)’에 따르면 계곡에서 가장 먼저 확인된 왕릉은 투트모세(Thutmose) 1세(통치기간 BC 1504~BC1492)가 건설한 것으로 언급된다.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지만 전임자인 아멘호테프(Amenhotep) 1세(통치기간 BC1525~BC1504년)도 왕들의 계곡에 자신의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파라오들이 왜 왕실의 피라미드 건설을 중단했는지는 완전히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 보안에 대한 우려가 한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대해 피터 데 마뉴엘리안(Peter Der Manuelian) 하버드대학 이집트학 교수는 라이브 사이언스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피라미드가 약탈당했기 때문에 왕실 무덤을 멀리 떨어진 계곡에 숨겨두고 바위에 파묻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많은 수의 경비병들이 공동묘지를 지켰을 것”이라고 말했다.

"왕들을 위한 피라미드 건설을 포기하기 전에 그들은 이미 피라미드 아래에 위치하는 석관이 있는 묘실(墓室)을 만드는 것을 중단했다”고 영국 브리스톨 대학의 에이단 도드슨(Aidan Dodson) 교수가 말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 아비도스에 있는 아흐모세 1세(Ahmose I)의 마지막 피라미드에는 이러한 묘실이 0.5km 이상 떨어져 있었다"고 전했다.

중요한 단서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한 역사적 기록은 왕들의 계곡의 투트모세 1세의 무덤 건설을 책임졌던 "이네니(Ineni)"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의해 쓰였다.

이네니는 "나는 국왕만이 묻힌 절벽 무덤 발굴을 감독했다,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듣지 못했다."라고 썼다.

이집트의 신왕국 시대에 접어들자 피라미드 건설은 중단됐다. 사후 세계에 대한 개념이 피라미드를 통한 승천의 개념에서 "지하세계의 여행"의 개념으로 변하면서다. 또한 외적 침입에 의한 파괴와 도굴 방지도 한몫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사진= wikipedia] 

뉴욕대학에서 미술사 및 히브리 유대 연구 전문가인 앤 메이시 로스(Ann Macy Roth) 교수는 “이 기록은 비밀 유지가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음을 분명히 암시한다"고 말했다.

‘왕들의 계곡’의 자연 지형을 보면 왜 이곳이 왕릉으로 적합한지 그 이유가 설명된다. 여기에는 엘쿠른(el-Qurn, 때로는 Gurn로 적기도 함)으로 알려진 봉우리가 있는데, 피라미드처럼 생겼다.

체코 찰스 대학의 이집트학자 미로슬라프 바르타(Miroslav Bárta) 교수는 라이브 사이언스와의 인터뷰에서 "계곡에 세워진 모든 왕족의 무덤들은 피라미드 아래에 놓여 있다"고 묘사했다.

고대 이집트연구협회(Ancient Egypt Research Associates)의 마크 레너(Mark Lehner) 협회장은 그가 쓴 <완전한 피라미드: 고대 미스터리 풀기(The Complete Pyramids: Solving the Ancient Mysteries) 1997>에서 “이집트 파라오들에게 피라미드는 사후세계로의 승천과 탈바꿈의 장소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신왕국 시대 이집트의 수도가 된 룩소르(Luxor)의 지형도 피라미드 건설의 쇠퇴에 한몫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브리스톨 대학의 도드슨 교수는 "이 곳은 덩어리와 돌기가 많아 공간적으로 볼 때 너무 제한된 지역”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고대 수도는 새로운 피라미드의 본거지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작고 건축학적으로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늘로의 승천” 개념에서 “지하세계의 여행” 개념으로 바뀌어

지하에 무덤을 짓는 것을 강조하는 종교적인 변화도 이집트인들이 거대한 피라미드 건설을 포기한 또 다른 가능한 이유다.

체코의 바르타 교수는 "신왕국 시대에는 왕이 지하세계(또는 지옥, Netherworld)를 통해 밤길 여행을 한다”는 개념이 매우 유행했다. 이를 위해서는 지하의 암반에 무덤을 쌓는 정교한 계획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왕가의 계곡에 봉안된 지하 무덤은 이 개념에 잘 맞는다.

파라오가 피라미드 건설을 중단하자 대신에 부유한 개인들은 그 관행을 계속했다. 예를 들어 호렘헤브(Horemheb)라는 이름의 서기(scribe)를 위해 지은 아비도스에 위치한 3300년 된 무덤은 입구에서 높이가 7미터인 피라미드라고 고고학자들이 2014년 발표했다.

기원전 첫 1000녀 동안 피라미드 건물은 현재 수단과 이집트 남부의 일부를 포함하는 누비아(Nubia) 지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누비아인들은 왕족과 개인들을 위해 피라미드를 지었다.

레너 협회장은 저서에서 왕실 피라미드가 180여 개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최근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개인들을 위해 건설된 피라미드가 더 많았다고 한다.

누비아의 통치자들은 약 1700년 전까지도 피라미드를 계속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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