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성동위원소의 DNA를 찾아서(14)

【뉴스퀘스트=김형근 과학전문기자】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는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인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한 작가다. 그는 당시의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예수와 함께 흔히 볼 수 있는 “이발소 그림” 가운데 하나

‘만종’은 ‘이삭줍기’와 함께 밀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친숙하다. 사실 우리는 이 그림을 학교 교과서에서 접하기 앞서 이전부터 보아왔다. 흔히 말하는 ‘이발소 그림들’ 가운데 대표적인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이 ‘만종’이라는 작품은 서양미술에 대해서 잘 몰랐던 우리의 부모세대들도 좋아했던 그림이었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가 있었다. 예수의 초상화와 함께 소위 “이발소 그림” 중에 하나가 됐다. 이발소는 이제 추억이 담긴 옛 기억 속에서나 등장하는 곳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이발소 그림들도 사라졌다.

밀레의 만종은 원래 전원생활의 평화로움을 상징하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X선 투시결과 이 그림은 덧칠돼 있었으며, 원래 그림에는 감자 바구니 대신 아기 시체 관이 그려져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진=위키피디아] 

석양이 물들어가는 너른 들녘에서 한 가난한 농부 부부가 일손을 놓고 멀리 교회당에서 들려오는 저녁기도를 알리는 종소리에 맞춰 고개 숙여 기도하고 있다.

발치에는 감자바구니가 놓여 있고 캐다 만 감자 몇 개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아마 부부는 오늘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고 수확을 안겨준 하늘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린 명화 ‘만종’의 모습이다. 지극히 평화롭게 보이는 풍경으로 귀를 그림에 가까이하면 예배당의 은은한 종소리가 들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전원생활의 풍경 그 자체다.

이 그림의 원제는 ‘삼종기도(L’ Angelus, 영어이름 The Angelus)’로 성당에서 하루에 세 번 종을 쳐 알려주는 시간에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밀레 자신이 덧붙인 제목은 ‘저녁기도’인데 우리는 성당의 종소리에 초점을 맞춘 저녁 종, 즉 ‘만종(晩鍾)’이라고 불러왔다.

이 그림이 얼마나 감동을 주었는지 우리나라 대표화가인 박수근 화백은 12살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장차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하루 일과를 마친 농촌부부가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경외감과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평화로운 마음을 느꼈다고 한다.

물론 그가 처음 접한 ‘만종’도 어쩌면 이발소 그림이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이 그림은 소박한 농촌의 모습을 통해 신성한 노동의 참다운 가치를 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밀레는 광활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이 평화로운 풍경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 화가가 나타났다. 그는 밀레가 원래 그린 감자바구니에는 감자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棺)을 그렸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만종’의 바구니에 아기 시체가 있었다는 화가 나타나

이는 곧 밀레의 만종은 평화로운 농촌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농부들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말해서 밀레는 저항적인 화가로 농민들의 참혹한 상황을 화폭에 담으려고 했다는 내용이 된다.

잠시 밀레의 사상에 대해 조금 언급하고 넘어가자. 밀레는 소위 의식화된 화가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단히 진보적인 좌파 성향의 화가였다. 그는 사실 시대의 부조리를 꼬집는 그림을 잘 그렸다. 때문에 비평가로부터 그다지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만종’과 더불어 유명한 걸작인 ‘이삭줍기’도 마찬 가지다. 아름다운 농촌풍경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커다란 농장을 배경으로 저 멀리서 짚단을 싣고 있는 일꾼들과 지배인처럼 단장한 사람이 보인다.

그러나 이삭을 줍는 여인들은 그들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들은 끼니를 위해 버려진 이삭이라도 주워야 했다. 그러한 여인들을 부각시킨 것이 바로 ‘이삭줍기’다.

배경은 물론 추수 때의 풍요와 평화로움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고단함이 묻어 있다. 이처럼 밀레는 낭만주의 화가라고 하기보다 현실고발주의 미술가였다는 편이 알맞다.

밀레는 진보성향의 좌파 화가

바구니 이야기로 돌아가자. 감자바구니에 감자가 아니라 시체가 담긴 관이 들어 있었다는 주장을 편 화가는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인 스페인의 살바도르 달리(1904~1989)다.

그는 밀레의 ‘만종’을 볼 때마다 감자바구니가 마치 관처럼 느껴진다고 동료들에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서 그런 의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 다만 밀레의 성격이나 당시 불후하게 살았던 농부들의 환경을 미루어 짐작 이런 판단을 내린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달리는 ‘만종’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출판하면서 감자바구니가 실은 아기의 시체를 담은 관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주위 동료들은 그의 주장은 얼토당토않다며 묵살한다. 심지어 그가 미쳤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사실 달리에 대한 기록은 존재한다. 그는 1933년 ‘미노타우로스(Minotauros)’誌에 ‘밀레의 만종’에 대해 발표했다. 제목은 ‘강박적 이미지에 대한 편집광적 비평방법에 대한 해석’이었다.

30년이 지난 1963년에는 ‘밀레 만종의 비극적 신화’라는 논문에서 ‘만종’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왔다는 것을 토로했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해석에 따라 ‘만종’을 표현한 작품도 여러 점 그렸다. 논문에서 달리는 “자신은 현실생활에는 서툴렀지만 그럴수록 삶에 대한 투시력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며 ‘만종’에 대해 관찰한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얼핏 보면 무의미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환영들이 나에게는 ‘만종’이 그 동안 돌연 존재했던 어떤 그림보다도 슬픔과 불안을 느끼게 했다. ‘만종’에 의심을 갖게 되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만종'의 이미지가 왜곡됐다고 처음 주장한 화가 살바도르 알리. [사진=위키피디아]

X선 투시 결과 초벌그림에는 감자가 아니었다

달리의 주장이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일부 훼손된 ‘만종’의 그림을 복원하기 위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1963년 자외선 조사(照射)과정을 밟았다. 그 과정에서 박물관 측은 문제가 되는 감자바구니에 X선을 투시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초벌그림에서는 바구니에 감자가 아니라 아기의 시체를 담은 관으로 보이는 물체를 확인했다. 달리의 주장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이 물체가 정확하게 아기의 시체를 담은 관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X선 사진이 너무나 흐릿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밀레가 의도한 것은 감자가 담긴 바구니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동안 개작(改作)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의도로 변형됐다는 것도 유추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이 주장을 따르면 너무나 자극적인 어린아이의 관에 충격을 받은 동료들이 그렇지 않아도 사회 고발성이 짙은 그림들 때문에 비난을 받고, 또한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는 밀레가 걱정이 되어 그에게 충고를 했다. 즉 문제의 아기의 관을 감자바구니로 고치라고 했고, 밀레는 결국 여기에 순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덧붙이자면 그렇게(아기의 관) 그려 놓고 나니 친구들이 계급갈등을 지나치게 조장하는 것 같다고 조언한 것이다. 당시는 공산주의 선언이 있은 지 10여 년이 지난 시기로 계급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던 때였다. 결국 밀레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아이를 감자로 바꾸게 됐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밀레의 ‘만종’은 재해석 될 수밖에 없다. 이 그림은 부부가 감자수확에 대해 감사하며 저녁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조금 비약하자면 배고픔을 참지 못해 죽은 아기의 주검 앞에서 아기를 천국으로 보내 달라며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된다.

‘만종’의 의미가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명확한 기록이나 주장은 없어 정확하게 진실을 판단할 수는 없는 처지다. 흐릿한 관의 모습은 포착했지만 관 속 어린아이 시체까지 확인한 것은 아니다. 

‘만종’은 어쨌든 재해석 될 수밖에 없어

어쨌든 과학이라는 방사선의 일종인 X선이 ‘만종’ 속에 숨어 있는 애절한 비밀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틀림이 없다. 그 실체가 무엇이든 감자바구니 이전의 밑그림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론으로 가자. X선이라는 과학의 밀레의 ‘만종’에 대한 기존의 개념을 바꿔 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치를 훼손한 것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이로 인해 ‘만종’의 가치는 더 상승할 지도 모른다.

밀레는 ‘만종’에 대해 문학적이라고 보기보다 음악적인 감정을 더 강조했다고 한다. 그림을 완성한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평생을 두고 들 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 만을 솔직히 그렸을 뿐이다”

아마 밀레의 불후의 명작 ‘만종’을 감상하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애절한 이야기와 함께한다면 더 좋은 일일 것이다. 이렇게 숨겨진 부분까지 알고 나면 이 그림이 얼마나 위대한 그림인지 알 수 있다.

밀레의 초벌 그림이 농민들 편에 서서 계급갈등을 다룬 작품이라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사실 밀레는 이데올로기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농부의 아들이었고, 농촌을 사랑했으며, 농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했을 뿐이었다. 이 작품을 보면 오늘의 가슴 아픈 농촌 상황이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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