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시인 이재무의 13번째 시집 '즐거운 소란' (천년의시작, 2022)이 출간되자 문단 안팎에서 축하의 ‘소란’이 있었다. 이 ‘소란’에 호응하여 문학평론가 유성호교수는 '즐거운 소란'을 탐독하고 본지에 감상평을 보내왔다. 이에 유성호 교수의 평론을 전재한다. /편집자 주

특유의 미학적 충전으로 인화해가는 유일성

 언제 어디서나 안심하고 찾아 읽는 텍스트가 그리 흔하지는 않다. 균질성이라고 해도 좋고 점진적 진화라고 해도 좋을 것인데, 이재무가 발표하는 신작들에는 늘 그런 든든함이 있다.

'즐거운 소란'은 등단 40년차인 그의 열세 번째 시집이니, 이재무는 평균 3년을 격하여 청춘에서 초로(初老)까지의 시간을 만화경처럼 여러 시집으로 담아온 셈이다.

그 장강대하 같은 흐름 가운데서도 특별히 이번 시집은 이재무 시력(詩歷)에서 기록을 몇 개 세운 것 같다. 일단 실린 작품이 제일 많고 시집도 가장 두툼하다.

두 권의 난형난제로 나올 법도 했는데 이재무답게 그냥 한 권으로 묶었다. 그리고 먼젓번 시집에서 시간거리가 가장 짧다.

2년 터울인데 그동안 수없는 가편(佳篇)들이 그야말로 “신명 나는”(「우중 산행」) 속도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 점도 여느 시집과는 다른데, 비율로 보아 단형 시편이 꽤 많이 실렸다.

결국 이 시집은 이재무의 근작(近作)이 짧은 시간에, 폭발적으로, 비교적 단형으로 씌어졌음을 증언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표는 시간이나 분량 같은 양적 차원의 것이고 이번 시집의 새로움은 “사물들의 모국어”(「나는 여름이 좋다」)를 특유의 미학적 충전으로 인화해가는 이재무 시의 유일성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늘’과 ‘자국’에서 발견하는 생명의 ‘역사’

그러면 이재무라서 가능한, 이재무니까 찾아 읽게 되는 그 유일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지면 제약이 있으니 짧은 시 세 편만 인용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그늘」이라는 작품이다.

나무 곁에서 그늘이 자라는 것을 본다. 그늘은 번지다가 흐르다가 고이다가 출렁거린다. 그늘은 자신을 지나는 것들을 적시다가 덮다가 쓸기도 한다. 그늘은 가지에 난 잎들의 빛에 대한 반란일까, 순응일까. 그늘은 나무의 한숨이고, 눈물이고, 허밍이고, 문장이다. 그늘은 나무의 재부. 그늘을 부족처럼 거느린 나무들이 우뚝 서 있다.

‘그늘’은 그 자체로 물리적 실재라기보다는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생겨난 파생적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비유적으로는 누군가의 보호나 혜택을 함의하기도 한다.

누구의 그늘 아래서 쉰다든가 성장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 용례이다. 이재무는 “밥 앞에서 굴신을 모르는 저 당당한”(「밥」) 나무들 곁에서 그늘이 쑥쑥 자라는 순간을 바라본다. 번짐과 흐름과 고임과 출렁임은 스스로 움직이는 그늘의 자발적 수행 모드들이다.

그늘을 지나가는 것들은 그 움직임에 의해 적셔지고 덮이고 쓸리기도 한다.

이처럼 나무는 정적으로 우뚝하고 그늘은 온통 동적(動的)으로 주위를 품어간다. 빛에 대한 반란이자 순응이기도 할 그 모습은 그렇게 나무의 한숨, 눈물, 허밍, 문장으로 당당하게 스스로의 권역을 확장해간다.

그러니 그늘은 나무의 더없는 재산이고 나무는 그늘을 부족처럼 거느리고서야 비로소 풍요로워지지 않았겠는가.

이처럼 이재무는 “나무의 전신 감각을 내 정신의 기율로”(「나무의 기율」) 삼으면서도, 그 나무를 가능하게 해준 그늘의 존재를 잊지 않는 시인이다. 다음은 「발자국들」이다.

겨울 산길 들길은 얼었다 풀렸다 하는 중에

발자국들이 생겨 나와 서로 나란하기도 하고

포개지기도 하고 걸치기도 하고 엇나기도

하다가 눈비가 다녀가면 씻은 듯 지워지는

것인데 나는 그것이 누군가의 이력이나 약전으로

읽혀지기도 하는 것이어서 걷다가 우뚝 멈춰

어지럽게 길 위에 새겨진 그것들을 새삼스레

골똘히 들여다보는 때가 있다

발자국은 발이 지나간 물리적 흔적이다. 구체적 시공간을 지나간 어떤 실재가 그 시공간을 한없이 늘여놓은 것이 말하자면 ‘자국’일 것이다.

이재무는 그늘이나 자국 같은 징후적 존재를 발견하고 거기에 분명한 존재론적 위의(威儀)를 부여해간다.

누군가의 “이력이나 약전”도 겨울 산길 들길이 얼었다 풀렸다 하는 과정에 남은 “발자국들”이 아니겠는가? 서로 나란하기도 하고 포개지기도 하고 걸치기도 하고 엇나기도 한 그 발자국들의 존재(혹은 부재)야말로 다양하게 살다간 이들의 묘비명 같은 그늘이 아니겠는가?

눈비가 한 차례 다녀가면 지워지고 마는 그 ‘발자국’은 시인으로 하여금 “걷다가 우뚝 멈춰/어지럽게 길 위에 새겨진 그것들을 새삼스레/골똘히 들여다보는 때”를 만나게끔 해준다.

시인은 그때 ‘발자국들’에서 자신의 이력이나 약전도 상상할 것이고 사물들이 “온몸이 귀와 손이 되어 다소곳하게 자신들이 내는 소리를 경청하며 만지고 있는”(「비에 대한 명상」) 순간도 감득할 것이다.

발보다는 발자국, 실재하는 것보다는 새겨진 것들을 중시하는 이재무의 시법이 고스란히 관철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역사」다.

오솔길을 오르다가 군데군데 헐어진 땅을 기워 가는

근방에서 유난히 도드라진 풀들을 본다.

작년 이맘때 이곳에서는 산짐승 사체

하나가 맹렬하게 냄새를 풍기며 썩어 가고 있었다.

1연에서는 오솔길을 오르다가 만난 “유난히 도드라진 풀들”이 주인공이다.

그네들은 지상의 헐어진 땅을 기워가고 있는데 생성과 보완과 회복을 수행하는 양각(陽刻)의 존재자들인 셈이다. 2연에서는 시인이 제목을 달아놓은 ‘역사’의 정수(精髓)가 드러난다.

시인의 기억에 작년 이맘때 이 오솔길에서는 산짐승 사체 하나가 썩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맹렬한 냄새를 풍기면서 말이다. 그렇게 죽어 사라지면서도 맹렬한 냄새를 풍긴 산짐승 사체야말로 “유난히 도드라진 풀들”의 그늘이자 자국이었던 것이다.

그 죽음의 악취가 있었기 때문에 풀들의 생성 운동이 있었을 것이라고 시인은 역사의 본질을 음각(陰刻)한다.

그러니 모든 역사(歷史)는 맹렬한 사체의 냄새에서 발원하여 어떤 결실로 이어져가는 것이고, 그 강렬한 소멸의 자국들이 결국 생명을 만들어내는 역사(役事)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재무는 “흙으로 빚은 형상 뭉개지고/지워지는 날 비로소/나는 완성되는 것”(「완성」)을 꿈꾸면서, 그렇게 소멸을 통한 생성을 환영처럼 불러와 ‘그늘’과 ‘자국’에서 발견하는 생명의 역사(歷史/役事)를 구축해간다.

결국 이재무는 그늘과 자국과 소멸의 기운을 그 어떤 물리적 실재보다 본질적으로 사유하는 시인이다.

이재무 시인.
이재무 시인.

신성하게 반짝이는 순결한 슬픔

독법(讀法)을 달리하면 이재무 시의 편폭은 매우 다층적이고 또 재미나다.

물론 이 ‘재미’는 유쾌한 도락(道樂)이 아니라 슬픔을 현저한 배음으로 하는 인간 이해의 정점에서 “서로가 서로를 쬐는”(「쬐다」) 순간적 충일감을 뜻한다.

그러고 보니 나태주 선생이 건네신 뒤표지 추천사가 퍽 멋지다. “칼칼했다. 주저함이 없었다.

오로지 본질에 충실했다.

어물쩡, 그 무엇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바로 그것을 말했고 그것 자체가 되고자 했다.”라는 말씀은 그대로 압축적 이재무론(論)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더 많은 작품이 인용되어야 했겠지만 이것으로도 이재무 시의 유일성은 충분하게 나타났으리라 믿는다.

정말이지 이재무의 시와 유사한 사례를 우리 시단은 가지고 있지 않다.

조탁을 한순간 뛰어넘는 직핍(直逼)의 언어, 그럼에도 한결같은 수준과 감동을 배태하는 진정성의 목소리, 밑줄 그어야 할 것 같은 잠언들, 의뭉함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명쾌하면서도 처연하기까지 한 이러한 결실을 두고 우리는 이재무의 유일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로서는 결코 심심하지 않게, 후회하지 않고, 아득하게 빛나는 순결한 슬픔을 만날 수 있으리라.

누구 말마따나 슬픔도 힘이 될 것이고 슬픔만한 거름이 따로 있을 리도 없을 것이다.

“신성한/나라이고 거룩한 종교”(「침묵의 신자」)인 나무처럼, “저렇게 푸른빛으로 글썽글썽 반짝이고”(「코스모스」) 있는 별처럼, 오롯한 서정으로 “매일을 속수무책 울며 소리치는”(「나는」) 이재무의 신작을 새롭게 한 편 한 편 읽어본다. 서정시의 한 외롭고 쓸쓸하고 아름다운 정점이 그 꼭대기에서 빛을 쏘고 있을 것이다. (글: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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