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형근 과학전문 기자】 그리스의 아테네가 자랑하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관문인 프로필라이아, 아테네 니케 신전, 파르테논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의 유물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고대 아테네의 한때 화려했던 문명의 위용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기존의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아크로폴리스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2009년 6월 현재의 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유물들도 옮겨왔다.

지금도 고대 아테네의 많은 유적들이 영국이 불법으로 반출해 영국 박물관에 소장돼 있어서 양국 간의 늘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아크로폴리스의 변천 과정을 3D 그래픽으로 표현한 동영상관도 있다. 당시 모습을 아주 비슷하게 눈으로 볼 수 있어 현장감을 느끼는데 도움이 된다.

아테네역병으로 사망한 11세 소녀 '미르티스'를 복원한 흉상. 2450년 전의 역병의 참상을 보여주고 오늘날 코로나19 대유행에 대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아테네 역병으로 죽은 11세 소녀 ‘미르티스’, 이제 역병의 참상을 알리는 전도사로

이 역사적 유물 가운데 방문객의 눈을 끄는 한 흉상이 있다. BC 430년경 아테네에 거주했던 11세 소녀의 상이다.

이 소녀의 유골을 발견한 고고학자들은 이 소녀에게 아테네에서 흔하게 사용되었던 ‘미르티스(Myrtis)’라는 평범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유골은 1994~1995년 고대 아테네 지역인 케라미코스 공동묘지(Kerameikos cemetery) 근처에 지하철역을 건설하기 위해 작업하던 중 집단 무덤에서 두개의 다른 유골과 함께 발견되었다.

집단매장지는 습지대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낮은 담으로 둘러 쌓고 있었다. 이 묘지에는 240구의 유해가 매장돼 있었는데 그 중 최소 10명은 어린이였다.

묘지 내 시체는 흙으로 구획되지 않고 아무렇게 놓여 있었다. 발굴을 맡은 고고학자들은 “이 집단묘지는 기념비적 특징은 없었다. 우리가 발굴한 것은 보통의 싸구려 매장용 그릇들이었는데 검은 그릇, 작은 빨간 그릇 그리고 기원전 5세기 중반 경의 하얀 오일 플라스크 따위였다”고 말했다.

시체들은 하루이틀 사이에 급히 묻힌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모든 사실은 이 집단매장이 공황상태에서 아마도 분명히 역병 때문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고 보고했다.

투키디데스는 사람들은 그 질병이 쉽게 접촉성으로 전염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적었다. 병자를 간호하면 쉽게 전염이 되었다. 이 결과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간호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죽어갔다.

특히 처참한 것은 아픈 자와 죽은 자가 폭증해서 사람들이 치료받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건물 안이나 길 위에 죽어가도록 버려졌으며 시체는 그저 산더미처럼 쌓여 썩어갔으며 집단으로 매장되었다.

그들은 시체 위에 새 시체를 올려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화장용 장작더미를 나중에 자신의 화장에 쓰려고 훔치기도 했다. 역병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은 면역성이 생겨 나중에 병이 든 사람들을 돌보는 중요한 간호사가 되었다.

화장이 관습인 아테네의 무덤에서 발견… 경황이 없어 버려졌을 것

분석 결과 미르티스와 공동묘지에 있던 다른 두 구의 시신은 기원전 430년 아테네 역병 기간 동안 장티푸스(typhoid fever)로 추정되는 질병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치명적인 장티푸스를 유발한 질병의 유전자를 치아에서 분리한 후 기원전 이 유골의 주인공이 430년에서 427년 사이에 아테네 역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 유골은 상당히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 사실 고대 그리스에서 나온 사람의 유골 증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 당시 대부분의 매장 풍습은 화장이었기 때문이다.

미르티스 이전 까지만 해도 에는 고대 그리스의 평범한 유골의 얼굴을 복원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녀의 전체 두개골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양호한 상태였다. 그리스 치과 교수인 마놀리스 파파그리고라키스(Manolis Papagrigorakis) 박사는 본래 얼굴 생김새를 재현하기 위해 스웨덴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미르티스의 두개골의 고해상도 해부학적 데이터를 비침습적으로 얻기 위해 특수 스캐너가 사용되었다. 두개골의 부피는 446입방센티미터로 측정되었다. 스캔 후에, 그녀의 두개골의 정확한 복제품이 만들어졌고, 이것은 법의학적 얼굴 복원의 기초가 되었다.

눈, 귀, 코, 입의 모양, 크기, 위치는 기초 골격 조직의 특징을 통해 결정되었다. 20개의 다른 근육들이 만들어졌다. 얼굴 조직의 두께는 연령, 성별, 인종에 대한 해당 참조 표에서 가져온 평균 값에 따라 평가해 결정되었다.

입의 폭과 입술 두께는 관련 부위의 패턴과 골격 두개 안면 속성에 의해 추정되었다. 미르티스의 재구성된 얼굴에는 갈색 눈과 붉은 머리카락이 있었지만, 이들의 진짜 색은 DNA 분석을 통해서 밝혀진 색을 취했다. 헤어스타일은 당시의 유행했던 것으로 자료에 의거했다.

이제 미르티스는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고대 아테네의 화려했던 역사와 처참했던 대유행의 전염병 아테네 역병의 참상을 알리는 전도사로, 그리고 외교관으로 눈부신 역할을 하고 있다.

아테네 역병은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여성들은 일시적이나마 아테네 관습의 엄격한 속박에서 자유로워졌다. 자유분방해진 여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지나이코노모스(gynaikonomos)라 불리우는 치안 판사도 생겨났다. 

처음에는 흑사병으로, 다시 홍역과 발진티푸스로 간주하기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염병을 꼽으라면 역시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기술한 아테네 역병을 들 수 있다.

이 병의 정체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왔다. 특히 기원전 430~429년 아테네 군인의 4분의 1이 희생됐다고 추정되는 이 전염병은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테네를 ‘한방에 보내는’ 결정타 역할을 했다.

이 전염병은 이후 아테네 쇠락의 전조가 됐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아테네 역병은 기원전 430년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 2년차에 아테네의 승리가 바로 눈 앞에 있을 때 아테네 국가 자체를 황폐화시켰던 전염병이다.

이 전염병으로 인해 약 7만5000명에서 10만명이 이 전염병은 아테네 주요 항구이자 유일한 식량 공급원인 피레우스(Piraeus)를 통해서 아테네의 주요 도시로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동부 지중해의 지역에서 동일 질병이 발생했지만, 아테네만큼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전염병은 그 당시 에티오피아에서 시작했고, 이집트와 리디아를 거쳐 그리스 세계로 전염되어 더 넓은 지중해 전역에 퍼졌다고 기록됐다.

인구가 밀집된 아테네에서는 질병으로 인해 인국의 약 25%가 사망에 이르렀다. 스파르타 군대는 지속적으로 타오르는 장례식 연기를 보고 질겁한 나머지 군대를 철수시켰다고 한다.

이 전염병은 아테네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고, 법치주의의 약화와 종교적인 신념의 약화를 가져왔다. 또한 아테네를 이끈 걸출한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이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아테네의 민주정치도 종말을 고했다. 민주정치의 나약함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페리클레스의 후계자의 무능력으로 아테네는 그 화려했던 문명을 뒤로하고 로마의 출현을 예고했다.

기원전 429년과 기원전 427~426년 두 차례에 걸쳐 전염병이 더 발생했다. 약 30개의 병원체가 아테네 역병의 원인으로 추정되었다.

투키디데스가 지어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재미는 있지만 허황된 점이 많은 헤로도토스에 비해 훨씬 더 현실을 중요시한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술 기법으로 볼 때 대규모 전염병의 발생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당시 아테네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외곽의 시민들을 성내로 불러들여 스파르타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항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는 좁은 공간에서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보건·위생 상태가 나빠졌을 것이란 점도 전염병 발생 가능성을 키웠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DNA검사, 그리고 장티푸스와 비슷해… 병원균의 정체는 몰라

그러면 후세 사람들은 왜 아테네 역병을 오늘날의 장티푸스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과학자들은 미르티스 유골을 분석한 결과 장티푸스와 유사한 병원균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 병원균의 정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밝힌 것은 없다.

투키디테스에 따르면 아테네 역병은 머리에서 증상이 시작돼 신체 각 부분에 나타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가 자세하게 묘사한 역병의 증상을 보면 오늘날의 장티푸스와 너무나 흡사하다.

▲ 발열 ▲ 눈이 붉어지고 염증이 생김 ▲ 출혈과 구취로 이어지는 인후염 ▲ 재채기 ▲ 음성 상실 ▲ 기침 ▲ 구토, 신체의 농포와 궤양 ▲ 극도의 갈증 ▲ 잠을 잘 수 없는 불면 ▲ 설사 등이 그것이다.

보고된 증상과 역학을 고려하여 학자들은 ▲ 장티푸스 ▲ 천연두 ▲ 홍역 및 독성 쇼크 ▲ 에볼라 등일 것으로 추정했다.

역병이 아테네 사회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투키디데스의 상세한 기록에 따르면 역병의 유행 중에 사회의 도덕 관념이 완전히 붕괴됐다.

사회적 종교적 행위에 대해 역병이 가하는 충격은 중세 유럽 흑사병의 유행 중에 남겨진 기록에서도 상세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커다란 사회적 변화… 여성의 자유분방한 외설 막기 위한 치안 경찰 시스템도 만들어

투키디데스는 역병이 창궐하자 사람들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자포자기로 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돈을 마구 쓰기 시작했다.

현명한 투자의 결실을 맛볼 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으며 일부 가난한 사람들은 친척의 자산을 상속받아 뜻하지 않게 부자가 되기도 했다.

좋은 명성을 즐길 만큼 오래 살지 못하리라 생각되자 사람들은 명예롭게 살기를 포기했다고도 기록돼 있다.

역병은 아테네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도 바꾸었다. 여성들은 일시적이나마 아테네 관습의 엄격한 속박에서 자유로워졌다.

아테네인들은 역병 때문에 자유분방한 여성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지나이코노모스(gynaikonomos)라 불리우는 관리를 임명해야 했다.

아테네 여성의 행동을 감독한 아테네의 치안 판사로 여성에 의한 과오나 외설 행위를 막기 위한 일종의 경찰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관리의 임무나 행동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재미는 있지만 허황된 점이 많은 헤로도토스에 비해 투키디데스는 사실을 기반으로 역사를 기술해 '현실 정치 역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무려 2450년 전의 상황을 군더더기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사진= Wikipedia]

역병은 또한 종교 분쟁도 불러일으켰다. 역병이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모두 덮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꼈으며 신을 숭배하기를 거부했다.

종교사원 자체도 크게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피난민들이 아테네 교외에서 몰려와서 사원에 숙박했기 때문이다. 신전은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로 가득 찼다.

아테네인들은 신이 그들을 버리고 스파르타인들을 좋아하는 증거라고 역병을 생각했으며 질병과 의약의 신인 아폴로가 스파르타인들이 전력을 기울여 싸울 때 그들을 위해 싸우리라는 신탁이 나오자 그런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

종교에 대한 회의 늘고 믿음도 사라져, 쾌락주의로

그러나 투키디데스는 이 같은 생각들에 회의적이었으며 사람들이 미신에 사로잡혔다고 믿었다. 그는 당시의 일반적인 의학 지식인 히포크라테스이론에 의지했으며 직접적 관찰을 통해 증거를 모으려 노력했다.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를 먹은 새나 짐승이 죽는 것을 보고 그는 이 질병이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라 결론지었다.

감염병 역사가들은 이 아테네 질병의 정체를 알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다. 전통적으로 이 역병은 흑사병의 초기 유행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알려진 증상과 역학을 재검토한 결과, 다른 설명을 낳았다.

티푸스, 천연두, 홍역, 독성쇼크증후군 등이 용의선상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은 탄저균을 제안했다. 밀려든 난민이나 가축들에 묻혀 들어온 흙에서 왔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최근에 발생한 에볼라 같은 바이러스성 출혈열 질환도 고려 대상이다.

질병의 원인균이 시간이 지나 돌연변이를 일으키거나 질병 자체가 지금은 사라진 것일 수 있어 아테네 역병의 정확한 성격은 결코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피난민에 의한 인구 과밀은 식량 식수의 부족을 부르고 곤충, 이, 쥐, 쓰레기 등의 증가를 부른다.

이런 상황은 하나 이상의 전염병을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하는 과학기술은 새로운 수수께끼를 드러내고 있다.

1999년 1월 메릴랜드 대학은 제5회 연례 의학 컨퍼런스를 개최하면서 주요 테마를 아테네 역병에 두었다.

이 컨퍼런스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그리스인들과 그들의 정치 군사적 지도자 페리클레스를 죽인 아테네 역병은 발진티푸스라고 결론 지었다.

데이빗 듀랙 박사는 "유행성 발진티푸스열이 최고의 설명이 된다. 이 질병은 전쟁이나 궁핍한 시기에 가장 심하게 유행한다. 사망율이 20%에 달하며 7일 정도 지나 사망을 초래하며 심한 합병증을 때때로 동반하기도 한다”고 설명하면서 아테네 역병은 이런 특징이 다 있고 주장했다.

어쨌든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볼 때 아테네 병원균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유사변종으로 진화했는지, 아니면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만 11세의 소녀 미르티스의 유골 DNA 검사에도 나왔듯이 아테네 역병이 오늘날 장티푸스와 유사하다는 주장에 토를 다는 학자는 거의 없다.

앞으로 많은 역병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늘 대유행은 전쟁과 함께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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