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엘리 들로네(Jules Elie Delaunay) 작 '로마의 흑사병'(1869년작)[사진=파리 오르세 미술관]

【뉴스퀘스트=박민수 기자】 '역병은 우연히 찾아온 불행이 아니라 전쟁과 문명의 부산물이었다' 로마제국의 발전과 동방문명과의 교류, 침략 전쟁 등은 끔찍한 역병을 동반했다. 역병은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공포만큼이나 사람들에게 또다른 피해와 상처를 안겼다. 

AD 165년, 터키 남부지역의 고대 도시 히에라폴리스 주민들은 끔찍한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연일 수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쓰러졌고 이들 대다수는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병에 걸렸지만 그 원인과 치료 방법을 몰랐고 역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히에라폴리스는 터키 파묵칼레 언덕위에 세워진 고대 도시로 기원전 2세기경 페르가몬 왕국에 의해 처음 세워졌고 로마시대를 거쳐 오래 동안 번성했다. 로마는 BC 130년 전 이곳을 정복했고 로마인들은 이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라고 불렀다. ‘히에로스’는 그리스어로 신성함을 뜻하는데 이 도시에는 이미 수많은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이처럼 신성한 도시에 살던 주민들은 어느날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퍼지자 공포에 치를 떨어야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발열과 오한, 구토, 갈증, 배탈의 고통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죽은 자들의 몸에는 상처 딱지가 흉물스럽게 붙어 흉터로 남았고 검은 반점들은 온몸을 뒤덮었다.

심지어 몸 안에 생긴 딱지를 토하거나 배설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았는데 설사에는 붉은 피가 섞여나오기도 했다. 기침을 하면 입 냄새가 진동했고 피부에는 발진 때문에 생긴 진물이 나오면서 전신에 악취가 풍겼다.

그렇다고 병에 걸린 사람들이 다 죽음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증상이 나타나고 2주 정도 지나자 자연스럽게 병이 낫는 사람도 생겨났다.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병세가 완화되기 전까지 대개 2~3주 동안 이런 고통을 겪었다.

페르가몬 출신의 의사 클라디오스 갈레노스(Claudios Galenos ·갈렌)는 AD165년부터 AD189년까지 로마 제국을 휩쓴 역병을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증상과 과정을 아주 '간략하게' 기록했다.

로마 제국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이 역병을 후세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갈레노스 역병(Plague of Galen)' 혹은 '안토니누스 역병(Antonine Plague)'이라고 부른다. 위대한 의학자로 오늘날까지도 존경받는 갈렌은 많은 의서를 남겼지만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관찰한 이 전염병에 대한 기록은 아쉽게도 파편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후대 의학자들이 당시 로마 제국을 휩쓸었던 이 역병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분석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단지 상황을 막연하게 추정할 뿐이다.

당시 이 역병의 참상을 기록한 갈렌은 로마 시대의 의사이자 해부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인물이다. 그는 서양 의학 역사에서 해부학과 생리학, 진단법, 치료법에 이르기까지 의학의 모든 분야에 걸쳐 1000년 이상 오랫동안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로마 제국의 황제 안토니누스의 주치의이기도 한 갈렌은 고대 말기와 중세 시대를 지나 근대 초기까지 의학의 황제로 칭송 받았으며 의학뿐 아니라 과학, 철학, 윤리학, 종교 등에 대해서도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남겼다.

1547년 베니스에서 출판된 갈레노스의 저서 '오페라'의 표지[사진=위키백과]

현대의 학자들은 갈렌이 기록한 이 역병의 증상을 참고해 이 역병을 '천연두' 혹은 '홍역'으로 의심하고 있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감염됐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고 약 2주 동안 그 병에 시달린 후 면역력으로 인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 발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천연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 역병으로 인해 수많은 로마시민들이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다. 당시 로마 제국은 귀족과 평민 노예로 사회계층이 이뤄져 있었는데 이 역병은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확산됐다.

심지어 AD 169년에는 로마 황제 ‘루시우스 베루스(Lucius Verus)’가 180년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 황제도 이 역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AD 161년에 즉위한 안토니누스 황제는 로마제국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로마제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江)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함에 따라 이를 막기 위해 방비에 힘썼다. 안토니누스 황제는 평화를 사랑했지만 왕위에 오른 뒤 외적의 침입에 맞서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안토니누스 황제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이 유행하면서, 제국은 피폐해졌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끊임없이 시달렸던 안토니누스는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陣營)에서 결국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이 무서운 역병은 황제라고 봐주지 않고 그를 덮쳤으며 며칠 동안 병을 앓던 그는 AD180년 3월17일 세상과 작별했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는 죽으면서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 오히려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과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하라’고 말해 당시 얼마나 역병이 심각했었던지 엿보게 한다.

클라디오스 갈레노스의 흉상[사진=위키백과]

그렇다면 수백만명의 목숨은 믈론 황제마저 죽음에 이르게 한 이 역병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로마는 지칠 줄 모르는 식민전쟁으로 땅과 노예, 각종 금은보화를 전리품으로 얻을 수 있었지만 영광의 승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전쟁은 자연스럽게 전염병까지 로마 제국의 영토로 실어날랐다.

고대의 사료들은 이 전염병이 AD 166년 이전 실크로드와 로마로 향하는 무역선을 통해 서쪽으로 퍼지기 전에 이미 동방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한다.

AD 165년 말에서 166년 초 사이, 안토니누스와 공동 황제였던 루키우스 베루스가 이끄는 로마 군대는 셀레우키아(티그리스 강의 주요 도시)를 함락했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로마 군단은 이 역병과의 만남을 피하지 못했다.

이 역병은 동방의 전쟁에서 귀환하는 로마 군단을 따라 갈리아와 라인강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에게도 이 역병을 옮겼으며 로마 전역에 급속도로 퍼졌다.

당시 로마 제국의 도시들은 육로와 해로를 통한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 속에 통합돼 있었고 이 네트워크의 구축은 사람과 상품의 이동을 용이하게 했을 뿐 아니라 전염병을 이동시키는데도 역할을 톡톡히 했다.

육로와 해로를 통해 도시를 방문한 군인과 상인들은 이 역병을 좀더 손쉽게 옮겼으며 도시는 또 이 역병을 도시 전체 뿐 아니라 도시와 인접한 다른 지역에까지도 확산시키는 통로 역할을 충실히 해낸 것이다.

로마 제국내에서 이동하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 신속하게 하기 위해 만들었던 도로가 아이러니하게도 이 역병을 신속하게 실어나르며 시간도 단축시켰다.

로마제국의 군대가 정복 전쟁 후 로마로 돌아올 때  소아시아를 거쳐 그리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로 가는 모든 곳에서 역병이 퍼졌다. 이 해괴망칙한 질병은 들불처럼 번졌고 특히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를 중심으로 창궐했다. 지중해 전체를 장악했던 로마의 무역선과 군대는 부지런히 이 역병을 실어나른 탓에 로마제국은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괴질에 시달려야만 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로마에서만 하루에 2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이는 확진자의 25% 해당하는 수치로 총 사망자수는 5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시체를 나르는 수레가 줄을 이었다고 전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인구 3분의 1이 사망했으며, 무적 로마 군단 역시 이 역병과의 싸움에서 맥없이 스러져 엄청난 전력 손실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당시 로마인들은 이 역병이 무엇때문에 발생했는지 그 원인을 몰랐을 뿐 아니라 치료법 또한 알 리가 없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이 전염병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왜곡되거나 과장돼 사람들의 불안감을 더 부추겼다.

후대 학자들은 이 전염병이 로마의 정치 사회 경제는 물론 문화와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인도양의 인도-로마 무역 관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실 이 역병이 어디에서 처음 발생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미국의 시인이자 과학저술가인 아노 카렌(Arno Karlen)은 그의 저서 ‘전염병의 문화사’에서 ‘인도에서 발생했던 천연두가 인도 및 몽골과 중국으로 향하는 스텝(steppeㆍ 러시아와 아시아의 중위도에 위치한 온대 초원 지대. 건조한 계절에는 불모지, 강우 계절에는 푸른 들로 변한다) 지대를 따라 이주하던 훈족에 의해 동쪽과 서쪽 양방향으로 이동하다가 동방원정을 오던 로마 군인들에게 옮긴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문헌에 따르면 AD 161~162년 서북부 변경에서 유목민과 싸우는 군대에 정체 모를 역병이 번져 병사 3분의 1이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역병은 AD171년부터 AD185년 사이 다섯 차례나 더 중국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으며 그 기간 동안 로마 제국도 역시 이 역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역병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만 앗아간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황폐화시켰고 이후 로마제국의 멸망을 재촉하는 계기가 됐다. 물론 그 이전 고대시대에도 로마인들에게 전염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로마는 나름 치수사업을 잘 정비하고 있었지만 늘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데는 한계가 있었고 당연히 수인성 전염병인 말라리아와 장질환 등이 만연했다. 심지어 가장 부유한 로마 귀족들도 전염병의 공포를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었지만 다행이 이정도의 전염병은 치명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로마를 휩쓴 안토니누스 역병은 달랐다. 이 역병은 로마 사회의 많은 부분을 황폐화시켰다. 로마 제국의 군대를 무력화시켜 더 이상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으며 로마제국의 사회질서는 곳곳에서 붕괴되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 전염병은 대량으로 섬뜩하게,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귀족과 군인들도 피하지 못한 역병은 당연히 평민과 노예들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십수년간 지속된 이 역병으로 인해 로마 제국의 인구는 감소했고 로마 제국에서부터 유럽의 북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죽어나간 곳에는 방치되고 버려진 농장들이 즐비했다.

당시 로마인들 사이에 번진 공포와 불안이 얼마나 컸었던가는 병을 필사적으로 물리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 의해 조각된 부적과 작은 돌들에서 발견되곤 한다.

이 역병의 지속적인 공격에 지옥을 경험했던 로마 제국의 대응은 원시적 수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로마인들은 처음에는 신에 의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역병에 대응했다. 히에라폴리스처럼, 로마 제국의 많은 도시들은 생존 방법에 대한 신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 신전의 아폴로에게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다. 도시와 마을들은 대표단을 집단으로 파견하기도 했는데 이는 개인적인 공포 속에서 공동체가 함께 설 수 있는 힘을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병은 쉽사리 물러가지 않았고 공동체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황제는 노예와 검투사를 모집, 전쟁에 필요한 병력을 충원했다. 그는 또 로마 제국 외부로부터 이주자들을 불러들여 그 경계 내에 정착하게 함으로써 버려진 농경지와 인구가 감소한 도시들의 빈속을 메꿨나갔다. 

많은 수의 귀족들을 잃은 도시들은 그들을 다양한 수단으로 대체했고, 심지어 평의회의 빈자리를 해방된 노예들의 아들들로 채우기도 했다. 덕분에 이제껏 아무도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규모의 죽음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제국 운명은 존속할 수 있었다.

'로마사'를 저술한 로마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카시우스 디오는 이 전염병이 로마를 무차별적으로 휩쓸 당시 그것이 초래한 공포과 파괴가 어떠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 역병에 굴복하지 않고 사회를 잘 다스리면서 회복과 재건을 위해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역병이 가져다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에서 나오는 사회는 이전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안토니누스 역병은 현재의 코로나19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고 그것이 강타한 로마제국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구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로마는 살아남았고 그 공동체는 재건됐다.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