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애플TV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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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오광수 대중문화 전문기자 】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렀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 '산다는 것' 중에서

대하 장편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의 한 구절이다. 애플TV 플러스가 10억 달러를 투자한 드라마 <파친코>를 보고 난 직후 불현 듯 이 구절이 떠올랐다. 이 드라마는 <토지>에 비견할 만한 스케일은 아니지만 ‘속박과 가난의 세월’을 살아낸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든다.

일본과 한국을 무대로 제작된 <파친코>는 애플TV 플러스에서 공개된 직후 미국과 일본, 한국에서 동시에 화제가 되고 있다. 물론 화제의 결은 다소 차이가 있다. 한·미·일 각국이 지난 역사의 연장 선상에서 이 드라마를 보기 때문에 누군가는 아프고, 누군가는 불편하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와 1980년대를 오가며 스토리가 진행된다. 부산과 도쿄, 오사카를 주 무대로 하여 격동기를 살아낸 선자(젊은 시절 김민하, 노년 시절 윤여정 분)를 중심으로 한 4대에 거친 가족사가 펼쳐진다. 한국계 미국인인 작가 이민진의 시각으로 기술된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했기에 재미교포, 재일동포 등 디아스포라의 삶에 집중한다.

짧은 시간 동안에 이토록 많은 스토리를 쌓은 민족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그 질문에 답하듯 <파친코>는 시청자, 특히 한국의 시청자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전 세계인 중에서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아온 한국인들이기에 앞으로도 이런 부류의 드라마가 세계 시장에서 더 큰 인기를 얻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땅에서 펼쳐진 역사를 소재로 한 대하장편들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박경리의 <토지>를 시작으로 빨치산의 삶을 다룬 조정래의 <태박산맥>, 조선 민초의 삶을 그린 황석영의 <장길산>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근현대의 역사 속에서 몰락해가는 양반의 이야기를 다룬 최명희의 <혼불>이나 조선의 도적을 그린 홍명희의 <임꺽정> 등도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의 기록이다. 조선 보부상들의 기록인 김주영의 <객주>도 있다.

미국으로 건너가면 그곳에도 녹록지 않은 한국인들의 삶이 있다. 구한말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으로 이주하여 노예처럼 일하던 한국 이민지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진 한 장만으로 미국으로 시집간 한국 여성들의 기막힌 사연도 있다. 미국에 이민 간 이민자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미나리>가 아카데미상에서 주목을 받으며 여우조연상을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미국만 있는 게 아니다. 독일 광부와 간호사로 파견됐다가 그곳에서 한평생을 보낸 재독 교포들도 있다. 또 카레이스키로 불리는 고려인들의 삶도 있고, 조선족으로 불리는 재중동포의 삶도 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펼쳐졌던 조총련과 민단의 치열한 이념 싸움은 또 어떤가. 강제징용을 당해 태평양 한가운데서 죽어가야 했던 청년들도 있었고,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희생된 꽃다운 조선의 여성들도 있었다. 이 작은 나라의 백성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전 세계 어디서든 잡초처럼 근성을 갖고 살아온 것이다.

<파친코>의 주인공 선자(윤여정 분)의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던 ‘언청이’였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은 그 누구보다 뜨거웠다. 아버지는 선자에게 세상을 떠나기 전 ‘부모될 자격’에 대해 말한다.

“옛날에는 내 팔자가 왜 이리 모진가 할 때가 있었지(중략). …그라고 보니께 팔자랑 상관이 없는 기라. 내가 니 부모될 자격을 얻어야 되는 기더라. 선자야. 아버지가 강해져 가꼬 세상 더러분 것들 싹 다 쫓아버렸으니까. 아인나 니도 금세 강해질 거다. 나중에는 니 얼라들도 생기겠지. 그때 되면 니도 그럴 자격이 돼야 된다. 선자 니는 할 수 있다. 나는 니를 믿는다.”

오광수 대중문화 전문기자

폐질환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선자는 삶의 격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헤쳐나간다. 드라마 속 한국인들은 가난하고, 배우지는 못했지만 사람 간의 정이 있고, 없다고 차별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어디에 살면서도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잃지 않고, 누구에게도 머리 숙이지 않고 자존감을 지킬 줄 안다.

엄밀하게 따지면 <파친코>는 ‘K드라마’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 그렇지만 ‘K스토리’임은 분명하다. 앞으로도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과 한국인들의 삶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더 각광받을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 속에는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진한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탄탄한 스토리를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 수 있는 탁월한 제작진과 배우들이 이 땅에는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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