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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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정태성 행동경제학연구소 대표】 우리 마음에 닻내림을 하는 것은 넓게 보면 숫자만은 아니다.

물론 숫자는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하기 전에 기준점을 제시하여 주어진 숫자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사결정을 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아는 닻내림효과 (Anchoring effect)의 사전적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를 둘러싼 어떠한 상황이 우리가 내리는 어떤 의사결정에 영향을 강력하게 끼칠 수가 있는데, 보통 우리는 이를 편향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러한 상황도 일종의 ‘닻내림’이라고 부르고 싶다.

보통 편향이나 휴리스틱은 시스템 2를 가동해야 하는 상황에서 시스템 1이 가동되어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하면 되지만 우리가 심사숙고함에도 불구하고, 즉 시스템 2를 충분히 가동함에도 불구하고 의사결정 전에 있었던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면 이 또한 일종의 닻내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한 때, 우리 사회에 독서의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보면 공리주의에 관한 너무나도 유명한 얘기가 나온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는 기차가 있다.

이 기차가 그대로 달리게 되면 철로에 있는 5명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는 상황인데 만약 내가 비상철로로 방향을 바꾸기만 한다면 5명은 살 수 있고, 비상철로에 있는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과연 철로를 바꾸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사람들에게 물으면 거의 5명을 살리는 답을 많이 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공리주의에 입각한 우리들의 대답이다.

그러나 이 상황을 조금 비틀어 보는 실험이 있다.

데이비드 데스테노와 피에카를로 발데솔로라는 두 심리학자는 “Manipulations of Emotional Context Shape Moral Judgment.”라는 연구를 2006년 심리학회지에 발표한다. (이 내용은 우리나라에 두 사람의 저서인 ‘숨겨진 인격’이라는 책에도 소개되어 있다)

실험의 내용은 똑같이 열차가 계속 달려오는 상황을 가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철로를 아래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인도 위에서, 덩치가 매우 큰 사람을 아래 쪽 철로로 밀어서 떨어뜨리면 열차를 멈출 수가 있다.

즉, 우리는 사람을 5명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상황과 유사하지만 한 명을 희생시킬 때에 내가 다른 사람을 직접적으로 살해하게 만들도록 신체적 폭력을 가했다는 혐오감이 존재한다는 데서 차이가 나는 상황이다.

이 실험에서는 다수를 살리기 위해 한 명을 내 손으로 희생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오히려 소수로 나타났다.

우리가 벤덤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 사이에서 나오는 갈등 속에서 후자를 택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점이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말로 해석하였을 때, '감정적 상황 조작이 도덕적인 판단을 형성한다'는 실험이 이 정도로 그칠 리는 없다.

실험에서는 여기서 감정적인 상황을 조작해서 다시 실험을 한다.

피실험인들에게 5분 정도의 즐거운 짧은 영상을 보여주고, 같은 질문을 한다.

그러자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덩치 큰 남자를 밀어서 5명의 사람을 구하겠다고 대답한다.

미리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했듯이 이 경우는 우리가 교육이든 양심이든 정말로 심사숙고해서 대답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하기 전에 봤던 동영상이 나의 아주 귀중한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친다는 현상을 단순히 ‘편향’으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에 나는 이 또한 일종의 닻내림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친 김에 실험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닻내림 효과에 휩싸였던 상황을 하나 더 소개해 보자. 1982년 미국 시카고에서는 타이레놀로 인한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누군가 타이레놀 캡슐에 독극물을 주입한 후 약통을 매장에 올려놓았고, 이를 사간 무고한 사람이 희생자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도 끔직하지만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이에 대해 미국 정부에서는 제품의 안전을 보장하는 주요 법안을 통과시키고 타이레놀 제조사인 존슨앤존슨은 타이레놀 3100만 병을 회수하고 소비자들에게 주의사항을 발표함으로써 적절한 리스크 매니지먼트의 사례를 보여주는 등 주목할 만한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때, 존슨앤존슨은 문제가 된 타이레놀이 들어 있는 통 겉에 인쇄되어 있던 제조번호를 발표하고 타이레놀을 구입한 사람은 반드시 통에 있는 번호를 반드시 확인하라고 당부를 했는데, 그 번호 중 가장 관심을 받은 번호는 2880과 1910이었다.

이후에 황당하면서도 놀랄만한 닻내림효과가 미국 전역에서 발생하는데, 바로 복권을 구입할 때 이 두 번호를 당첨번호로 사용하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복권과는 아무 연관이 없고, 언뜻 보아도 역사의 유명한 사건과도 아무 관련이 없는 두 번호, 뿐만 아니라 이 두 번호는 행운의 상징이 아니고 불행을 가져 온 비극적인 사건과 연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매체를 통해 워낙 유명해지고, 또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머릿 속에 각인되다 보니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냥 실험에서 밝혀진 닻내림효과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닻내림효과의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것들은 어느 순간 우리 마음에 훅 들어온다.

사건의 경중과 상관없으며, 의사결정의 종류와도 상관이 없다.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불쑥 찾아오는 더위처럼 내 마음 속에 갑자기 들어와서 나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조심할 필요는 없지만 알아두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정태성 한국행동경제연구소 대표
정태성 한국행동경제연구소 대표

※ 필자소개 : 정태성 한국행동경제연구소 대표

2000년대 초반부터 기업의 전략, 마케팅과 스포츠 마케팅, 공공부문의 정책입안 등 다양한 컨설팅 업무를 진행해 왔다.

하지만 컨설팅 결과가 인간의 심리나 행동을 잘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고민을 하던 중, 행동경제학자인 서울대 최승주교수와 빅데이터분석 권위자인 한양대 강형구 교수와 의기투합하여 한국행동경제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후 정부와 기업 대상 행동경제학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강연 및 행동경제학 관련 칼럼과 영상을 통해 행동경제학을 보다 알기 쉽게 전파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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