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근이 들려주는 미래 이야기] “미래를 알 수 없는 미래가 온다”(14)

【뉴스퀘스트=김형근 과학전문 기자】 문명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문명화란 무엇일까? 인터넷은 인류의 문명화에 어떤 일익을 담당했을까?

러시아 출신의 미국 여류 소설가이자 경제철학자인 아인 랜드(Ayn Rand,1905~1982)는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화란 여러 사람들로부터 한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20세기 정보혁명의 산물인 인터넷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프라이버시라는 사생활까지 침해한다면 우리는 참다운 자유민주주의국가에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감금당해 있는 것이 아닐까?

인류가 개발한 최고의 정보기기 인터넷은 이제 창살 없는 감옥으로 변했다. 우리의 사생활까지 침해하고 있다. 미래 소설가들은 인터넷 사회를 전체주의 사회로 묘사하고 있다. 철저한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pixabay]

프라이버시가 없는 인터넷 사회… 문명화 된 사회인가?

우리는 과연 인터넷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성인군자라도 비밀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철옹성에 감추어둔 비밀이라 해도 인터넷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편하게 사는 방법이 있다. 우리의 모든 정보가 이미 다 노출되었다고 생각해버리는 거다. 그렇다고 개인정보 보호를 등한시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생활 노출 여부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면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보호하려고 애를 쓴다고 해서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 그렇다면 현대의 이기(利器)이자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인터넷을 접는 수밖에 없다.

휴대폰이나 스마트폰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인터넷 쇼핑은? 그것도 접어야 한다. 신용카드 결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살 수 있을까?

10여년 전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이 미 국가안보국(NSA)의 대규모 도청과 감청의 감시 프로그램을 폭로하면서 불거진 현실 속에서 우리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묘사한 전체주의라는 반이상향적(디스토피아) 악몽을 떠올린다.

오웰식 전체주의 사회?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예리한 사회의식과 냉소적 풍자정신이 녹아 있는 이 미래공상소설 속에서 오웰은 언어와 역사가 철저히 통제되고 성본능은 오직 당에 충성할 자녀를 생산하는 수단으로 억압되며, 획일화와 집단 히스테리가 난무하는 인간의 존엄상과 자유가 박탈된 전체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정치 체제를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헬리콥터 등을 이용하여 당원들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감시한다. 당원들의 사상적인 통제를 위해 과거의 사실을 끊임없이 날조하고, 새로운 언어인 신어(新語)를 만들어 생각과 행동을 속박한다.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성욕까지 통제한다.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지배 시스템 앞에 놓인 개인이 어떻게 저항하고 파멸해 가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47년에 쓴 작품으로 사생활 침해가 문제되는 21세기의 고도 정보사회에 던지는 일종의 경고다.

오늘날의 현실을 보면 폭력과 억압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오웰식 감시국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부 폭로자는 스노든처럼 박해가 두려워 망명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민도, 불행을 느낄 수도 없는 사회는?

오웰의 선견지명도 대단하지만 ‘멋진 신세계의’의 올더스 헉슬리는 인터넷이 가져올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족집게처럼 짚었다.

그가 태어난 11월 22일은 미국의 연원한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암살된 날이기도 해서 그 역사적 추모의 기세에 눌려 헉슬리를 기억하는 일은 늘 시들했다.

반이상향 비전에 관한 한 헉슬리는 오웰과 정반대인 인물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한 생물학자로 ‘다윈의 불독’으로 유명한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다. 그는 1932년 과도한 기술적 발전을 섬뜩하게 고발한 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펴냈다.

이 소설은 국민을 돌본다고 주장하는 독재자가 통치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그렸다는 점에서는 오웰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 독재자는 권력자로서는 최상의 꿈을 실현했다. 국민이 노예이면서도 완벽하다고 느끼는 사회다. 그 사회가 바로 멋진 신세계다.

AD 2540년 런던을 무대로 한 ‘멋진 신세계’는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의무적으로 우생 프로그램에 등록해야 한다. 그리고 그 후 다섯 가지 계급으로 분류되는 세계를 묘사했다. 낮은 계급의 구성원이 되도록 선택된 사람은 지능과 신체의 발육정지를 일으키는 화학적 처리를 받는다.

‘개인’은 자신에게 미리 정해진 다양한 사회적, 산업적 역할을 아무런 불평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지도자들에 의해 교육되고 만들어진다.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노예조건을 좋아하며 기꺼이 즐긴다. 아무도 병들지 않고 모두의 기대수명도 꼭 같다.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을 동시에 행하여 어떠한 소리나 동작도 낱낱이 포착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 사상 경찰은 텔레스크린을 통해 개개인을 감시한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그렇게 지내다 보니 그런 삶에 익숙해져 버린다.

작품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도 하루 종일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한다. 이런 상황은 조지 오웰이 작품을 썼을 당시에는 단지 미래에 대한 공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그의 저서 '멋진 신세계'를 통해 정보화 사회로 인해 인간이 창살없는 감옥에서 생활하는 미래사회를 예견했다. 고도로 발전한 정보화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사진=Amazon]  

완벽한 노예가 되면서도 완벽한 삶을 영위하는 사회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개인적인 고민을 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그는 누구든지 간에, 그야말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소마(Soma)’로 불리는 환각제(마약)을 사용하도록 권고 받는다.

소마는 마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신들의 음료다. 원래 인도 아리아인들의 전통술로 그 위대함을 찬양하는 노래는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다. 신조차 그 효능을 높이 받들 정도였다고 전한다.

베다 신화에 나오는 주신(酒神)이기도 한 소마는 다른 이름으로 마드라(꿀), 암리타(감로) 등으로 불린다. 마신 사람에게 무한한 활력을 부여하는 천상의 술이다.

효능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신 자의 심신을 건강하게 만들고 용기를 채워준다. 병마를 쫓고 장수를 얻게 해주며 또한 자손의 번영을 약속한다.

이처럼 모든 국민은 인터넷이라는 ‘소마’를 통해 집단 최면 상태로 빠져들어 완전히 체제에 순응하게 된다. 요즘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인 페이스북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중독돼 있을 것을 예상했는지 모른다.

애플과 같은 정보기기업체들이 신제품을 출시하면 사람들은 열광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구매한다. 그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며 즐거워한다.

구글 같은 거대 기업이 그런 도구를 사용해 우리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을 정탐하고 읽고 조사하고 조합하며, 궁극적으로 NSA 같은 국가기구에 그 정보를 넘겨줘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쿠키(웹사이트의 방문기록을 남겨 사용자와 웹사이트 사이를 매개해 주는 정보)’가 우리의 온라인 주체성을 감염시켜 우리의 욕구를 재생산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중립적인’ 검색엔진에서 우리의 취향에 영향을 미쳐도 우리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듯이 미국인 대다수는 구글이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정탐해도 오락만 제공한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멋진 신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되기로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개성이 말살되고 기계 비슷한 인간으로서 완전히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며,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듯한 그 사회 속에서 말이다.

캐나다 철학자 마셜 맥루한이 말한 “우리는 도구를 만들고, 다시 도구는 우리를 만든다”라는 심오한 진리를 곰곰 되씹어보게 된다.

수백만 년 동안 거친 자연을 이기고 어려운 생활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지적으로 설계한 도구는 다시 인간의 진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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