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글·사진 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바다와 경계가 없는 하늘에는 구름이 둥실둥실, 멀리 가까이 크고 작은 섬들은 잔잔한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듯, 흘러가는 듯, 눈으로 섬을 헤아리다 그만두기로 했다.

이따금 지나는 배는 푸른 바다에 하얀 색칠을 한다.

바위섬에 앉아 바라보는 한려수도, 한 폭의 망망대해 도화지에 붓으로 찍어놓은 다도해 쪽배, 물결에 내린 햇살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바닷바람에 억세게 버티며 섬을 지키는 곰솔이 대견스럽다. 

그래서 해송(海松)이다. 

해송은 해안선을 따라 자란다.

어릴 때 자람이 빠르고 척박한 땅, 바닷가의 거친 바람과 염분에도 잘 견뎌 방풍림으로 많이 심는다.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나무껍질이 검어 검솔, 곰솔이 됐다.

또한 잎이 바늘처럼 뾰족하고 억세 강인한 남성의 상징이다.

일본에서는 소나무의 대표로 치며 쿠로마츠(黑松)로 부른다.

등산길 표지.
등산길 표지.
지리산 정상.
지리산 정상.

사량도는 경남 고성군에 있었으나 통영군 원량면(遠梁面), 사량면(蛇梁面)이 되었다.

고려 때 남해의 호국신에게 기원제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시대 사량만호진을 두고 임진왜란 때는 영호남을 잇는 수군의 거점지역으로 거북선과 병력이 주둔했다. 

2시10분 소사나무가 터널을 만들었다.

진달래·쇠물푸레·곰솔·노간주·당단풍· 졸참·노린재……. 이렇게 대궁이 굵은 나무는 처음 봤다.

생강·사람주나무, 청미래덩굴을 마주하다 어느덧 2시30분 지리산 정상(397.8m).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볼 수 있어 지리망산(智異望山)이라 불리다가 지리산이 된 것.

남해의 푸른 바다와 바위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100대 명산 가운데 하나다. 

사량도 예덕나무.
사량도 예덕나무.

예덕나무는 대극과의 낙엽 큰나무로 10m까지 자란다.

붉은빛을 띤 긴 잎자루에 잎은 어긋나며 달걀 모양으로 헛개나무, 오동나무 잎을 합쳐 놓은 것 같다.

남쪽 해안에 잘 자란다.

오동나무와 비슷해서 야오동(野梧桐), 야동(野桐)이라 하고, 새순이 붉은 빛깔을 띠어 적아백(赤芽柏), 밥이나 떡을 싸먹어 채성엽(採盛葉)으로 부른다.

이른 봄 빨간 순을 소금물로 데쳐 떫은맛을 없애서 무쳐 먹기도 한다.

일본·중국에서는 잎·줄기·껍질을 갈아 환약으로 만들어 암치료제로 판매한다고 알려져 있다.

신장·방광의 결석을 녹이고 통증을 없애준다.

위궤양·위암에 달여 먹고, 치질·종기·유선염에 달인 물로 씻거나 찜질을 하면 효과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대항 해수욕장.
대항 해수욕장.

고개 돌려 남쪽을 보면 둥글게 해안선을 만든 항구가 연못처럼 정겹다

그래서 돈지(敦池)인가?

앙증맞은 작은 연못 같은 항구, 돈지 항구 너머 왕관을 닮은 손바닥만 한 섬은 임진왜란 당포해전 때 잠시 지나며 이순신 장군이 대나무 화살을 얻었다는 대섬(竹島)이다. 

“저 섬 사서 나한테 선물해”

“……”

“뭐하게.”

“저 섬에서 살려고.”

“왜구들 밥되기 딱 좋겠다.”

“……”

“무슨 왜구?”

지중해의 카프리 섬 못지않은 절경이니 섬을 사달라고 졸라댈 만하지. 

왜국 왜(倭), 도둑 구(寇). 왜구(倭寇)는 우리나라와 중국 해안에서 약탈하던 일본의 해적.

주요 소굴은 쓰시마(對馬島), 마쓰우라(松浦), 이키(壹岐) 등이었다.

1419년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이 쓰시마를 정벌하기도 했다.

여말선초 수십 리 해안에는 인가가 없을 정도로 황폐화 되었다.

철쭉·굴피·소사나무……. 노린재나무는 굵고 커서 껍데기는 감나무와 비슷하게 보인다.

며느리밥풀꽃, 마삭줄은 잎과 줄기가 빛나고 억세다.

2시50분 능선 한 개 넘어서니 돈지항구는 산 뒤로 그만 넘어가고 옥동마을이 보이자 까마귀 울어댄다.

굵다란 팥배나무 능선의 산조팝나무 잎은 여리다.

쥐똥·예덕나무, 가막살나무의 빨간 열매를 만난 건 오후 3시경.

소사나무 그늘 능선에 앉아 쉬는데 쉼터 나무의자를 다듬는 어른에게 소사나무를 묻는다. 

“……”

“이 섬에서는 소새나무라고 해.”

“억수로 단단해서 농기구 만드는데 썼지.”

“……”

“사진 좀 찍어주세요. 근데 왜 사량도라 불렀죠?”

“어사 박문수가 고성 땅에서 바라보니 모양이 뱀처럼 생겼다고…….”

“…….”

멀리 보이는 바다 물길도 정말 뱀처럼 구불구불하다.

소사나무는 서나무보다 작아 소서목(小西木), 소서, 소사나무로 바뀌었다.

해안, 섬 지방에 많이 자란다.

민간에선 뿌리껍질을 오줌이 신통찮을 때 술과 달여 먹었고 타박상과 종기에도 찧어 붙였다.

잎자루에 털과 잔가지가 많고 맹아력(萌芽力)이 좋아 분재로 많이 쓴다.

서(서어)나무는 서쪽에 잘 커는 나무(西木)에서 유래됐다.

개서나무, 까치박달, 소사나무 등이 사촌 간, 회색껍질은 뱀의 근육처럼 으스스하다.

어긋나는 잎은 가장자리 톱니가 있다.

달바위에서 잠깐 내려서니 3시35분 갈림길(대항마을0.67·지리산2.28·가마봉·0.76·옥녀봉1.62㎞) 대항리 마을은 산그늘 받아 조망이 좋다.

이곳은 바위만 있는 불모지대라 불모산, 지금부터 바위봉우리는 점점 험해진다.

특히 가마봉에서 옥녀봉, 내리막길이 가파른 절벽으로 밧줄과 철 계단을 거쳐야 한다.

초보자나 고소공포증이 있는 이들은 공포의 구간, 둘러가는 길이 있다.

가마봉.
가마봉.

3시50분 가마봉(303m)에 서니 뱃고동 소리가 길다.

산 그림자는 피라미드처럼 대항리 해수욕장을 덮어 차일(遮日)을 친 듯하다.

밧줄을 움켜잡고 깎아지른 절벽을 올라 암벽의 줄사다리를 한 발 한 발 딛고 내려와야 했던 것은 옛일이 됐다.

예스런 맛이 사라져 운치는 덜하다. 

4시에 출렁다리에 닿는다.

39m·22m 폭 2m, 돌탑 있던 곳 옥녀봉(해발291m)이다.

봉긋한 형상이 여인의 가슴을 닮았고 풍수지리의 산세가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 하도의 칠현봉(七絃峰)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일곱 개의 봉우리 있어서 칠현봉인데 봉수터가 있었다.

20분지나 팥배나무 붉은 열매는 알싸한 맛이지만 가막살나무 열매는 별로다.

소사·곰솔·예덕·굴피나무가 이 구간의 대표적인 나무인 듯, 기세를 잃지 않고 산위에서 남해를 지키는 곰솔이 수군만호다.

옥녀봉.
옥녀봉.

흔들리는 출렁다리 위를 걸으면 오금이 저릴 지경이지만 한려수도(閑麗水道)의 경치는 그야말로 그림이다.

여기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간 지점. 해풍에 시달린 노송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고, 바위능선을 감싼 숲은 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돌(奇巖怪石)이 서로 어우러졌다. 

욕정에 눈이 먼 애비가 딸을 겁탈 하려하자 이곳까지 도망쳐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깃든 옥녀봉, 

“사량도엔 결혼식 할 때 신랑신부가 서로 절하지 않아.”

“……”

“옥녀가 질투해 금슬이 안 좋다는 거야.”

팥배나무 너머 금평리.
팥배나무 너머 금평리.

사량도가 고향인 자취집 주인댁이 들려주던 이야기다.

연탄보일러 월세 2만원의 고학(苦學)시절, 배고픈 학생들에게 그릇이 넘치도록 국수를 비벼주던 그때.

세월은 흘렀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막·점, 인심이 무척 좋았다.

딸들이 많아 딸을 마감하고 아들을 낳아달라는 염원에서 막점으로 이름을 지었다는데, 70년대 종말이, 말자, 말순, 말년, 막례 등과 비슷하다. 

4시35분 사스레피·굴피·소나무·국수·생강·산뽕나무, 참 오랜만에 본 참식나무· 청미래덩굴·까치수염, 발아래는 상·하연도교 가설공사 중이다. 

옥녀봉을 내려서면 사량도 선착장이 빤히 보인다.

바위는 간데없고 숲길은 지그재그로 나 있다.

곧장 금평리 마을에 닿는다.

돌아갈 배편을 기다리며 항구의 해삼이나 멍게를 안주 삼아 한 잔 들어야 완전한 산행이지만 낭만이 없는 친구 덕택에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바쁘게 배를 타려는데 최영(崔瑩 1316~1388) 장군 사당이 있다.

고려 말 이곳에서 진을 치고 왜구를 무찌른 자리에 위패(位牌)를 세운 것이다.

홍건적과 왜구를 평정하는 등 고려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장군을 죽인다.

그의 절개와 억울한 죽음을 기려 민간에서 태평성대의 신으로 숭배하고 있다.

5시 원점회귀 사량도 선착장, 섬을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니 마치 뱀이 구불구불 기어가는 물결이다.

5시30분 가오치, 배에는 관광버스를 통째로 실었는데 그 안에 승객도 탔다.

통영으로 내달리니 저녁 6시30분 중앙시장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다음날 통영오광대(統營五廣大)놀이까지 즐거웠던 그 시절의 사량도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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