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글·사진 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가조는 산으로 마치 성곽을 둘러친 듯한 분지, 가야산맥이 내려온 곳이다.

가야산, 우두산, 의상봉, 장군봉으로, 또 마장재, 비계산으로 솟구쳐 오도산, 미녀봉, 숙성산으로 이어진다.

가야산 서쪽으로는 두리봉, 목통령, 수도산까지 뻗어 양각산, 흰대미산, 보해산과 금귀봉, 박유산까지 연결된다.

거창이 덕유산이라면 가조는 가야산이다.

예로부터 가야산 인근이 십승지(十勝地)로 이름났다. 

신라 때 가소현(加召縣) 또는 함음(咸陰), 고려 초에 다시 가조(加祚)로 불렸다.

더할 가(加), 복 조(祚). 가조는 복을 더한다는 뜻이다.

길지(吉地)의 이름, 성경에 나오는 땅 가나안에 버금간다는 것.

병자호란 때의 척화파 정온 선생이 이 지역 출신이다.

◇ 진달래 천국 우두산 장군봉 길

10시 30분 주차장에 도착하니 어떤 산악회에서 돼지머리를 놓고 시산제를 지낸다.

오른쪽으로 가면 마장재 갈림길(의상봉2.2 · 마장재1.6 · 고견사1.2킬로미터), 일행은 고견사 방향으로 걸어 견암(見庵)폭포 못미처 발길을 멈춘다.

산벚나무 꽃잎이 바람에 떨어지니 봄의 무상함은 꽃의 화려함이요, 단풍의 애틋함이 가을의 무상이라, 어쩌면 꽃 피는 이 시절이 제일 안타깝다.

그나마 벚나무에 비해 산벚나무 꽃은 늦게 피어 늦게 진다.

잠시 서서 울컥 인생무상을 느껴본다.

장군봉 가는 길에서 만난 진달래꽃.
장군봉 가는 길에서 만난 진달래꽃.

흐르는 물에 떨어지는 무정한 꽃이여, 수심(愁心)도 하염없이 수십 갈래. 무슨 재주로 가는 봄을 잡아 둘 건가?

쏟아지는 물은 어찌 이다지도 급하며 저리도 바쁜지?

꽃처럼 고운 모습이라도 물같이 흐르는 세월 못 이기니 늙기는 쉽구나.

초목(草木)도 시절을 아는데 낙화유수(落花流水)는 자연의 질서 아니랴?

꽃잎을 띄워 한 잔 들이키니 물소리는 구슬 깨지는 것 같고 바위마다 물을 머금어 파릇한 빛을 띤다.

여기는 그 옛날 신선이 머물던 동천(洞天),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물은 언덕을 당하면 흐름이 빠르고 평지를 만나면 천천히 흘러 형세에 따르니 모두가 물외한인(物外閑人)이라. 

“……”

“오늘은 제 허락 없이 아프거나 늙지 말고 신선이 됩시다.”

“……”

“속세를 초월하여 한가로우면 신선이요, 분주하게 돌아다니면 속된 사람이다.”

“……”

“안 돌아다니면 누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지?”

대뜸 반격하고 나온다.

30분 지나 신라사찰 고견사(古見寺)에 닿는다.

생전에 원효가 와본 곳이라 고견사라 이름 지었고, 은행나무가 천년 주인이다.

어젯밤 꽃비의 향우주(香雨酒)에 절집의 물맛은 감로수, 한 통 채우고 1킬로 남짓한 의상봉을 향해 오른다.

연분홍 꽃 산벚나무는 산사에 병풍을 두른 듯 그야말로 취병(翠屛), 바위와 돌로 만들어진 산길에 현호색, 산괴불주머니 노란꽃이 병아리 입 마냥 앙증스럽다.

11시 반쯤 고갯마루 갈림길(장군봉2.4 · 고견사0.7 · 의상봉0.3)에 닿으니 봉우리 우뚝 섰다.

먼저 온 십 수 명의 등산객들은 의상봉으로 갈 듯 한데, 우린 반대쪽인 장군봉으로 오른다. 

지금부턴 진달래 나라로 온 것이다.

길이며 바위며 능선 따라 만발한 진달래, 꽃잎을 따서 먹으니 알싸한 꽃 맛! 삼짇날 화전(花煎)놀이 시절은 전설이 됐다.

참꽃, 두견화(杜鵑花), 진달래꽃으로 빚은 술을 두견주라 하고, 꽃잎은 꿀에 재어 천식에 먹는다.

이처럼 먹을 수 있고 약에도 썼기에 참꽃, 독성이 강해 먹을 수 없는 분홍색 철쭉과 꽃잎이 크고 반점 있는 수달래 산철쭉을 일컬어 개꽃이라 불렀다.

진달래는 산성 땅에 잘 자라고 기침·가래·천식·고혈압·생리불순에 썼다.

11시 30분 갈림길(주차장2.1 · 장군봉2.1 · 의상봉0.6킬로미터), 흐리고 바람 불어 춥다.

10여분 걸어 의상봉, 마장재가 잘 보인 듯싶더니, 진달래에 취해 길을 잘못 들어 바위길 한참 지난다.

12시 무렵 지남산(1.015미터)을 지나고 꽃잎이 얼마나 다닥다닥 붙었는지 좀 솎아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술이 검붉도록 따 먹는다.

웽웽거리는 벌 소리 요란한데 엄지만한 말벌이 꽃잎사이로 왔다 갔다 한다.

“그만 먹어” 하는 것 같아서 황급히 멈췄다.

온 산 진달래는 절정.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타이어 펑크 때문에 남쪽으로 가려던 계획이 갑자기 바뀌었으니, 진달래 보너스를 톡톡히 받은 셈, 분홍 꽃에 묻힌 오늘 산행은 덤이다.

살다보면 이런 유쾌한 날도 있으니 인생 즐길 만하지 않은가? 

분지너머 미녀봉.
분지너머 미녀봉.
멀리 박유산.
멀리 박유산.

12시 40분 주차장 내려가는 갈림길(의상봉2.7 · 장군봉0.12 · 주차장2.5)을 지나 바로 장군봉(953미터)이다.

스테인리스 표지인데 눈이 부셔 마뜩찮다.

발아래 온갖 집들이며 길, 자동차, 바람, 먼지….

분주한 세상이 흘러가고 멀리 비계산, 미녀봉, 박유산, 금귀봉, 보해산이 한 눈에 보인다.

점심을 위해 바위에 앉았으나 한줄기 일진광풍(一陣狂風), 겨우 요기만 한다.

오후 1시에 내려가는데 15분쯤 내려서니 바리봉 갈림길(바리봉 주차장2.4 · 주차장2.3 · 장군봉0.3 · 당동2.5킬로미터)에서 왼쪽 계곡길로 간다.

산나물에 눈 밝은 친구는 까칠까칠한 쑥을 뜯는데 까실쑥부쟁이다. 

옛날 가난한 불쟁이 처녀는 병든 어머니 대신 쑥을 뜯어 동생들을 먹였다.

어느 날 쫓기던 사슴을 살려주고 함정에 빠진 사냥꾼을 구해 치료까지 해 주지만 상사병에 걸리고 만다.

산신령께 빌었더니 사슴이 나타나 소원 세 개만 들어주는 구슬을 주는데, 맨 먼저 어머니를 낫게 했고 두 번째 구슬로 사냥꾼을 오게 했으나, 이미 처자(妻子)가 있는 몸이라 세 번째 구슬로 다시 돌려보내고 만다.

상심한 처녀는 절벽에 몸을 던졌는데 그 자리에 이상한 풀이 생겨 사람들은 쑥부쟁이라 불렀다. 

쑥부쟁이 가지 끝이 여러 갈래 나눠지는 것은 배고픈 동생들이 많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 한다.

꽃말이 그리움, 부지깽이, 쑥취도 비슷한 이름이고 모두 들국화로 부른다.

꽃의 색깔에 따라서 노란색은 산국 · 감국, 흰색이나 분홍은 구절초, 연보라는 쑥부쟁이, 개미취 종류다.

국화과 식물이 많지만 까실쑥부쟁이는 산에서 많이 자라므로 잎이 톱니처럼 까칠까칠하고, 들나물인 쑥부쟁이 잎은 가장자리가 보통 밋밋한 것으로 구분한다.

1시 30분 숲속에 갈림길이 있지만 안내표지는 없고 장군봉 의상봉 가는 길이라 추정만 한다.

솔숲이 뙤약볕으로 가는 바리봉보다 낫다 오후 2시 층층나무 어린 새순, 병꽃도 꽃망울 맺었고 대팻집나무 햐얀 꽃도 좋다.

계곡물이 졸졸졸 흐른다.

여름 한 철 오고 싶은 곳, 5분쯤 더 내려서니 갈림길 바리봉(장군봉2.3·장군봉2.2·주차장0.4킬로미터), 벚꽃이 눈처럼 떨어진다.

꽃비가 아닌 꽃눈이다.

바디나물을 바라보다 어느덧 오후 2시 20분 무덤 앞에 잠시 쉬고 주차장에 내려선다. 

◇ 무시무시한 비계산(飛鷄山)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닭의 형상 비계산이다.

산행은 합천과 가조 경계 국도변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대구·광주고속도로 광주방향 거창 휴게소에서 바로 올라간다.

휴게소에 차를 오래두면 안될 것 같아 고속도로 안내소에 물어보니 24시간까지 괜찮다고 한다.

휴게소 뒷길로 5분쯤 올라가는데 작은 안내판이 보였다.

정상까지 3.7킬로미터. 경사가 급해서 40~60도는 될 것이다.

어느 고대시대에 쌓은 토성(土城)을 걸어 오르는 기분, 좁은 산길에 기린초 노랗게 잘 피었다.

군락지라 해야 되겠지.

비계산은 거창 가조와 합천 가야에 걸쳐 있다.

북쪽 우두산 줄기가 남으로 이어져 장군봉과 함께 금관을 쓴 닭의 형상으로 고견사는 심장부분, 바람이 세서 남서쪽 밑에 바람굴(風穴)이 있다. 

길옆에 죽 늘어선 연초록 풀과 꽃들, 발밑에는 뾰족한 돌들이 차인다.

인적 없는 컴컴한 산길 오로지 두 사람.

인생은 혼자 살아가지만 인연을 씌워 둘이 촌수도 없이 하나로 형식화된 것.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산은 우리와 몇 촌쯤 될까?

아무래도 사촌 안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일직선으로 곧추선 산길을 따라 1시간 넘게 오르니 갈림길이다.

돌이 많이 흩어져 비탈인 너덜이 많은 산이다.

비계산 정상이 아직도 1.6킬로, 휴게소에서 2.1킬로미터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왔다.

그래도 지금부터는 능선을 타고 걸으니 힘은 덜 수 있으리라.

저 멀리 보이는 바위능선의 파노라마, 오도산·미녀봉·박유산·금귀봉·보해산·장군봉·의상봉·우두산 등 여러 산들이 분화구 같은 들판을 둘러쳤다. 

금귀봉 너머 산들.
금귀봉 너머 산들.
금귀봉 정상 박유산에서 바라본 우두산, 비계산.
금귀봉 정상 박유산에서 바라본 우두산, 비계산.

박유산(朴儒山 712미터)·금귀봉(金貴峰837미터) 너머 남쪽으로 남덕유산, 지리산, 왼쪽으로 황매산을 볼 수 있다.

박유산 올라가는 길에 오리농장이 많은데 정상에 닿으면 가조분지 조망이 색다르다.

금귀봉은 귀한 산이라는 뜻, 탕건처럼 생겨 탕건산, 거북이 형상이라 금구산(金龜山), 봉수산(烽燧山)이라고도 한다.

분지 중심에 솟아 있는 정상에 봉수대의 흔적이 있었는데 남해 금산을 기점으로 사천·진주·단성·삼가·합천·대덕산과 조령을 넘어 서울 남산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산불감시초소, 내려오면서 샘터·산성·절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진행방향 왼쪽으로 마장재 갈림길 팻말이 서있다.

여기서부터 5.7킬로미터, 가야산이 아스라이 보이고 산 아래 보이는 마을은 합천 가야쯤 될 것이다.

연못이 있고 물을 가득담은 논들마다 반찬통처럼 네모반듯하다.

햇볕을 가리지 못하는 능선부의 작은 나무들은 허리에 스친다.

따가운 햇살, 저 멀리 한적한 고속도로는 길게 뻗은 철로처럼 보인다.

이 산에는 곳곳마다 기화이초, 산목련·돌마타리·민백미꽃·꿀풀·수수꽃다리……. 정상을 앞에 두고 짧은 구름다리를 지난다.

눈 위로 보이는 산은 왜 이토록 험상궂게 생겼을까?

대구방향 고속도로에서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짐승이 왼쪽으로 목을 돌린 모습이다.

구름도 희뿌옇게 모여들다 흩어진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이 오도산·미녀봉이다.

1,130미터 정상에 오르니 거창과 합천에 맞닿은 바위들이 위험한 절벽과 우람한 봉우리를 만들고 있었다. 

◇ 선녀를 만나러 가는 길 우두산 의상봉, 마장재

유월의 숲은 어느새 짙은 초록, 일행 중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가한 산행이다.

고견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이 아침 8시, 벌써 등산길 입구에는 시골 할머니들이 길섶에 앉아 푸성귀를 팔고 있다.

다래 순, 머위, 참나물……. 호텔 못지않은 화장실을 나오면서 고천원(高天原) 안내판에 일본서기가 어쩌고저쩌고 적혔는데 이곳은 일본의 태양신이 놀던 신성한 장소로 쫓겨났다는 것이다.

의도가 불순하니 견강부회(牽强附會), 그들은 신화를 만들기 위해 이른바 고천원이 일본은 물론, 바빌론·동남아·중국·한국에까지 있었다는 주장이 황당무계한 날조라고 믿고 싶지만 개운치 않은 데가 있다.

폐교된 인근 대학에 제사까지 지내러 온다니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유사 이래 우리나라를 얼마나 괴롭혀 오죽했으면 제창군이라 했을까?

잦은 왜구의 출몰로 고려 때는 아예 남해안 섬 지역 주민들을 육지로 옮겨 살게 했는데 이른바 공도(空島)정책이다.

조선 태종 때까지 거제도 주민들이 거창에 옮겨와 살았다.

거제와 거창을 합쳐 제창(濟昌)군이라고 했다.

왼쪽으로 오르면 장군봉이고 직진방향이 고견사와 우두봉이다.

어디로 가거나 만날 수 있지만, 오늘은 모두 왔으니 쉬운 산행을 하자고 했다. 

고견사.
고견사.

계곡에는 물소리.

졸졸졸 내려오는 돌 사이를 지나니 쏴~아 바위에서 쏟아지는 폭포는 한결 운치 있다.

모처럼 신이 나서 저마다 앞서 간다.

저러다 길을 놓치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돌과 바위로 이어진 길 20분 오르니 비목나무 고목 앞에 우두산 고견사(牛頭山 古見寺)다.

“옛적에 본 기억이 있는 절.”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에 있는 해인사 말사로 신라 애장왕 때 창건, 의상대사가 참선하던 의상봉이 솟아 있다.

최치원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아래서 쉰다.

보호수 표지석이 있는데 나이는 1,000년으로 되어 있다. 

“……”

“은행나무는 화석 식물.” 

양평 용문사에 있는 것이 1,100년, 학명이 징코 빌로바(Ginkgo biloba).” 

“……”

“한때 징코민은 성인병 치료의 대명사였습니다. 은행나무 밑에 있으면 당뇨병, 동맥경화, 심장병, 암 등 성인병에 좋으니 오래 앉아 계시기 바랍니다.”

“……”

“산에 안 가고 하루 종일 나무 밑에만 있겠습니다.”

“……”

묵묵히 듣고 있던 일행이다.

한 바탕 웃고 배낭을 멘다. 

고견사 은행나무.
고견사 은행나무.

은빛살구 은행(銀杏)은 중국원산으로 손자 대(代)에 가서야 열매를 볼 수 있어 공손수(公孫樹), 잎이 오리발을 닮아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한다.

가로수로 심었지만 열매껍질에 점액질 성분(bilobol)과 은행산(ginkgoic acid)으로 냄새가 심하다.

요즘은 유전자감식으로 수나무만 골라서 심는다.

잎이 넓은 나무는 활엽수 인데 은행나무는 겉씨식물(裸子植物)이기 때문에 침엽수로 분류한다.

갈림길.
갈림길.

산중의 절마다 길을 내고 세력을 확장하는데 고견사에는 차가 들어갈 수 없다.

짐을 실어 나르는 길옆의 모노레일이 있을 뿐, 누구나 걸어 올라야 한다.

그러나 이 무욕(無慾)의 절집이 얼마나 가려는지 모르겠지만 때 묻지 않은 곳이라 생각하니 마당에 있는 전나무, 소나무, 돌멩이 하나까지도 소중하게 다가온다. 

“……”

맥고(麥藁) 모자 쓴 보살님들이 풀을 뽑다가 길을 비켜준다. 

“잘 다녀오세요.”

“방해 해서 미안합니다.”

고견사에서 샘터를 거쳐 안부(鞍部) 능선 재까지 30여분, 전력 질주 했더니 온몸에 땀이 흐른다.

배낭에는 도시락, 물통, 비옷, 신문지, 나침반, 호각, 타박상 스프레이…….

오늘은 일행들 위해 먹거리까지 많이 넣어서 20킬로그램은 더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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