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 우리 정신문화의 원류를 찾고 성리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필자를 비롯 4인의 로스쿨교수는 지난 8월 말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를 여행하였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고 차량 이동 도중에 비가 많이 내렸으나 비가 갤 것이라는 희망으로 전주에서 경주로 이동하는 여정은 멈출 수 없었다. 경주 안강 뜰을 지나서 자옥산, 무학산, 도덕산 그리고 화개산의 위용이 자태를 드러내는 4개의 산이 둘러싸고 있는 풍광이 수려한 옥산서원에 도착하니 다행히 비가 그쳤다.

저녁에 숙소 부근의 첨성대에서 밝은 달을 감상할 수 있었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쾌청한 날씨가 지속되었다. 나의 사주의 일간(日干)이 태양의 화를 의미하는 병(丙)이고, 비가 오더라도 목적지에 가면 날씨가 쾌청해지는 경우가 많아 ‘하레오토코(晴男)’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았다.

옥산서원은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 선생의 학문과 뜻을 기리는 서원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연구와 실천 그리고 입신양명을 위한 강학과 제사공간이 있는 곳이다.

경주는 70년대 수학여행으로 처음 방문한 이래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각각 한두 차례씩 수차례 사찰과 명승 유적지를 방문하여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20년 만에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첨성대를 돌아보면서 예전에 방문하였던 일들이 회상되어 추억의 시간여행도 겸하였다.

경주 일대는 대한민국 국보와 보물의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관광지이며 찬란한 전통문화유산이 모여 있는 한국인의 정신적 원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경주 여행에서 옥산서원과 양동마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옥산서원 부근에는 국보 13층석탑으로 유명한 정혜사라는 조그마한 절이 있다. 옥산서원과 그 맞은 편에 위치한 독락당과 회재 선생이 태어난 양동마을의 방문을 통하여 회재 선생의 학문과 삶의 발자취를 조명해 볼 수 있었다.

회재 이언적 선생은 조선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의 한 분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어린 시절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서 외가에 의탁하여 외삼촌 우재 손중돈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경주 양동마을은 여주 이씨와 월성 손씨의 양대 씨족의 집성촌으로 회재의 외가인 손소의 집인 송첨종택이 있다. 이곳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번 쓴다’는 의미의 서백당(書百堂)으로 칭하기도 하는데 그곳에서 청백리 우재 손중돈 선생과 회재 이언적 선생이 태어난 생가이기도 하다.

회재선생은 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에서 인종의 사부가 되었고, 의정부 검상과 청백리 녹선, 홍문관 직제학, 전주 부윤, 이조, 예조, 형조판서와 경상도관찰사, 한성부 판윤,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의정부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의정부 좌찬성 등 고위직을 승승장구하며 파직과 복직, 그리고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면서 평안북도 강계에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구인록 등 많은 저서를 남기었다.

그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유배지인 강계에서 별세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개인적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족적과 혼이 서려있는 옥산서원의 역락문과 옥산정사 독락당에서 나는 논어의 맨 앞 학이편 제1장의 3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즉,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즉, 멀리 있는 친구가 있어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인부지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즉,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이 구절은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라 쉽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필자와 동료교수들이 경주 옥산서원의 구인당 앞에서 기념촬열을 하고 있다.[사진=김용섭]
필자와 동료교수들이 경주 옥산서원의 구인당 앞에서 기념촬열을 하고 있다.[사진=김용섭]

첫째 구절과 관련하여, 열(悅)이라는 한자는 정신적 기쁨이나 희열을 말한다. 이는 혼자서 느끼는 즐거움으로 독락(獨樂)이라고 할 수 있다. 회재 이언적 선생은 사간원의 사간으로 있으며 권신(權臣) 김안로의 중임을 반대하며 직간하다가 파직당하고 물러나서 혼자 6년간 독서하면서 내공을 쌓은 열락의 공간이 바로 독락당인 것이다.

정치적 화마가 가족에게 미치지 않도록 양동마을에서 떨어져서 은일(隱逸)하면서 조선초 유학자 양촌 권근의 독락당기와 북송시기 사마광의 독락원기를 참고하여 독락당이라고 당호를 정하여 자신의 공간에서 회재선생은 어지러운 정국에서 물러나서 독서와 성찰을 하면서 풍류를 즐기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처세를 보여주고 있다.

독락당은 혼자 책을 보거나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과 풍광을 감상하면서 신독(愼獨)으로 몸을 삼가면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대덕(大德)의 유학자 회재 선생이 거처한 독락당에 인근 정혜사의 스님이 거처할 수 있도록 한 불교의 암자인 양진암이 있는 것은 그가 유교라는 좁은 세계에 갇혀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이 독락당은 양진암을 통해 유교와 불교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계정(溪亭)이라는 계곡을 바라볼 수 있는 열린공간에서 인간과 자연이 소통하는 동락당(同樂堂)으로 기능하였다.

둘째 구절에서 낙(樂)이라는 한자의 의미는 즐긴다는 의미로 서로 뜻이 맞는 친구나 동료와 담소 나누는 즐거움을 말한다. 멀리서 온 뜻을 같이하는 친구와의 교류는 도반(道伴)의 관계를 의미한다.

옥산서원의 입구의 역락문(亦樂門)이 이러한 관계의 즐거움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 일행은 경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신경주역 부근의 앞이 탁 트인 시원한 전망의 시인 박목월의 생가도 둘러보았다.

경주에 살던 박목월은 같은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을 경주로 초청하여 역에 마중나가 만나서 보름 동안 친구와 함께 경주에 머물며, 불국사와 석굴암은 물론 옥산서원과 옥산정사 독락당에도 들리기도 하였다.

옥산서원 입구의 역락문[사진=김용섭]
옥산서원 입구의 역락문[사진=김용섭]

조지훈은 박목월의 초청에 대한 감사의 답례로 완화삼(琓花衫)이라는 시를 친구인 박목월에게 지어주었다. 박목월은 완화삼이라는 시를 받아서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싯귀로 화답하였다. 이와 같은 박목월의 나그네라는 명시가 탄생한 것이 멀리서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는 경주 옥산서원의 역락문을 방문한 함께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인 조지훈과의 역락(亦樂)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셋째 구절에서 불온(不慍))이란 원망하거나 화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칭찬과 사회적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면서 건설적 조언을 주는 경험 많은 선배나 상급자를 꼰대로 탓하거나 타인을 원망하기도 한다.

제3자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하기 전에 자신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오늘날 자기애의 과잉과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하는 현상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자신의 중심축을 유지하면서 외부적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 군자의 길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외부적 환경이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내면적 만족을 취하는 군자와 선비의 자기 만족적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회재 이언적 선생의 삶이 보여주고 있다. 옥산서원의 누각명칭이 무변루(無邊樓)이다. 끝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학문의 세계는 광대무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묵묵히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군자의 길을 우보(牛步)처럼 뚜벅뚜벅 가면 될 일이다.

공자가 논어를 통해 밝히려고 했던 핵심적 사상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답게 대하는 의미의 어질 인(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은 수제(修齊)와 치평(治平)의 요체이다.

옥산서원의 강당 이름이 인을 찾으라는 구인당(求仁堂)이라는 것도 이 점을 보여주고 있다. 옥산서원과 옥산정사 독락당에 들리면 회재 이언적의 서자인 잠계 이전인이 추운지방인 평안북도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아버지를 돌보고 객지에서 돌아가신 후 제사를 지내기 위해 그곳에서 산길로 포항과 경주까지 시신을 대나무로 운구하고 온 행적을 듣고 부자지간의 깊은 정을 느끼게 된다. 그의 아들은 부친의 서책을 모아 이를 출간하도록 하여 후대에 남기기도 하였다.

회재선생 사후에 독락당은 효자인 잠계(潛溪) 이전인과 그의 후손이 물려받았다. 퇴계 선생은 회재 이언적의 공적에 대하여 “잠계없이 회재없다”는 말을 하였을 정도로 잠계 이전인의 효행에 대하여 상찬하고 있다.

옥산서원에는 조선시대 명필의 글씨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추사 김정희, 석봉 한호, 아계 이산해, 퇴계 이황 등의 글씨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 석학과 명필이 펼치는 격조 있는 필체는 그 뜻과 함께 오늘을 사는 후학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경주 옥산서원과 양동마을을 다녀오면서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라는 말이 연상된다. 이는 복숭아 도(桃)와 오얏 이(李)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그 나무 밑에는 길이 생기듯이 이러한 유서 깊은 공간에 대하여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고 본다.

생전에 회재 이언적 선생은 이기론(理氣論) 중에 주리론의 관점에서 원칙을 중시하여 자신의 올곧음을 견지하는 유학자임에도 홀로 칩거하는 독락당 옆에 퇴계 이황 선생이 쓴 양진암이라는 편액을 내건 암자를 지어 인근 정혜사의 열악한 처지에 있는 스님들이 그곳에 기거하며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대목에서 그의 삶의 깊이와 훈훈함을 느끼게 된다.

이번 경주여행을 통해서 느낀 나의 개인적 감상과 평가는 다음의 2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최근 성리학 망국론의 논조가 고개를 들고 있으나, 오늘날 법학이나 법치주의와 유사한 기능을 하였던 성리학에 대한 폄하로 이어져 대한민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치명적 손상과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생애 발자취와 성리학적 실천이론은 기호학파 율곡 이이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영남학파의 퇴계 이황 선생의 주리론(主理論)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의 정신적 원류인 선비문화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이다.

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 김용섭 박사 프로필

- 경희대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
-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 졸업 (법학석사)
- 제26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16기 수료
- 독일 만하임대 대학원 졸업 (법학박사)
- 법제처 행정심판담당관
- 한국법제연구원 감사
- 법무법인 아람 구성원 변호사
- (현) 전북대 법학전문대학교 교수, 변호사
- (현) 국회 입법지원위원, 대한변호사협회 법제위원회 위원
- (현) 한국행정법학회 회장, 한국조정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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